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아이들
최의택 지음 / 아작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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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살아가는 우리들



작가가 작가이기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소수자의 위치에 서 보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소설 속에 녹아있어 안일하게 살아온 내가 깨닫지 못했던, 보지 않던 것들을 툭툭 건들인다. 



작가의 인터뷰를 먼저 보았기에 그냥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이려나?' 하고 안일한 생각으로 책을 집어들었는데 중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 '유령'이 보이는 이유를 알았을 때의 느낌이란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달까.


소설 내내 가히 현재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4부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불현듯 떠오르는 한 구절.



'나지율, 나노아...'



정작 이 부분을 읽을 땐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었는데, 문득 그들이 같은 성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그리고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되고 배제된 경험이 있는 작가이기에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보고 소설 속에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책들이 바로 소설을 읽는 이유이자 소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 절여지고 잠식된 뇌를 한번씩 툭 툭 건들이는 책들 말이다. 평소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보지 못했기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뜨금하게 만드는 그런 책들.




생각해보면 국내 장애인 인구가 251만명이라는데 그 많은 장애인들이 내가 사는 사회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 이상할 따름이다. 버스만 타도 장애인용 좌석이 있고 연주회장이나 영화관에 가보면 장애인용 특별 좌석이 있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좌석을 채운 이들을 본 적이 없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이들. 아 쓰면서도 소름돋네. 그걸 어떻게 가상공간인 학당에 녹여낸걸까? 진짜개도랏다;



분명히 존재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이들... 그냥 거리를 걸어도 이정도인데 생활 반경에서 그들을 마주칠 일은 더욱 없고 사회생활 속에서 그들을 마주칠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한다. 차별이 만연하면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 그런 것 아닐까? 존재 하는 단계부터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소수자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이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더 커져서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사회가 장애인을 받아들이는 한걸음을 떼었다는 첫 신호가 될 것이다. 현실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가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눈에서 귀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는 이야기이니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장애에 무지한지는 멀리 볼것도 없다. 우선 나부터도 그렇고, 내 부모님 세대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다.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넷플릭스로 한글자막을 켜고 한국영화를 보았던 적이 있다. 어머니는 한글자막이 거슬린다며 자막을 숨겨달라 하셨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왜 효과음까지 자막에 넣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대답했다. 청각장애인이 영화를 보려면 그런 자막이 있어야 한다고.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누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어떤 소리가 배경음으로 나는지 알려면 자막이 있어야 한다고. 그때 흠칫 했던 어머니의 표정이 기억 난다. 어머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으셨던 거다. 청각장애인들도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그들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선 자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기회도, 필요도 없으셨던 것이다. 



실은 나도 평소에 장애인의 삶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저 내 한몸 건사해 앞가림 하기도 벅차 주변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하지만 이런 내가 청각장애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모 웹툰 덕분이었다.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네이버 웹툰이었던거로 기억한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재밌고 담백하게 풀어낸 덕분에 나는 부담없이 청각장애인의 삶을 엿보았고 웹툰을 보지 않을 때에도 그 삶에 대해 문득 문득 생각해 보곤 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우리가 타인의 시각으로 삶을 조명하고 반추해볼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생생한 길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재미가 모든 가치의 일순위가 되어버린 지금, 장애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첫 발을 뗄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학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닐까싶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바탕을 마련하고 나서야 더 심각하고 무게있는 의견을 내고 그것이 효과있게 전달되지 않을까... 위에 말했던 웹툰도 내용이 재밌었기에 자꾸만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 회차에서 작가님이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만들 때, 자신은 눈물로 모래성을 지었다' 고 했을때, 그제서야 그렇게 웹툰으로 담담하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했었다.




