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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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이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심을 가르쳐주는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 움켜잡으면 소멸되나 내맡기면 풍성해지는 영적 비밀을 가르쳐준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몽골로 간 저자의 삶과 신앙을 다루고 있다. 특히 제3부 '광야일기'는 당시의 기록을 그대로 담아 그때의 감정뿐 아니라, 신앙고백을 생생하게 전한다.

- 다음 책 소개 중에서....
 

하버드大 박사 학위도 세계 명문대 박사임에도 몽골로 날아간 것을 그 분 탓이라 말하는 이의 고백...평탄치만 않었던 저자의 유학생활과 학위 취득, 부인의 공부 그리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몽골로 자신을 이끌어간 그 분에 대한 감사의 글이기도 하다.

저자는 중국역사를 공부하다가 유학길에 오른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유학은 어찌 보면 거의 충동적으로 이루어졌고 유학 중에 갑자기 중동역사와 몽골제국역사로 전공이 바뀐 것도 극적인 변화였다고 한다. 

유학 중에 늘 돈 문제로 고민했는데 기도 하고 절실히 원하면 어느 선에 후원자가 나타나고 임시였지만 늘 살집이 마련되었고 필요한 때 큰 차필요할 때는 사고나가 보험금에 돈을 보태어 차를 마련했다. 노트북이 고장나자 새것으로 교환이 되었다. 

 

감사하는 마음

저자는 이 모든 것이 주님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저자가 감사하고 신기해하는 모든 일이 그저 우연이거나 그저 단순한 행운일 수 있다. 또 원래 그런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노트북이 고장나서 수리해 달라고 했더니 단종된 제품이라며 신제품으로 교환해 준다던지 추돌 사고로 수리가 불가능한 차에 대해 보험사가 보상금을 후하게 쳐주어 큰 차를 사게된 것 같은 경우에는 미국의 보상제도가 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집을 옮기려 할 때 아는 분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하여 원래 살던 집을 비웠더니 들어갈 집이 비지 않아 길가에 내 앉게 생겼을 때 다른 지인의 집에 임시로 살게 되고 이 후 여러차례 다른 집을 전전한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것에서 감사를 말한다.

노트북을 구매할 때 별도의 AS옵션을 구입했기 때문에 신제품으로 교환 받을 기회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보다는 보다 높은 분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큰차가 필요했는데 마침 추돌 사고로 차를 못쓰게 되어 새차를 구입하는데 필요한 종자돈이 마련된 것도 사고로 차가 못쓰게된 것에 대한 고민보다는 큰 차를 구입하여 좋은 일에 쓰게 하신 것에 감사합니다.

유학, 몽골선교, 아내의 학위 취득 등 꿈꾸지도 못했던 극적인 일들이 일어난 것은 기회와 선택의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에 온전히 맏긴 결과라고 말한다.



나를 낮추고 다시 채워야 하는 이유

세상의 일이 인간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 같은 증거들이 나타난다.

세상 일에서도 하느님의 의지가 작용하고 인간의 의지 만으로 안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 하자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을 말하는 근대 사상의 영향을 받은 현대의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고 해결할 문제를 왜 굳이 신이 인간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가? 신은 인간의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전쟁, 기아 등과 사소한 부분의 불합리들이 어찌 존재할 수 있는가?

필자도 어린시절부터 종교를 가지고 살았지만 이런 생각들을 해왔다.
그런데 이제 점점 느끼고 있다.
왜 인간의 의지만으로 안되는 것이며 고난과 시험이 왜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외로움, 공허, 허탈등을 생각해 보자!
인간, 정확히는 자신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삶을 생각해 보자. 스스로의 능력과 이성을 믿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그럼 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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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이해찬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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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前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지 1년이 넘었다. 이 시점에서 '차명계좌가 있다 없다.'로
정계가 다시 시끄럽고 경찰로 대변되는 보수와 노무현 재단으로 대표되는 진보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논란과 진보와 보수의 충돌은 국민의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의 정부 이전 진보 세력은 권력을 잡은 역사가 없다. 이 책에서 저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정조 대왕시절을 진보 세력이 정권을 잡았던 시절로 보고 있어 우리 역사에서 정조대왕 이후 약 190년 만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잃어버린 10년?

보수세력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집권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해서 마치 현대사의 암흑기 처럼 이야기 한다.
뭐~ 순전히 자기들 마음대로 안되던 시절이라는 이야기인데 실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런 이유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잃어버린 10년 동안 보수세력은 여전히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정부에 대한 비판의 자유까지 열어주었다.
이전의 정부에서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던 검찰까지도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보수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더욱 궁금해진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정확히 이야기 하지만 자유주의이다. 자기의 의지대로 살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배나 평등의 문제는 민주주의 명제라기 보다 사회주의의 명제로 본다. 그들이 가끔 보수의 가치를 법안에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초법적인 것으로 그들은 법이 아닌 그들의 자유의지와 자유경쟁을 중시한다.
따라서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닌 권력자 개인의 의지에 의해 정책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자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할 수 있다.

