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물결치는 가리비 모양으로 이마에 붙이고 목 뒤로 감아올려 서양식으로 꾸민 모습이었다. 꽃 자수를 놓은 비단 가죽신 대신 백인 여자들만 착용하는 앙증맞은 명주 스타킹 위로 발등 끈을 조이는 구두를 신은 그는 은실의 사촌인 예단이었다. 가까운 친구들과 구애자들 사이에서는 ‘단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가 이곳에 온 건 월향을 경성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으리라는 명목이었지만, 은실이 그처럼 월향을 멀리 떠나보내는 진짜 이유는 하야시가 월향의 임신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16%
영구는 은화 두 닢을 발견하고는 즉시 제 주머니에 넣었지만, 은가락지와 담뱃갑은 양손에 하나씩 들어 보였다. "돈은 마음대로 가져. 하지만 그 물건 두 개는 안 돼." 정호가 말했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건 돌려줘." "내가 미쳤냐? 이걸 돌려주게?" 영구가 코웃음을 쳤다. "부자들이나 갖는 물건이잖아. 너 이거 훔쳤냐? 훔쳤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남겨주신 물건이야." 정확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베개 아래서 찾아낸 것들이지만, 정호는 결국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이니까. 값어치가 나가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품이기 때문에 그 물건들은 정호의 것이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19%
정말 오랜만에 딱 내 취향의 이야기들을 접했다. 물론 다 긍정하며 읽은 건 아니지만. 동시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어서 논문과 책을 다 따라 읽을 수 있었다면 좋겠다 싶다. 벤야민처럼 설령 그랬다 해도 읽을 수 없었겠지만. 바르부르크 관련 책들을 쭉 읽어봐야겠다.가르강시아와 팡타그뤼엘이 문득 떠올랐는데 ㅋㅋㅋ 이걸 못외워서 가르강 팡타지아 머시기라고 말했다. 요즘은 그렇게 말들이 안떠올라ㅋㅋㅋ다리가 다 나으면 학교에 찾아가 자료를 더 봐야겠다. 학교 다니고 싶다.
"너." 야마다 대위가 사냥꾼을 불렀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백 씨 곁에 몸을 붙였다. "네놈 이름을 대라." "제 이름은 남경수입니다." 사냥꾼이 서툰 일본어로 대답했다. "대한제국군에 있었나?" 백 씨가 이 말을 통역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류를 막론하고 조센징이 무기를 소유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건 알고 있지? 네놈을 이 자리에서 당장 체포할 수도 있어."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8%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은 다르기보다 오히려 비슷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에게는 각자의 편에 있는 민간인들보다 자신과 맞선 상대편 군인들이 훨씬 더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마련이다. 비록 외양은 초라할지언정, 남경수는 자신의 적수들을 기꺼이 살해하고 동맹군을 몸 바쳐 보호할 인물 같아 보였다. 야마다는 그러한 위엄을 존중했다. "네 무기는 압수하겠다. 네가 사냥을 한다는 소리가 다시 들리면, 그때는 내가 직접 와서 너를 체포할 것이다. 우리를 여기까지 무사히 인도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라."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이를 위해, 혹은 다른 이에게서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었고, 이는 그가 일생을 통틀어 느껴온 은밀한 만족감의 원천이었다. 그는 자신이 완전한 자립을 이룬 존재라 생각했다. 심지어 차갑고 흰 손을 가진 조용하고 우아한 귀부인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서조차 그 어떤 온기와 애정도 갈구하지 않았으며, 여자가 줄 수 있는 사랑을 그리워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후쿠다의 미개한 폭력성 때문에 하마터면 체면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었다는 순간의 가능성은 야마다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의 화를 돋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의 운명에 결부되어 있다는 감각도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남경수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할수록, 이 불쾌한 연결의 감각은 계속 남아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야마다는 남경수를 끌어당겨 한쪽으로 세웠다. 남자는 내내 얼어붙은 듯 침묵을 지키며 저 멀리 쓰러진 백 씨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체 위엔 까마귀들이 벌써 한 무리 모여들어 흥분에 찬 울음소리를 시끄럽게 내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를 찾아와라."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야마다가 조용히 말했다. "내 이름은 야마다 겐조다."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8%
"이 사람 말로는 호랑이를 보내줘야 한답니다요. 상처 입은 호랑이는 건강한 호랑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요. 호랑이들은 영물이라 복수심을 품을 줄 압니다. 불의와 정의를 기억할 만큼 영리하고, 공격을 받아 다치면 상대를 죽일 기세로 덤빈답니다. 게다가, 설령 우리가 호랑이를 죽인다 해도 하룻밤 더 이 산속에 갇혀 있게 되면 우리 목숨 또한 끝나고 말 겁니다요. 이미 어젯밤보다 더 추워졌으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요, 소좌님." 작은 땅의 야수들(리커버 특별판) 중에서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