언제나처럼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버렸다...튼.. 소수자의 입장에서 싸우는 싸움들은 대개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다. 소설 속 시현의 어머니 말씀처럼 우선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것.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부터가 싸움의 시작인 것이다. 그 다음에 나아갈 방향은 명확하지 않다는게 이 싸움을 힘들게 하는 원인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은 우리가 고속도로처럼 정해진 길을 가는게 아니라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서 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존재를 인정받고 나서 할 일은 그 자리에 가 보아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답은 없다. 삶은 결론이 아니다. 우리가 다함께 나아가는 과정, 그 지난한 과정속의 일부를 우리는 잠깐 살다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의 바통을 다음 세대에 넘기고 그것을 넘겨받고, 끊이지 않는 과정 속에서 더 나은 그림을 그려가기 위해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닐지..

나지율, 나노아 ... - P123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리의 세계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 과연 결핍의 문제인지 나는 모르겠다. 알래스카에서 평생을 살다가 괌에 가서 처음 휴양을 하는 사람은 어떤가? 반대로 자메이카에서 살다가 처음 눈을 맞아본 사람은? 그들이 느끼는 경이감이 정말 결핍으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 P156

알아. 지금 여기 우리 있다는 걸 왜 증명해야 하지? 답답해. 속 터져. 그런데 때로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단지 그 이유로 해야 하는 게 있어. 존재의 증명? 하지않으면 존재 자체가 지워져. 그러니까 억울해도 해야 해.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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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for the Stars (Paperback) - '별을 위한 시간' 원서
Robert A. Heinlein / Phoenix Pic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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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TUNNING science fiction novel ONLY IF you ripped off the very last page of it


Just kidding. But it's still true that because of the freaking last page, all my feelings just evaporated all of a sudden and there's nothing left. I feel really sorry that if the author just finished the novel with Tom taking a new ticket to the Connie and on his way on board him looking back the Earth for the last time and he just stood there for a while retrospect his times with Pat, niece, grandniece and great-grandniece and finally say something like, "I still got time for the stars" then turning back with infinite indigo-colored sky with glittering stars greeting him then it would be PERFECT. Maybe Heinlein get too tired to think of the last scene so he just wrapped it up like that. 


Tho I still kind of like this novel. I like the atmosphere of it. The novel is based on the Einstein's twin paradox or theory of relativity. Since there's not much place in the earth to live, Long Range Foundation run a project to find other stars which has similar condition with the earth so that humans colonize it and live there. However LRF's another purpose was dig into the theory of relativity. The reason LRF needed telepath twins is that they are the only possible communication means in the torchship which runs at a speed of light. All those years (70-odd years on the earth and 3 years in the torchship called Elsie) research was kept on going and people on the earth finally revealed the concept of irrelevance and they took a leap by reaching the sixty-or so light-years faraway star just in a second. 


I felt kind of sad and empty at the end since everything that people on Elsie had done looks in vain. There were times that their work was a huge help to the earth but time flies and at the end scientific development on the earth just exceed the status of Elsie which making all the people in the ship a poor Rip Van Winkle. I can't never forget the depiction of reserve Captain Urqhardt and Mr.Regato when they met the "current" cutting edge technology of the Earth.


Time just passing by, and there's no way but to adjust to it. We gotta find our values by ourselves and purpose of it but it is a great sorrow to watch the cherished values of the old time becoming obsolete. The thing that the very cherished value of a man could be end up in vain and made him realizing it is just too cruel. Tho we have to move on. As long as we breathe and open our eyes in the morning, we got to move on and on until we reach our very ends.




The trick in easy living is to find out what your unconscious mind really wants and give it to it on the cheapest terms possible, before it sends you through emotional bankruptcy to get its own way. - P194

I couldn‘t sleep that night. A breeze on my face and the sounds of others sleeping around me and the distant noises of live things outside our snooper fences and the lack of perfect darkness all kept me awake. A ship is alive, too, and has its noises, but they are different from those outdoors; a planet is alive in another way. - P264

"Up to now," she told me, "we‘ve concentrated on the relative aspects of the space-time continuum. But what you m-r people do is irrelevant to space-time. Without time there is no space; without space there can be no time. Without space-time there can be no conservation of energy-mass. Heavens, there‘s nothing.