반면 참여정부는 법을 정하고 그 법안에서 대통령도 속하는 법치주의이다. 대통령은 자위에 의해 행동하지 못한다.
누가 만든 법이던 법의 범위안에서만 권력을 쓸 수 있고 법이 제한이 된다면 법을 바뀌어야 한다.


 
권력자가 스스로 법안에 자신을 가두는 상황에서 그 이하의 집단이 초법적인 행위를 할 수 없으니
잃어버린 세월로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은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도 가능해야 하며
권력이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나 민주 발전에 가장 위험한 요소라는 생각에서 국정원, 기무사,
검찰의 자유권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검찰의 자율권을 줌으로써 스스로의 압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시각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결정은 가장 보수적인 조직인 검찰에게 칼을 줘어진 무모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은 일관되었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그것이 민주라고....

검찰 뿐 아니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도 물만났다고 높의 수위의 비판을 뿜어냈고
매일 매일 맞고 터지고 깨지는 대통령의 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대통령의 이미지(독재자의 강한...)와는
정반대이고 스스로 뽑은 대통령을 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 지지세력에게까지 변심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당으로 부터
방출당한 그의 행보는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진보와 민주주의 진보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연구해왔던 것이다. 임기 중의 그의 다소 생경한(우리의 수준에서는...) 행동이나
언행은 그 맥락에서 나온 결과물 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고향으로 들어간 후 그 해 가을까지는 그는 농부였다.
일단 살집을 마련하고 살 궁리를 했고 가을 추수 이후 그는 다시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공동집필한 저자들은 소위 노빠 라고 불리는 노무현의 사람들이다.
가까이서 그의 정신을 보고 듣고 동감한 분들이다. 그들이 노무현이 생전에 유지처럼 이야기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시민이다.' 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마련한 노무현 시민학교의 발표 내용이다.

노무현의 생각을 측근의 입장에서 설명한 글들이지만 읽어나가면서 민주주의의 진보가 무엇이며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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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두 얼굴 : 외부 조종자 - 상황 속에 숨겨진 인간의 진짜 모습
EBS <인간의 두 얼굴>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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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흑인폭동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LA 다운타운이 폭도로 변환 흑인들에게 의해 전쟁터가 되고 폭력 희생자들 대부분이 유색인종이었다. 특히나 당시 LA다운타운(구 도심)의 얼마 남지 않은 상권을 장악하던 한인들의 피해가 컸다.

이 폭동이 일어나기 얼마 전 LA의 한 수퍼마킷에서는 가게 주인의 착각에 의해 한 흑인 소녀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흑인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다소간의 문제가 있지만 흑인 사회에서 한인들에 대한 악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한국계 가게 주인이 흑인소녀가 오렌지주스를 가방에 숨기고 계산대 앞에서 자신을 때리려 했다면 총을 쏘았는데 CCTV 분석 결과 가방에 넣었다던 오렌지주스는 계산대에 올려져 있었고 소녀의 오른손에는 돈이 줘어져 있었다.
한국계 주인의 착오로 죽은 흑인소녀는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평을 받고 있었고 전혀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가게 주인은 카운터위에 계산을 위해 올려둔 오렌지 주스를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돈을 주기 위해 움직인 손이 자신을 때리려 했다고 생각했을까?

그 동안 수차례 흑인 강도에게 피해를 입은 가게 주인이 가게에 들어온 흑인이 다소 의심스런 행동을 한다고 믿으면서 이후의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한 대로 본 것이다. 즉 생각한 대로 보인다는 옛 격언의 실제 사례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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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의 판단이 옳고 정확하고 객관적이라 생각한다.
그거야~ 잘아는 사실이쟎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람도 무의식 중에 이런 착각에 빠지고 그것으로 인한 착오를 일으키고 심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판단 오류를 겪는다. 

 EBS는 독립체제로 바꾼 후 매우 독보적인 채널로 변모했다.
교육방송이라는 특수성에서 다소 벗어나 넓은 계층에 광의(廣意)의 교육 인프라를 구축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기존의 교육 프로그램들을 자사의 타 채널에 넘겨준 후 교육관련 보도, 다큐멘터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애청자의 하나인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 중이다. 

이중 지식채널 시리즈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편집하여 백과 사전의 한 명제를 보는 듯하게 만들어 낸 걸작중에 걸작이다. 뮤직비디오 한 편을 볼만한 시간만 집중하면 어떤 주제에 대해 편집증(?)적이 지식과 심지어 지혜까지도 전달한다.
또 하나 좀 더 진중하게 볼 수 있는 명품 다큐멘터리인, 다큐 프라임. 이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가 보여지는 상황을 연출자의 시각을 담아 찍어낸다기 보다 과학실험이나 연구 논문을 영상으로 옮겨 놓으듯 지나칠 정도로 학구적인 프로그램이다.

