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아이들
최의택 지음 / 아작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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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살아가는 우리들



작가가 작가이기때문에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소수자의 위치에 서 보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소설 속에 녹아있어 안일하게 살아온 내가 깨닫지 못했던, 보지 않던 것들을 툭툭 건들인다. 



작가의 인터뷰를 먼저 보았기에 그냥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가상현실 속에서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이려나?' 하고 안일한 생각으로 책을 집어들었는데 중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 '유령'이 보이는 이유를 알았을 때의 느낌이란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달까.


소설 내내 가히 현재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4부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불현듯 떠오르는 한 구절.



'나지율, 나노아...'



정작 이 부분을 읽을 땐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었는데, 문득 그들이 같은 성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희열감이란! 그리고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되고 배제된 경험이 있는 작가이기에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보고 소설 속에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책들이 바로 소설을 읽는 이유이자 소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 절여지고 잠식된 뇌를 한번씩 툭 툭 건들이는 책들 말이다. 평소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보지 못했기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독자로 하여금 뜨금하게 만드는 그런 책들.




생각해보면 국내 장애인 인구가 251만명이라는데 그 많은 장애인들이 내가 사는 사회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정말 이상할 따름이다. 버스만 타도 장애인용 좌석이 있고 연주회장이나 영화관에 가보면 장애인용 특별 좌석이 있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좌석을 채운 이들을 본 적이 없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이들. 아 쓰면서도 소름돋네. 그걸 어떻게 가상공간인 학당에 녹여낸걸까? 진짜개도랏다;



분명히 존재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이들... 그냥 거리를 걸어도 이정도인데 생활 반경에서 그들을 마주칠 일은 더욱 없고 사회생활 속에서 그들을 마주칠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한다. 차별이 만연하면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 그런 것 아닐까? 존재 하는 단계부터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소수자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이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더 커져서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사회가 장애인을 받아들이는 한걸음을 떼었다는 첫 신호가 될 것이다. 현실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가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눈에서 귀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아예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는 이야기이니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장애에 무지한지는 멀리 볼것도 없다. 우선 나부터도 그렇고, 내 부모님 세대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다.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넷플릭스로 한글자막을 켜고 한국영화를 보았던 적이 있다. 어머니는 한글자막이 거슬린다며 자막을 숨겨달라 하셨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왜 효과음까지 자막에 넣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대답했다. 청각장애인이 영화를 보려면 그런 자막이 있어야 한다고.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누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어떤 소리가 배경음으로 나는지 알려면 자막이 있어야 한다고. 그때 흠칫 했던 어머니의 표정이 기억 난다. 어머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으셨던 거다. 청각장애인들도 영화를 본다는 사실을, 그들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선 자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기회도, 필요도 없으셨던 것이다. 



실은 나도 평소에 장애인의 삶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저 내 한몸 건사해 앞가림 하기도 벅차 주변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하지만 이런 내가 청각장애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모 웹툰 덕분이었다.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네이버 웹툰이었던거로 기억한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재밌고 담백하게 풀어낸 덕분에 나는 부담없이 청각장애인의 삶을 엿보았고 웹툰을 보지 않을 때에도 그 삶에 대해 문득 문득 생각해 보곤 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우리가 타인의 시각으로 삶을 조명하고 반추해볼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생생한 길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재미가 모든 가치의 일순위가 되어버린 지금, 장애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첫 발을 뗄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학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닐까싶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바탕을 마련하고 나서야 더 심각하고 무게있는 의견을 내고 그것이 효과있게 전달되지 않을까... 위에 말했던 웹툰도 내용이 재밌었기에 자꾸만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 회차에서 작가님이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만들 때, 자신은 눈물로 모래성을 지었다' 고 했을때, 그제서야 그렇게 웹툰으로 담담하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했었다.




언제나처럼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버렸다...튼.. 소수자의 입장에서 싸우는 싸움들은 대개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 같다. 소설 속 시현의 어머니 말씀처럼 우선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것.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부터가 싸움의 시작인 것이다. 그 다음에 나아갈 방향은 명확하지 않다는게 이 싸움을 힘들게 하는 원인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은 우리가 고속도로처럼 정해진 길을 가는게 아니라 가지 않은 길을 만들어서 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존재를 인정받고 나서 할 일은 그 자리에 가 보아야 비로소 논의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답은 없다. 삶은 결론이 아니다. 우리가 다함께 나아가는 과정, 그 지난한 과정속의 일부를 우리는 잠깐 살다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의 바통을 다음 세대에 넘기고 그것을 넘겨받고, 끊이지 않는 과정 속에서 더 나은 그림을 그려가기 위해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닐지..

나지율, 나노아 ... - P123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리의 세계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 과연 결핍의 문제인지 나는 모르겠다. 알래스카에서 평생을 살다가 괌에 가서 처음 휴양을 하는 사람은 어떤가? 반대로 자메이카에서 살다가 처음 눈을 맞아본 사람은? 그들이 느끼는 경이감이 정말 결핍으로부터 기인한 것인가? - P156

알아. 지금 여기 우리 있다는 걸 왜 증명해야 하지? 답답해. 속 터져. 그런데 때로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단지 그 이유로 해야 하는 게 있어. 존재의 증명? 하지않으면 존재 자체가 지워져. 그러니까 억울해도 해야 해.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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