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단색의 소라색(?)이 책의 제목을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게 한다.

제목은 무언가 무게 있으면서도 진중함이 느껴진다.


요즘 말로 많이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속해있는 가정과 그 외의 모임 그리고 내 내면에서 나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 말들은 나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자칫 과하거나 부족해서 잘 전달이 안되거나 오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은 후회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성격도 소심한 탓에 그것들에 대한 묵상(?)이 나도 모르게 깊이 되는지라 괴로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 적도 적지 않았다.

말에 대해 여러모로 곱씹어보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후회하던 중에 발견하게 된 책이었다.


지난 <언어의 온도>라는 책으로 따뜻하면서도 세심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던 이기주 작가님의 두번째 책!


인용된 이야기, 저자의 사색이 마음 깊이 다가와 나도 모르게 책을 읽는 손이 빨라지는 경우가 있지만

저자가 이야기의 말을 기억하며, 서서히 브레이크로 내 속도를 정돈하며 단어를 곱씹었던 시간이었다.


한권의 책은 수십만개의 활자로 이루어진 숲인지도 모릅니다. <말의 품격>이라는 숲을 단숨에 내달리기 보다, 이른 아침에 고즈넉한 공원을 산책하듯이 찬찬히 거닐었으면 합니다. <일러두기 中>

어쩜 말에 대한 그의 깊은 사색들을 어떻게 이렇게 잘 다듬고 갈아 어여쁘게 표현했을까? 감탄이 절로 난다.

단순히 한번의 번뜩이는 생각이 아닌 여러 번 곱씹고 되새긴 생각이 만들어 낸 글들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위에서도 말했지만 정말이지 혼자 있을 땐 말에 관해서 많이 생각했다.


'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왜 나는 그때 이렇게 대처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을까?'

'그때 주책스럽게 그런 말을 그 상황에서 한거야?'


이러한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물어 감정이 격화되거나 분노로 옮겨져서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움으로 치닫게 했다.

이러한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수도 있다.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내가 만든 허황된 것들일 수 있다라고 토닥이지만, 다시 돌아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납득하지 못한다듯한 절망과 서운함과 여러 감정이 나를 휩싸기도 한다.

어쩔 땐 생각관리, 간수를 제대로 못하는가 싶어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러할 때!

이 책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나의 마음은 '말에 베인 상처'라는 몇 단어의 조합으로 위로가 되었다. 말에는 그러한 위력이 있고, 그러한 말의 힘으로 상처가 됨이 나만의 일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며, 상처로 인해 속이 욱씬거리다가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그리고 치유되는 상쾌한 느낌까지 갖게한다. 


그러다가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단어는 와타나베 준이치(<실낙원>의 저자)가 말한 '둔감력'이라나 단어였다.

둔감이란 단어는 평소에 정말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단어다. 선호하지 않는 단어다. 둔감이란 단어를 개인에게 사용했을 때 기분 좋을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복원하고 토닥이는데 우리에게 바로 이 '둔감력'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게 딱맞는 만능지우개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마지막의 말 '그러한 둔감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감정으로 혼란으로 잔뜩 흐트러진 내 정신을 바짝 세워 일으켜주는 듯했다.




하지만 책에서는 여기에서 끝나지만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다시끔 우리가 보지 못한 말의 새로운 위력을 보게 해 준다. 방향성이 아까와는 다르다.

내가 받은 말들로 인해 그것을 보듬어가고 복원하는 과정이었던 것과는 다르다.

바로 우리가 들었던 말은 어디에서 온걸까?

우리가 받은 말에 대해 과연 상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생각에 다시 빠지게 된다.

우리가 무심코 뱉은 말이 다 유익하고 선한 말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그 말들이 상대와 나의 입과 귀를 거쳐서 나한테 돌아온 것은 아닐지 정말이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면서 말은 곧 그 사람의 인품이고 성품이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우리는 매사 신중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그 사람처럼 꾸미거나 우리의 외모를 꾸민다고 해서 우리의 인품이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남을 속이려고 했다가 결국 내가 속았다. 결국 나는 드러난다고 한다는 말이 충격적이다!

그것들이 돌고 도는 인생이 바로 삶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흘려버리는 말은 그렇게 우리와 상대의 오감과 심령에서 돌고 돈다는 것을 생각할 떄 정말 삶이 새롭게 보여진다. 그리고 그간 나의 행동과 말들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모든 관계를 청산해야하나 하는 정말 부끄러운 생각도 했다.

그게 모자란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에너지가 그쪽으로 과다하게 쓰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일까??

그런 생각에 그냥 위의 생각은 한켠으로 치우다 꺼내다 하기만을 반복했다.


그러한 고민을 갖고 읽은 이책에서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시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꽝광 얼었던 것이 움츠러든다고 결코 녹아내릴 수 없다.

움켜쥐었던 자세를 다시 흔들어 펴고 일으켜서 걸음을 내딛어야 녹아내림도 경험하고 다시 오는 봄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사용한 봄과 관련한 비유는 정말이지 평범하고 소소한 자연에서 진리로움을 이끌어낸 상당히 놀라운 깨달음을 우리에게 준다.(이 문장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정리함;;)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의 감정도 그 빠른 속도에 따라서 여기저기 밀치고 흘러가는 듯하다.

특히 말에 있어서 보이는 듯 안보이게 함께 변화에 흘러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잠시 우리를 되돌아 보면 어떨까?

토닥이며 그리고 힘을 내라는 너무도 따사롭고도 섬세하게 힘을 주는 이 책을 읽어보기 위해 잠시 쉬어볼 것을 권한다. 

