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언어의 온도. 2016년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테디셀러 책이다.  입소문에 힘입어 나도 읽게 되었다. 도서관에서도 인기가 많이 꽤 오래 기다리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도 제목을 잘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 표지도 제목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주라는 작가에 대해서 처음 알았다. 그동안 책을 꽤 많이 쓰신 작가분이신데, 거의 무명으로 계시다가 이 책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신 분이시다. 놀라운 건 이 책은 작가 1인 출판을 통해서 출간된 책이라는 것이다. 1인 출판도 잘하면 이렇게 스테디셀러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만들어준 책인 것 같다. 그만큼 작가는 이 책 홍보를 위해서 스스로 캐리어를 끌면서 동네 책방을 수없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런 노력 끝에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인기를 끌게 되면서 스테디셀러까지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난후 느낌은 정말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책 표지처럼 보라색이지만, 차가운 느낌보다는 어딘가 따뜻한 느낌을 준다. 짧은 에세이 같아서 읽기도 쉽고, 읽고 난 다음 작가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는 글도 있었고, 읽으면서 저절로 고객을 끄덕끄덕 거리기도 했었다. 정말 이 책의 언어에서 온도가 느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국어 선생님이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모범적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사용하지 않아서 몰랐던 표현들을 국어사전을 통해 찾아보기도 했고, 아..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었구나.. 하며 새삼 국어공부를 하게 된 책이다. 한글은 정말 아름답다. 표현력도 뛰어난 글인데, 나 또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만큼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중간중간 한자어에는 친절하게 한자로도 명기해 준 부분이 많다. 언어를 설명해 준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만큼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던 것 같다. 왜 이 책이 꾸준하게 인기가 있는지 알 것 같다. 요즘 책들처럼 뭔가 혁신을 바라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들이 아니라, 이렇게 잔잔하게 삶을 그리는 책이 독자들은 그리웠던 것 같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언어의 온도를 통해서 마음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던 책. 이런 책을 써주신 작가분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시 보고 싶은 글귀>

순간, 난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라거나 "할머니는 다 알지"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었다. 내 어설픈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아파 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가 알려주려고 한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니었을까?


거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그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라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 나무를,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뛰어간다. 그러나 둘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 발걸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역시 사랑의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특히 체념은 슬픈 단어다. 국어사전에 실린 체념의 정의는 이렇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는 것' 무서운 이야기다. 희망을 삼켜버린다니... 이런 까닭에 오지 탐험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곧잘 한다. "조난자를 죽으로 내모는 건 식량 부족도 체력 저하도 아닙니다. 조난자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체념은 삶에 대한 의지까지 꺾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빨리 면한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이 낯설기까지 하고, 심지어 옳음과 그름의 기준도 시시각각 변한다. 정답은 없다. 아니,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고 모두가 오답이 될 수도 있다. 복잡한 사실과 다양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삶도, 사람도 그리 단순할 리 없다.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우린 생명으로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를 만난다. 혹자는 그걸 당연한 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만큼 맹목적인 것도 없다. 어머니는 자식을 대할 때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손익 계산에 골몰하지 않는다. 위기에 처할 때 시금치를 한입 베어 물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뽀빠이처럼,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몸과 삶이 부스러지는 순간까지도 자식을 돕는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어머니와 자식의 만남은 단순한 생물학적 조우일 리 없다. 어쩌면 어머니란 존재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신이 선사하는 첫 번째 기적인지도 모른다.


"이 작가, 엎어지면 좀 쉬어가요. 가끔은 명료한 공백을 가져봐요."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당당하게 교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 보는 '눈'이란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앙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을.

'나'를 헤아리는 일에도 서툴다. 소셜 미디어로 타인과 소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자신과 소통하며 스스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싸워 야 할 대상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마다 나는 숀 교수가 들려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곤 한다. 그러면서 하릴없이 되뇐다. 살면서 내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인지 모른다고. 우린 늘,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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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1-1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하게 써주셨는데 기억하고 싶은 글귀의 페이지도 같이 적어주시면 , 작가의 글인지 , 구분이 더 쉬울거 같아요 . ^^ 넘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