"Don‘t you see Tommie? I‘ve explained it to you, I know I have. Irrelevance. Why, you telepaths were the reason the investigation started; you proved that ‘simultaneity‘ was an admissible concept...and the inevitable logical consequence was that time and space do not exist."

"They don‘t? Then what is that we seem to be having breakfast in?"

"Just a mathematical abstraction, dear. Nothing more" - P356

Uncle Alfred McNeil leaned forward and said in a soft, tragic voice that spoke for all of us, "Just a moment, sir. Are you telling us that what we did...wasn‘t necessary?" - P361

"Uh, Mr. Whipple," Chet Travers asked, "just when will we get home?"

"Oh, didn‘t I tell you? Almost immediately...say soon after lunch." - P363

"I want to say good-by, Captain. It‘s been an honor to serve with you...and a pleasure." The last was not a lie; right then I meant it.

He looked surprised; then his face broke into a grin that I thought would crack it; his face wasn‘t used to it. He grabbed my hand and said, "It‘s been my pleasure, too, Bartlett. I wish you all the luck in the world. Er..What are your plans?"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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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dnight Library : The No.1 Sunday Times bestseller and worldwide phenomenon (Paperback, Main) -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원서
매트 헤이그 / Canongate Books Ltd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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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fire of life goes out


You may anticipate the storyline of this book but you never can imagine what would you feel by reading it. That was talking to me. When I first saw the flyer of this book, I just thought it is just one of those very same self-healing and self-justification book which doesn't worth reading. But just like Mrs Elm had said in the book, "you should live it", which to me it sounds like you should read it and never try to judge it by its cover. 


Well in some part, I just can't help me from crying since I've been through what Nora had been through. I'm not exactly the slider, but I had my hard times too and spent lot of my time floundering in regrets imagining the things that I could have done and could have become. But after those suffocating times, I finally found my answers though still far from perfect but help me feeling better of myself and focus more on life am I living. It helped me think of my life would become in the future while my feet are still holding the ground. 


So this is why I don't regret that much these days (comparing to my past). I finally kind of have succeeded in embracing my own life as it is, and kind of stopped mourning for what I didn't have or didn't become. But still this kind of book somehow touches my heart. Maybe that is because my book of regrets is not burnt out wholly. Though I have my life. I can't imagine other life that is not THIS version of my life. Maybe this state of me is what is called life. May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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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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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가슴속에 저마다의 슬픔을 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일까


 소설 초입부터 느껴지는 저릿하고 아련한 분위기에, 읽는 내내 너무 몰입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칫 깊게 빠져들었다간,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가슴에 묵직하게 달릴, 먹먹하고 애달픈 감정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뭐 결국엔 실패했지만...


 어른이 된다는건, 철이 든다는 건, 가슴 속에 흘리지 못한 눈물로 가득 찬 호수를 하나씩 담게 된다는 것 같다. 입밖에 내지 못하는 서글픔이 늘어간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더 아름답고 찬란히 빛나 보이는 건 아닐까? 삶은 눈물로 디딘 땅을 밟고 서는 것이란 걸, 아직 몰랐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보이는 시절들.


 잔잔한 눈물빛으로 채색된 둘녕과 수안의 기억들. 인생이란 제 몫의 짐을 등에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과 같다. 아무도 그 짐을 대신 들어주지 못하고, 대신 걸어 가주지 못한다. 홀로 고독하고도 묵묵하게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섬세한 감수성에 일찍이 가슴에 깊은 슬픔을 담았던 수안이에게 홀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그를 버겁고 힘들게 했던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은가. 남들은 쉽게 넘어 버리는 듯한 자갈들, 남들은 쉬이 세상사에 적응하고 무뎌지고 그렇게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 작은 자갈 하나가 태산같은 바위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런 바위같은 자갈들을 마주할 때면, 나도 선뜻 넘어가지 못한다. 자갈들이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누르고, 그럴 때면 그냥 그 아래 깔려버리는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다. 


