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을 입으렴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이란 가슴속에 저마다의 슬픔을 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일까


 소설 초입부터 느껴지는 저릿하고 아련한 분위기에, 읽는 내내 너무 몰입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칫 깊게 빠져들었다간,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가슴에 묵직하게 달릴, 먹먹하고 애달픈 감정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뭐 결국엔 실패했지만...


 어른이 된다는건, 철이 든다는 건, 가슴 속에 흘리지 못한 눈물로 가득 찬 호수를 하나씩 담게 된다는 것 같다. 입밖에 내지 못하는 서글픔이 늘어간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추억들이 더 아름답고 찬란히 빛나 보이는 건 아닐까? 삶은 눈물로 디딘 땅을 밟고 서는 것이란 걸, 아직 몰랐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보이는 시절들.


 잔잔한 눈물빛으로 채색된 둘녕과 수안의 기억들. 인생이란 제 몫의 짐을 등에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과 같다. 아무도 그 짐을 대신 들어주지 못하고, 대신 걸어 가주지 못한다. 홀로 고독하고도 묵묵하게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섬세한 감수성에 일찍이 가슴에 깊은 슬픔을 담았던 수안이에게 홀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그를 버겁고 힘들게 했던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은가. 남들은 쉽게 넘어 버리는 듯한 자갈들, 남들은 쉬이 세상사에 적응하고 무뎌지고 그렇게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 작은 자갈 하나가 태산같은 바위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런 바위같은 자갈들을 마주할 때면, 나도 선뜻 넘어가지 못한다. 자갈들이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짓누르고, 그럴 때면 그냥 그 아래 깔려버리는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다. 


섬세하고 여린 영혼들은 너무나도 쉽게 꺾인다. 우리 모두 유년시절에 품었을 그 여린 꽃들은, 삶이라는 거센 바람 앞에 속절없이도 푹 푹 꺾여버리고 만다. 우리 모두 그렇게 꺾인 꽃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기에, 이제 막 고개를 든 꽃봉오리들을 볼때 그렇게 마음이 저미는 지도 모른다. 너만은 꺾이지 않았으면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꺾일 그 꽃대가, 이미 꺾여버린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서글퍼서.


 삶은 그런 것 같다. 가슴 속 깊이 웅덩이진 호수에 이따끔씩 햇살이 비치면,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 보며 어렴풋이 미소짓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소학교 중퇴 학력인 외할머니는 문득 자존심이 상했는지 가사 교과서를 차곡차곡 넘기며 가는눈을 뜨고 삽화를 훑어보았다.
"이것 봐라. 전부 옷 만들고 쌀 안치고 바느질하는 그림이구먼. 얄궂네. 양념도 일일이 요만큼 넣어라 조만큼 넣어라 하는구나. 그냥 맛을 보고 넣으면 되는 게지." - P178

그 속엔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당신의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손바닥 보듯 훤히 가사 과목을 안다는 당당함. 수안과 내가 버튼 호울 스티치니 바이어스 박음질이니 개더스커트 재단을 숙제로 해갈 때면 옆에서 토를 달곤 했다.
"아이고, 뭘 저런 걸 갖고 시험을 치르다니."
수안은 바느질이 서툴러서 번번이 내가 수안의 숙제까지 해주었고, 외할머니도 못 이기는 척 마주 앉아 거들곤 했다. 때로는 밤늦게 이부자리에서 돋보기를 쓰고 가사 책을 넘겨보기도 했다. 토를 다는 재미였다. 당신에겐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교과서가 그것뿐이었으니까. 외할머니는 가사 교과서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 P179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그건 팔월이었는데.
아니에요. 십일월이었어요. 당신도 알면서.
어느새 곁에 온 향이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저리 가! 달력으로 돌아가.
아가씨는 그렁한 눈길로 원망스레 보더니 낙엽 갈퀴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속삭였다.

팔월이었지, 엄마?
- P257

왜 돌려준 거야. 보고 싶었는데.
... 넌 그 소년을 봤던 거야?
아니야. 난 너를 봤어. 유리알 속엔 네가 있었는데.
그리고 수안은 숲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P423

수안은 방 한가운데 웅크리듯 잠들어 있었다. 나는 겉으로 파고 들어가 나란히 누워 그 아이를 안았다. 수안이 놀란 듯이 잠에서 깨더니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팔을 돌려 나를 안고 내 품에 고개를 묻었다.

"뭐야...왜 온 거야."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나는 들리지 않게 귀엣말을 했다. 고개 숙인 수안의 머리가 어둠 속에서도 선연해 마음이 아렸다.

"머리카락은 왜 이런 건데."
"나도 몰라."
"아는 게 뭐야 그럼. 도대체 왜 이래, 응?"
"그냥 다 무섭고 불안해. 밤도 무섭고. 낮도 무서워. 내가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워."

수안은 고통스럽게 대답했고 나는 목이 메었다. - P424

이 툇마루에서 외할머니는 주름진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내게 말했다.

수안이를 좀 찾아보려무나. - P470

꿈속에서 조용히 울었다. 슬픈 꿈이었다.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 그 아이와 타박타박 걷던 시절. 등에 멘 책가방에서 필통 속의 연필들과 빈 도시락 수저가 달그락거리던 날들의 이야기였다. 나는 모암마을 옛집 마당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저녁 햇살이 툇마루를 비추면 마루 기둥에 걸린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그림과 플라스틱 칫솔통도 낯익게 떠오른다. 하얀 럭키치약. 칫솔모가 벌어진 온 식구의 칫솔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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