 

 

쉼이 필요한 것은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그럴 싸한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게 대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는게 아니라, 적절한 때에 말을 거두고 진심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숙성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침묵만 못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개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 p.86


평소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좋은 이들이 많지만, 인간에 대한 배려를 몸과 마음에서 깨끗이 지운 채 분노와 악의로 빚어진 언어를 날카롭게 휘두르는 일들도 더러 본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문장에 마음이 베일 때면, 누군가에게 나도 저런 말을 했었던가 하고 되짚어보면서 상대방의 입술을 은밀하게 바라본다.

.......................................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말과 글과 숨결이 지나간 흔적을, 그리고 솔직함과 무례함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닌지를, 말이라는 악기를 아름답게 연주하지 않고 오로지 뾰족한 무기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를.... p.103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숨막히는 세상이다. 정제되지 않은 예리한 말의 파편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우리의 마음을 긁고 할퀸다. 이같이 난잡한 세상에서 허덕지덕 힘겹게 버티다 보면 헷갈리는 게 있다. 날카로운 언어의 창이 우리를 겨눌 때 촉수를 곤두세우며 예민하게 대응해야할까, 아니면 외부적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하며 무덤덤하게 임해야 할까.

소설 <실낙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런 고민에 휩싸인 이들에게 "둔감력(鈍感力)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鈍感'에 힘을 뜻하는 역 力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자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은 무신경이 아닌 복원력에 가깝습니다." p.106-107


둔감력은 좌절감을 극복하는 마음의 근력 또는 힘을 의미하는 '회복 탄력성resilience'같은 단어와 어감이 묘하게 겹쳐진다.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하지 않으며 ㅏ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력이다. p.108


나는 글을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좌우봉원 左右逢原'이라는 말을 가슴에 아로새긴다.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건과 현상 모두가 학문 수양의 원천이 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삼라만상 모두가 공부의 자원이다. 진리와 이치를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주변을 진득하게 응시하면 어느 순간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p.117


모든 힘은 밖으로 향하는 동시에 안으로도 작용하는 법이다.

말의 힘도 그렇다. 말과 문장이 지닌 무게와 힘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허다하다.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헤엄쳐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돌고 돌아 어느새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몸으로 되돌아온다.


일본의 심리학자 시부야 쇼조에 따르면, 타인을 깎아내리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 살마은 칭찬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상대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상대방을 뒷담화로 내리찍어 자기 수준으로 격하시켜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이다.

p.126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성대중이 당대의 풍속을 엮은 잡록집인 <청성잡기>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부족자 기사번 심무주자 기사황 內不足者 基辭煩 心無主者 基辭荒"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말과 글에는 사람의 됨됨이가 서려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사람의 품성이 드러난다. 말은 품성이다. 품성이 말하고 품성이 듣는 것이다. p.137


사람과 말의 본질도 매일반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하고 감추려 해도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은 언젠가 드러나고 만다.

본성과 본질, 진심 같은 것은 다른 것과 잘 뒤섞이지 않는다. 쉽게 으깨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한 것은 세월의 풍화와 침식을 견뎌낸다. p.148-149


타인을 향해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는 만인이 고민하는 숙제다. 그 과정에서 혹자는 상대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지 못하고, 혹자는 누군가의 화법과 말투를 무작정 따라 하다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말에 비법은 없다. 평범한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차분히 복기復碁하고 자신의 말이 그려낸 궤적을 틈틈히 점검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법을 찾고 꾸준히 언품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 p.153


인생은 작은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강은 단번에 건너뛸 수 없다. 사귐도 그렇다. 크고 작은 돌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씩 밟아가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차근차근 건너가야 한다.

삶과 사람 앞에서 디딜 곳이 없다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인생과 관계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

p.170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수양서인 <사소절 士小節>에서 성인이 알아둬야 할 행실과 언어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적었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야 한다.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거친 말을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176


"당신 멋져!"

몇 해전 송년회 자리에서 접한 건배사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당신이 멋있다"는 겉뜻을 벗겨내면 "당당하게, 신나게 살고, 멋지게 져주자"는 속뜻이 드러난다. p.182


편견의 감옥이 높고 넓을수록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든다.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과 진실을 본인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상대의 입장과 감정은 편견의 감옥 바깥쪽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p.192


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 강이 흐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말이 우리의 귀로 들어오는 순간 말은 마음의 강물에 실려 감정의 밑바닥까지 떠내려온다. p.203


타자에 대한 개방적인 시각은 교황이 남긴 몇몇 어록에 진하게 배어 있다. 언론과 가진 첫 공식인터뷰에서는 "이혼과 낙태 문제에 대한 교회의 공식 입장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역할입니다."라고 했다. p.229


이른 봄에 골목이나 처마 밑을 지나다 보면 희끄무레한 잔설이 쌓여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얼음이 저절로 녹을 리 없다. 빛을 쫴야 겨우내 언 땅이 풀린다.

사람 감정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따스한 햇볕 아래 서 있을 대 삶의 비애와 슬픔을 말려버릴 수 있다. 그떄 비로소 시들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꽁꽁 얼어붙은 가슴도 녹아내린다.

봄기운이 바람에 실려온다 싶으면 컴컴한 곳에 눌러 앉아 있지 말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을 솟구쳐서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삶의 바깥쪽에서 서성이지 말고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런 것처럼 광장으로, 볕이 드는 곳으로, 삶의 온기가 있는 곳으로......p. 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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