섬세하고 여린 영혼들은 너무나도 쉽게 꺾인다. 우리 모두 유년시절에 품었을 그 여린 꽃들은, 삶이라는 거센 바람 앞에 속절없이도 푹 푹 꺾여버리고 만다. 우리 모두 그렇게 꺾인 꽃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기에, 이제 막 고개를 든 꽃봉오리들을 볼때 그렇게 마음이 저미는 지도 모른다. 너만은 꺾이지 않았으면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꺾일 그 꽃대가, 이미 꺾여버린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서글퍼서.


 삶은 그런 것 같다. 가슴 속 깊이 웅덩이진 호수에 이따끔씩 햇살이 비치면,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 보며 어렴풋이 미소짓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소학교 중퇴 학력인 외할머니는 문득 자존심이 상했는지 가사 교과서를 차곡차곡 넘기며 가는눈을 뜨고 삽화를 훑어보았다.
"이것 봐라. 전부 옷 만들고 쌀 안치고 바느질하는 그림이구먼. 얄궂네. 양념도 일일이 요만큼 넣어라 조만큼 넣어라 하는구나. 그냥 맛을 보고 넣으면 되는 게지." - P178

그 속엔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당신의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손바닥 보듯 훤히 가사 과목을 안다는 당당함. 수안과 내가 버튼 호울 스티치니 바이어스 박음질이니 개더스커트 재단을 숙제로 해갈 때면 옆에서 토를 달곤 했다.
"아이고, 뭘 저런 걸 갖고 시험을 치르다니."
수안은 바느질이 서툴러서 번번이 내가 수안의 숙제까지 해주었고, 외할머니도 못 이기는 척 마주 앉아 거들곤 했다. 때로는 밤늦게 이부자리에서 돋보기를 쓰고 가사 책을 넘겨보기도 했다. 토를 다는 재미였다. 당신에겐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가 그것뿐이었으니까. 외할머니는 가사 교과서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 P179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그건 팔월이었는데.
아니에요. 십일월이었어요. 당신도 알면서.
어느새 곁에 온 향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저리 가! 달력으로 돌아가.
아가씨는 그렁한 눈길로 원망스레 보더니 낙엽 갈퀴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속삭였다.

팔월이었지, 엄마?
- P257

왜 돌려준 거야. 보고 싶었는데.
... 넌 그 소년을 봤던 거야?
아니야. 난 너를 봤어. 유리알 속엔 네가 있었는데.
그리고 수안은 숲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P423

수안은 방 한가운데 웅크리듯 잠들어 있었다. 나는 겉으로 파고 들어가 나란히 누워 그 아이를 안았다. 수안이 놀란 듯이 잠에서 깨더니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팔을 돌려 나를 안고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뭐야...왜 온 거야."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나는 들리지 않게 귀엣말을 했다. 고개 숙인 수안의 머리가 어둠 속에서도 선연해 마음이 아렸다.

"머리카락은 왜 이런 건데."
"나도 몰라."
"아는 게 뭐야 그럼. 도대체 왜 이래, 응?"
"그냥 다 무섭고 불안해. 밤도 무섭고. 낮도 무서워. 내가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워."

수안은 고통스럽게 대답했고 나는 목이 메었다. - P424

이 툇마루에서 외할머니는 주름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내게 말했다.

