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름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박범신 님의 작품을 내가 읽어봤던가? 생각해보니 얼마전에 「소소한 풍경」을 읽었다. 그러나 그외 다른 작품은 읽었던 기억이 없다.
「주름」을 읽고 나서, 그 분의 작품관은 어떠한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검색해 보니 지식백과 인물사전에 간략하게 나온 박범신님의 문학은 감성적 묘사 위주의 시적인 문체, 어두운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대결,
비정한 문명과 인간성에 대한 비판 등이 특징적 요소라는 것이다.
비정한 문명, 인간성에 대한 비판, 현대인의 욕망과 좌절...그리고 사실적인 인간 세상의 모습들과 낭만적, 풍자적으로 그려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름」에는 어떠한 특징적 요소를 담고 있을까?
내가 느낀 바로는 비정한 문명, 현대인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어두운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대결과 위험한 낭만이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특징이라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주름」은 야하다.
놀랄만큼 위험스럽고, 불온하기도 하며, 안쓰럽기도 하고, 무척 야하다. 그것은 아마도 성적욕망이 사랑과 죽음이 함께 결합되어 표현되기
때문이리라.
얼마만에 읽게 된 성인 소설이었는지...ㅎㅎ
「주름」은 사랑과 자유, 인간에 대한 본질과 죽음으로의 여정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1997년 한 겨울, 아버지가
가출하셨다.
20년간 회사를 빠진 적도 없고,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이 있던 지극히 평범하였던 아버지가 가출하신 것이다. 왜 가출 하신 걸까?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아버지가 가출하게 된 이유와 가출 후의 아버지의 삶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2년 후, 아버지가 시베리아에 계시다는 소식을 받게 된 선우.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그날 보았던 아버지는 한마디로 쇠약해진 양이 주술에 걸려 폭삭 늙어 주저앉은 말과
같았다. 천예린 시인은 놀랍게도 죽은 채,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바이칼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뵈는 위치였다. p33
왜 선우의 아버지는 가출 2년만에 이런 모습이 되어 있었을까?
이것이..... 늙은 거야. p51
그동안 나는 뭐하고 살아온 거야. p53
과거의 내 삶은 사람살이가 아녔어. p127
아버지 김진영은 어느 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와이셔츠 단추를 보다가 문득 평소때와는 다른 생각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회의가
생긴다.
김진명은 노란 우의를 보고는 자석에 끌려가듯이 따라가다가 미술학원에서 '천예린'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화생활이란건 전혀 하지 않고 일만 하였던 그가 천예린의 시낭송이 있음을 알게되고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천예린의 일방적인 행동에도 그는 무작정 그녀를 따라 동해까지 가게된다.
그들의 사랑, 아니 김진명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만의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가 옆에 있었지만 그녀는 김진명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오롯이 김진명은 천예린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독을 품고 있었다. p 140
그녀, 천예린이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김진명은 한강에서 뛰어내려 죽을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자금 담당 이사인 김진명에게 돈을 빌려서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유부남이었다)가 사업에 망하게 되자 그 남자가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김진명과 천예린의 데이트는 최고급으로만 하였기 때문에 그는 회사의 공금을 횡령하게 되었고, 아내와의 관계는 이미 트러졌기에
천예린이 떠나간 것은 그에게는 파멸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녀는 대체로 나를 한 인간으로서 대등하게 존중해주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내
자아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사회구조 속에서 훈련받은 가짜 자아, 그 허위를 깻박치고, 평생 억눌려 있던 본질적인 나의 다른 자아를, 그녀는
부드럽게 끌어내어 동등한 우의로 그것을 존중해주었다. 내가 수치스럽다고 여기어 한사코 폐기 처분 했던 본능을 존중해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최종적으로 내가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을 뿐 아니라,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대등하게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다. p
294
천예린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와 그의 여정의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죽음을 옆에서 헌신하며 지켜주었다.
소유로서 사랑의 완성을 꿈꾼 것이 아니라, 그녀와 내가 진실로 찾고 싶었던 그 무엇은,
영원이었다. p 370
김진명은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하였다.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였기에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고, 그녀가 그리웠기에 시베리아까지 그녀를 찾아 나섰고, 그녀가 옆에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을 하였다.
그녀의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그녀 몸에 난 종기들을 , 피고름을 핥아 주기까지 하는 김진명의 사랑.
그러나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 옆에서 그녀를 지켜준다.
「주름」은 충격적인 사랑이다.
며칠 전에 읽었던 김홍신 작가의 <단 한 번의 사랑>과 사랑에 대해서 참 대조적이었다.
단 한 번의 사랑에서도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주름은 '넌 내꺼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그런 집착을 원했던 듯 하다.
하지만 그녀를 소유한 듯 했으나, 그는 소유의 사랑이 아닌, 영원을 원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단 한번의 사랑과 주름의 사랑에 대한 결론은 같은 것 같다.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
「주름」은 위험하고 불온하고 충격적인 사랑과 함께,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그런 삶을 살면서 잊혀지고 묻혀져 버린 어릴 적 꿈과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김진명은 가정을 이루고 당연히 책임감을 갖고 일에 충실하며 집에는 돈만 벌어다 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자신의 꿈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책임감만 갖고 살아가다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천예린과의 성적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잊어버렸던것, 자신의 꿈, 그리고 자아를 깨닫는다.
김진명이 그녀를 만나기 전의 모습은 보통의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 아니 지금 40대 중반 이후의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고독하고 외로운 우리들의 아버지, 우리들의 남편이 될 수 도 있겠다.
삶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들일 수 있겠다.
항상 바쁘지만 무언가 텅 비어버린 듯한....
「주름」에 대한 서평을 어떻게 결론 내려야 될까 고민스럽다.
처음엔 야해서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였지만, 박범신 작가님의 저력이 느껴지는 멋진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침묵의 집>으로 1999년에 출간되었었고, 7년 만에 꺼내어 1000매 이상 깎아내어 나온 것이 「주름」이라고 한다.
또 9년후 다시 300여 매쯤 깎아내어 지금의 「주름」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이렇게 한 작품에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마침내 단 한 줄로 삶의 유한성이 주는 주름의 실체를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그때 아마 나는 작가로 성숙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p 431
멋있는 작품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무언가 찐한 사색과 여운을 주는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