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어려운 책이었지만 정말 좋았다. 왜냐하면 어려웠기 때문에 계속 묵상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쉽게 다른 책들처럼 넘기며 읽는 책은 아니었다. 계속 생각하며 읽은 책이라 머리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울렸던 책인 것 같다.
이 책은 아마도 장로님이 예전에 내게 선물해 주신 책인 것 같다. 장로님의 마인드가 많이 녹아져 있는 것 같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성경공부를 하지 못하지만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보완이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 분명 그때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때는 조금 더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읽어보고 싶다.
< 다시 읽고 싶은 글귀>
종교학에서 자기 부인이란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욕망이 부인입니다. 어떤 종교가 표방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해 인간의 욕망이 부인되어야 한다면 그 종교는 고등종교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처럼 보이지만 단지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면, 그 종교의 형태에 상관없이 그것은 하등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에는 이슬람교가 추구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은 이 세 종교를 모두 고등종교로 분류합니다.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세 번째 현상은 신앙의 기복화입니다. 신앙이란 절대자인 신 앞에서 인간이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소유나 달란트로 신을 달래고 얼러 신을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변화 없이 자기 욕망을 위해 신을 변화시키려고만 한다면 그가 설령 고등종교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미신과 대체한 자요, 그런 자를 가리켜 기복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청년이 새로운 미래를 견인하는 현존하는 미래가 되었습니다. 토인비의 지적처럼, 이 청년에 의해 유럽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로잡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좇아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나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떼제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떼제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면, 현존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삶의 현장에도 현존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현존자 하나님을 만난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현존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 떼제 찾기를 거듭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만 현존하고 계시는 것으로 그릇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전능자께서 내 삶 속에 현존하시면서 인생의 모든 광풍으로부터 나를 책임져 주심을 믿을 때에만 우리는 현실을 도피하고픈 그릇된 피한 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코끝의 호흡이 멎으면 대형 쓰레기에 불과한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느 날, 고작 화물이나 대형 쓰레기로 불현듯 끝나 버릴 인생이 대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안다 말하겠으며 무엇을 할 수 있다 장담하겠습니까? 현존자요, 영원자요, 전능자요, 절대자시며, 심판자이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오 함께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단 1초인들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나의 눈을 가리고 있는 비늘을 벗어던지고 하나님과 나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고 깨달을 때에만, 허황되고 가식적인 모든 구호와 집착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가 쌓여서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은 스쳐 가는 1초 1초는 이내 사라지고 말지만, 동시에 여러분의 삶 속에 축적, 반드시 살아남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청년 시절 또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미래 속에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또렷이 각인되어 남을 것입니다.
주께서 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믿음은 특정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산의 중심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그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고 바로 그곳이 곧 하나님이 성전이며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나 자신을 주님께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나를 붙들어 매는 것이요,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나를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음성으로 발해지는 기도도 귀하지만, 입을 다물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기도는 더욱 귀합니다.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임 없이 나의 바람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런 기도를 통해 어찌 나의 심령을 그분께 붙들어 맬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 더러운 것뿐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음성에 나를 붙들어 매지 않고 내 속의 것을 발하기만 하면, 과연 그런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바치는 향기로운 향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는 영이십니다. 우리가 기도드리기 위해 눈을 감을 때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존자로 우리 앞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위해 입을 다물고 그분 앞에 겸손하게 앉아 있을 때 우리의 심령이 당연히 그분의 영향을 받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정화되고 새로워지지 않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그분으로 인해 우리의 존재가 새로워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침묵의 기도 없이는 그 누구도 바른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위대한 비전의 시인이란 위대한 통찰력을 지닌 시인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비전을 지닌 자의 시선은 언제나 오늘을 뛰어넘어 보다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그곳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흔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켜 "비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지금부터 미래의 자신을 스스로 일구어 가기에 그에게는 장래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인간이 방자 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그의 삶은 방자 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즉, 비전이란 반드시 그 비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꿈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비전을 지니 사람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요, 그 미래에 부단히 자신을 맞추어 가기에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과가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꿈은 다만 머릿속으로 즐기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꿈은 거기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단지 즐기는 것만으로 족한 꿈이란 현실도피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습니다.
-미우라 아야꼬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