수안이를 좀 찾아보려무나. - P470

꿈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슬픈 꿈이었다.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 그 아이와 타박타박 걷던 시절. 등에 멘 책가방에서 필통 속의 연필들과 빈 도시락 수저가 달그락거리던 날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모암마을 옛집 마당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저녁 햇살이 툇마루를 비추면 마루 기둥에 걸린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그림과 플라스틱 칫솔통도 낯익게 떠오른다. 하얀 럭키치약. 칫솔모가 벌어진 온 식구의 칫솔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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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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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



1. 리알토로부터

 양자물리학의 이론을 하나도 모르는 나로서는 정말 읽는 내내 내가 한글을 읽는 것이 맞는지 읽긴 읽는데 도저히 뭘 읽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다. 중후반부 쯤 되어서야 아 이것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을 소설에 녹여낸 거구나 짐작만 대충 했는데 여전히 나에게는 소설 전체 내용이 아리송할 뿐이다. 아마 10퍼센트 ...정도나 이해했으려나 모르겠네.




2. 화재감시원

미래의 옥스퍼드 역사학과 대학원생이 과목 실습을 위해 과거로 돌아가 세인트폴 성당의 화재감시원이 되면서 겪은 일을 그린 이야기.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는 감히 가늠하지 못하는 억겁의 애틋함과 그리운 감정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언제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3. 클리어리가족이 보낸 편지

아마 세계 3차대전 이후의 모습을 그린 것일듯. 짧은 장면만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가려진 많은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말이 와닿는군.  



4. 나일강의 죽음

네번째로 읽은 단편. 드라마 보기 전에 가볍게 보려고 폈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아니 재미있다는 표현일 여기에 써도 적절한지 모르겠다만.. 아주 재미있다. 아마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라면 더욱 빠져들어 읽게 될 것이다.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점점 코니 윌리스에 스며드는 기분이다.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된다. 분명 엊그제 첫 번째 단편 '리알토에서'를 막 읽었을 때만 해도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도 안되고 짜증나고 내가 읽는게 한글인지 외계어인지 혼미한 상태였었는데 말이지. 나일강의 죽음을 읽고, 이편에 대한 작가의 후기를 읽다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 좋아서! 이런 류의 소설 너무 좋아! 최고야! 짜릿해! 재미있는 점은 읽으면서 계속 영화 디아더스가 생각났는데 작가가 후기에 디아더스를 언급한 것이다. 정말 너무 내가 좋아하는 지점을 딱 짚어줘서 비명을 지를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저자 후기를 아래 덧붙인다.



5. 내부소행 

'미국인들의 지적능력을 과소평가하여 망한 사람은 없다'

 -H.L. 멩켄


시작부터 강렬했던 단편. 가장 마지막에 읽은 단편이었는데 이쯤 되었을 땐 완전히 코며들은 상태여서 작가가 툭 던져놓은 농담에도 혼자 웃겨서 몇 번을 다시 읽어봤는지 모른다. 작가가 파놓은 길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어느 순간 주인공이 '어..?' 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제목인 '내부소행' 이라는 네 글자가 떠오르면서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계속 긴가민가 하면서 주인공을 따라갔다. 재밌다. 어떻게 끝맺을까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포장을 한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무엇이 무서운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이야기, 괴물이나 내장 기관이나 날카로운 물건 대신 멋지고 상냥한 작은 마을과 흰 드레스와 털실 뭉치가 나오는 이야기, 혹은 전시에 항해등도 없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기이하게 인적 없는 원양 정기선 이야기나, 호수 반대편에 미동도 없이 서서 당신을 쳐다보는 여인의 이야기와 같은 것을 나는 사랑한다. - P123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불확실한 어떤 것이다. 흘낏 보이나 확실히 포착할 수 없는 움직임, 잠에서 깼을 때 명확히 기억해 낼 수 없는 악몽,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듯한 문소리, 그중에서도 우리가 상상한 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 우리를 미치게 한다. 콕 집어 말하지 못하고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이름 없고 모호한 일들. - P125

하지만 그런건 전혀 무섭지 않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기차역 벽시계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시곗바늘이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혹은 당신이 그 사람들을 배의 휴게실에서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폭탄으로 죽기 바로 직전에.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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