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UCA: 변동적이고 복잡하며 불확실하고 모호한 사회 환경을 말한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약자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예측하기 어렵고 새로운 위기와 도전이 대두되는 환경을 의미하는 군사용어로 등장했다. 이후 글로벌 정치 및 경제 상황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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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화제의 전시회를 찾아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뻐서 맘에 든다!’, ‘오렌지색이 멋있는 걸’, ‘정교한 표현이 아름다워’와 같은 일차원적인 감상에 머물고, 한층 높은 경지인 감상의 유희를 즐기는 단계에 진입하지 못하는(혹은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의 내가 그랬다.
전시장 안쪽으로 이동하며 작품을 들여다보다가 피곤해지면, 모든 작품이 똑같아 보이기 시작하고 잡념이 머릿속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미술 감상은 미뤄두고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쉬고 싶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기 싫은 숙제를 해치우듯 무성의하게 전시를 관람했고, 좋아하는 그림이나 대표 작품만 골라 보면서 ‘그림다운 그림이라고 할 만하네. 과연 다르군’ 하고 알은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20분 정도에 그쳤다. ‘작품 설명을 읽으면 직감이 둔해지니까 안 읽을래’, ‘해설은 필요 없어. 내 감성만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이 최고야’ 하고 허세를 부리며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이의 치기라고 변명하고 싶은 부끄러운 경험이다. 작품의 껍데기만 보았을 뿐, 의미가 숨어 있는 ‘배경’까지 통찰하는 감상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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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인생과 당시 프랑스의 정세를 정리할 때 ‘경영 전략 기획에 사용되는 PEST분석* 방법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고, ‘틀’에 맞춰 정보를 정리하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실제로 프레임 워크 방식을 적용해 보니 작품의 내면을 들여다보기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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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는 방과 후 활동으로 마이크로봇을 제작하며 그곳에 있던 동갑내기 넷과 친구가 되었고, 그 아이들 집에 놀러 갔을 때, 인생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과 비슷하게 살지 않으며 때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많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재의 집에도 가자는 아이들의 제안에 연재는 하루 정도 고민한 후 기꺼이 아이들을 초대했지만, 그 아이들은 연재의 집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옛것은 빨리빨리 모습을 감춰야 된다는 듯이, 아직까지 탈바꿈하지 못한 연재의 삶을 희한하고 불편한 것으로 치부했다. 정작 살아가는 연재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음에도. 아이들은 착해서 대놓고 집에 대한 품평은 하지 않았지만 그 후로 연재의 집에 가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꼈다. 어떤 것들은 숨길 수 있는 한 숨기는 것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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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 지수가 로봇에 관심이 있었다면 아까 연재가 작성한 부품 목록을 보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조금 더 나아가면 카본과 알루미늄을 섞어 휴머노이드의 중량을 늘리는 이유를 물어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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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외로운 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데에는 수긍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엄마랑 내일 학교 같이 갈까?"라고 설득했다가 "혹시 누가 괴롭혀?"라고 묻기도 했다. 은혜는 입만 꾹 닫았다. 보경에게 설명하고, 그로 인해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은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보경이 지금이라도 화를 내며 은혜를 두고 나갈 것 같아 두려웠지만 은혜의 마음은 문장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보경은 차분했고, 끈질겼다. 이런 건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등 돌아 누워 있는 은혜를 끌어안으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하라고 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들어줄 테니까 아무거나 다 말해도 돼, 은혜야."

은혜는 한참을 망설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보경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본인이 한 말을 어기고 싶지 않았는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만일 보경이 이유를 물어봤다면 은혜는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돌아오는 길이 외로워, 엄마. 힘들지는 않은데 외로워. 외롭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 길을 외롭다고 부를 수 있을 거 같아.

보경은 홀로 학교를 몇 번 들락날락하더니 곧 은혜에게 이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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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생활에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 갈 때 초행자가 당연하게 헤매는 것처럼 낯선 상황에서 아주 조금 당황할 뿐이지 그것은 곧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혜가 모든 길을 헤쳐나갈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불가능이 없는 시대라지만, 은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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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거 아니고?

….

여기서 도망친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어?

도망치면 왜 안 되는데?

뭐?

나도 피곤해서 좀 쉬게. 그게 나빠? 나라고 꼭 매사에 열정적으로 도전해야 돼? 왜? 남들은 안 그러잖아. 네가 말하는 보통 사람들은 피곤하면 쉬고, 힘들면 도망치고 하는 거잖아.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짜증 나 죽겠으니까.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상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그런 세상에 제대로 한 방을 날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을 때마다 분에 못 이겨 경마장을 찾았다. 투데이는 은혜만의 대나무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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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고 말고가 지금 꼭 중요하냐고 물으려던 연재의 대답을 자르며 지수가 대답했다.

"네, 친한데요. 왜요?"

"아니, 둘이 노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담임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학교가 노는 곳은 아니잖아요, 공부하는 곳이지. 아무튼 저희 그럼 가볼게요."

지수가 연재의 손을 붙잡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연재는 자신이 하려고 했던 대답보다 지수의 대답이 적절했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아닐지언정 덕분에 담임은 군소리 덧붙이지 못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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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스각막내피이상증이 나오는 책을 읽고 있다.

안경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도수가 있는 안경을 착용한 사람은 도태된 자로 취급되었다. 그렇지만 주원은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유전성 질환인 푹스내피이상증으로 각막내피세포의 감소가 일반인보다 몇 배는 빠르다는 주원은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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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집에 가는 것보다 주원과 함께 가는 게 훨씬 재미있고 안전했던 것은 맞지만, 다시 말하자면 주원이 옆에 있어 사람들이 은혜에게 굳이 친절을 베풀지 않아 편했지만 반 아이들은 종종 둘을 묶어 취급했다. 묶을 수 없는 두 존재를 꾸역꾸역 묶으려는 단어들은 너무 직설적이었고 너무 일차원적이었다.

"삼차원의 우리가 일차원의 말에 상처받지 말자."

주원이 말했다. 은혜는 정말 그게 가능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가끔은 자신과 주원이 삼차원에 있고 아이들이 다차원에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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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는 묻고서 멍청한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진화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의 결과물일 뿐이다. 심지어 상아의 탈락은 오로지 인간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이 좋은 진화일 리가. 관리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들의 종족을 없애는 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만을 바라야죠."

그로부터 며칠 후, 얼룩말의 집단자살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복희는 관리인의 말을 평범한 농담쯤으로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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