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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평점 :
참 좋은 책을 읽었다. 지금 나의 상황과도 잘 맞는 책인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때, 어떻게 죽어야 할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우리는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기가 우리 모두가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태어난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것에는 순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내일 아니 이 글을 쓰고 난 다음에 내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궁금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짜 모르겠다. 다들 나와 비슷할 것 같다. 처음 사는 삶이라 모르는것 투성이다. 분명 삶은 즐거운 것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죽고 싶은 일들이 많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나만 이렇게 사는것도 아니다. 다들 자신만의 인생의 짐들을 들고 있다. 그런데 왜 다들 삶은 좋은거라고 할까? 왜 이승이 저승보다 더 좋다고 말하는 걸까?
삶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때 이상하게 죽음에 대한 책을 많이 봤던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 담담하다. 아마 마음이 정리가 되었고, 앞으로는 언제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결심을 해서 그런것 같다. 내 아이가 나 없어도 괜찮을 정도까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살다보면 살아진다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삶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게 되나보다. 아등바등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약 큰 병에 걸릭 되서 삶을 정리하게 된다면 솔직히 감사하다는 마음이 생길 것 같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건 그만큼 내가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그럼 그 시간동안 나는 미리 살아있을때 장례식을 할 것 같다.
예전 어느 영화에서 보고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살아 있을때 사람들을 만나 만찬을 즐기는 것이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마지막 인사를 잘 하고 싶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과 단 둘이 여행을 갈 것 같다. 여행이라고 해서 먼 곳을 간다기 보다 우리 둘이 이야기하기 좋은 곳을 찾아갈 것 같다. 엄마로서 딸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을 할 것 같다.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라고 하면 딸도 잘 들어줄 것 같다.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너무 슬퍼하지 말것.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것. 우리는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으니 그때를 기약할 것. 그리고 그때 또 엄마랑 둘이서 데이트 하면서 어떻게 살고 왔는지 이야기 하자... 그러니까 엄마한테 할 이야기 많이 만들어서 오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정말로 사랑하고 엄마딸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도 꼭 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감 갖고 용기내서 삶을 살아가라고... 하고 싶은거 다 부딪쳐서 해보며 살라고...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꼭 해주고 싶다.
< 다시 읽고 싶은 글귀>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거창한 일들은 아니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다.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별것 아니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르고 산다. 게다가 죽음을 코앞에 두 노년의 환자가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를 계획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생각해 본다 하더라도 남은 날을 '더 살고 싶다'는 바람만 되뇌며 보내기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특별한 보너스일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남은 날은 00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나는 간혹 관자 곁에 있는 보호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가요?"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럴 때면 가족이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만큼 서로 모르는 존재도 없지 싶다. 타인은 모르는 대상이기에 예의를 갖추고 서로 알기 위해 대화하지만 가족은 날 때부터 가족이었으므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무슨 문제가 생기든 결국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상처 주기 십상이다. 언제나 '가족이니까'와 '가족인데 뭐 어때?' 그 언저리에서 누구보다 가장 모르는 존재가 되지 쉬운 것이 가족인 것만 같다.
전자제품에 리셋 버튼이 있듯이 가끔 우리 인생에도 리셋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인생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이 버튼을 누르고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주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물론 어디까지나 꿈같은 이야기다. 지나온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리셋 버튼이란 건 없다. 결국은 행복해 보이는 그이 모습이 부러웠다는 이야기다. 그 같은 변화가, 삶을 대하는 길이와 여유 있는 태도가. 그럼에도 나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은 내가 그 같은 리셋 버튼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라고. 언젠가는 나 역시 그 같은 순간을, 무엇인가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아버지라는 보호막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한다. 남들은 비 같은 것 맞지 않고 잘만 사는데 왜 나만 비를 맞아야 하느냐고 불편을 늘어놓는 것조차 사치다. 생존의 문제가 걸리면 그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비를 맞으면서도 비가 그치고 나면 해야 할 일들을, 눈앞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가,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곱씹어야 한다. 아버지라는 그늘 아래에 머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던 나이에 정신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으나 온전히 내가 견뎌내야 하는 내 몫이었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한 뒤에 마지막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사랑할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걸까? 대부분 유한한 시간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고 살라는 말이다. 어쩌면 사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할 때에도 그 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살면서 가끔씩 그 말을 기억한다면 그 두 사람처럼 남은 날들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까? 그 순간의 그 미소가. 그 손짓이 아들이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저마다 다른 표정과 다른 말들로 남은 날들을 채워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종종 그날의 아버지가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면 문득 내 목숨은 내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암과 맞서 싸우는 오늘의 내 모습이 내일의 가족들에게는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언젠가는 오늘의 나를 가족들이 이해해 줄 날이 반드시 온다. 내가 이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때의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듯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구나 싶다. 비록 인간의 생이란 유한하기에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지만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어진 남은 날들을 조금 다르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연극은 끝나고 주치의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 환자의 저승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환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삶에 대한 의지는 한 끗 차이이고,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일단 마음부터 편하지 않은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떠나고 난 뒤 타인의 기억에 남을 내 마지막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해 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내가 떠난 뒤에만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삶에서 드러난다.
삶을 잊고 있을 때 떠나간 환자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나를 향해 묻는다. 언젠가 당신도 여기에 다다르게 될 텐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여기에 당도하고 싶은가?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한번 생이 감각이 팽팽해진다. 어쩌면 죽음만큼이나 삶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잘 들어보라. 삶을 잊은 당신에게 누군가는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종착역에 당도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묻는다. 이제는 남아 있는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서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