 '인간의 두 얼굴'이라는 다소 불편한 제목의 이 책은 바로 EBS 다큐 프라임을 통해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다큐멘터리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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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실행의 결과로 인간이 실 생활에서 얼마나 엄청난 착각과 아집속에 사는지를 알 수 있다.
눈을 2-3초 감을 정도 시간 동안의 방심 중에 바로 앞에서 대화 중인 사람이 바뀌어도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고 조금만 합성이 되어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사진의 자신을 이상형으로 착각한다. 원숭이가 아닌 인간임에도 조삼모사에 울고 웃고 대책없는 행운과 운에 기대며 근거없는 확신을 가진다. 이런 모든 오류와 착각 중에서 가장 큰 착각은 바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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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글의 머리에서 착각이 살인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종 차별적인 편견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동남아시아인은 가난하여 우리나라에 돈 벌러왔다. 백인은 우리보다 잘났다. 등등의 착각은 아주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어떤 몽고 출신 결혼이주 여성이 시의원이 되었다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보면 문득 생각난 것은 와~ 대단하다였다. 물론 대단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몽고 가족들의 사회적 지위를 볼 때 그녀가 시의원이 된 것인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그녀가 몽골인이고 우리나라에 시집을 왔기 때문이다.

늘 일이 맘대로 안될 때 이런 말을 한다. "그렇지 뭐 이럴줄 알았어~ 내가 그렇지 뭐~" 자기 비하의 이 말. 이것 역시 착각에 기인하는데 자기 스스로를 실패라는 틀안에 가두면서 스스로 편견을 만들고 미래를 가두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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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편견에 쌓여 있고 착각을 한다. 기분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곧게 살려고 해도 우리는 태생적으로 오류 투성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이런 착각이 가져오는 좋은 오해가 있다. 긍정적인 착각이라고 불리우는 것인데 '잘 할 수 있다'. ' 잘 될꺼야' 등등의 긍정적인 사고 방식은 긍정적인 착각을 가져오고 늘 이런 긍정적인 착각에 빠진 사람은 부정적인 착각에 빠진 사람에 비해 실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실제로 성공한다고 한다. 이 것은 상황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문제 발생시 처리 능력이 떨어지고 자포자기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긍정적인 사고로 인해 상황 처리에서 보다 큰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제작팀은 이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하며 마무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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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짐 - 내 삶이 행복해지는 항복훈련
더글러스 웹스터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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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음에 좀 무겁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라서 내 고민이 도움이 되지 않지만 책임자라는 상황이 그렇게 만든다. 아내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주었는데... 나는 같이 온 낮추이라는 책을 열심히 읽고있다. 낮추는 것과 내려 놓은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이지는 않지만 내가 낮추임을 먼저 잡은데에 의미를 두고 싶어진다.
 

 

이 책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자들을 위한 책이고 이야기의 소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을 가지고도 인간을 어찌 대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위에서 굴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어서  봉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성이고 완전하며 죄없는  완벽한 존재(그러면서도 또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이기에 현대의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괘변 같은)이면서 먼저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천했던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보면서 기독교 신자들이 어찌 살아야 하는 가를 일깨운다.
 

필자는 개신교에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60,70년대 어린시절 많은 아이들이 동네 교회를 한 두 번은 들락 거렸다.
부활절과 성탄절에 주는 선물과 과자들... 여름성경학교에서의 놀이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 교회는 우리들에게는 낮선 곳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고등교육을 받고 자신의 생각이 생성되고 나면 많은 비 기독교인들이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같은 기독교인데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보는 시선은 또 다르다.
천주교는 오랜 동안의 기간 동안 현지에 맞는 방식으로 변했고 보편적인 인간 사회의 잣대를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고 개신교는 그에 비해 매무 보수적인 교리를 적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매우 강한 유교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전반의 보편적인 정서라는 것이 중요하고 그 중에 도덕률이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의 도리인데 개신교의 생각에서는 도덕 률에 앞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여호와를 믿는 것이기 떄문이다. 비 기독교인이 보기에는 예수만 믿으면 도덕적이지 않아도 천국 간다는 논리는 비약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은 각종 미디어등에서 개그 소재나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드는데 자주 이용이 된다. 예를 들면 투캅스에서  안성기는 형사이지만 온갖 자잔한 비리의 온상이다. 그런데 안성기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울면서  그 주에 행한 악행을 씻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주를 준비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 것은 비 기독교인들이 바로 보는 시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적인 체험에서 개신교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열정적어서 보는 사람에 따라 오해를 하기도 한다.
순간 느껴지는 종교적인 체험과 그 표출 모습은 매우 사적인 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은 불편하기 그지 없고 심하게는 '광신도' 라는  단어까지도 등장시킬 만하다. 보편적이지 않은 모습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라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과잉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개신교에 대한 비 기독교 신자들의 오해가 심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 한 듯이 자신의 의지를 떠난 어떤 체험이 아닌 의도적인 행동이 종교적인 체험의 순간에 일어난 다거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보다 예배 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신자가 있다면 이것은 어찌 보아야 할까? 교회 밖에서 어찌 보던 이런 신자가 실제로 있다면 이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소위 통성기도라고 하는 기도의 내용을 입밖으로 크게 외치는 기도의 형태나 방언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이 알아드리기 힘든 외침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개신교의 예배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통성기도는 자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장로교파 중 일부 엄숙한 분위기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개신교에서 하는 기도 형태이다. 그런데 필자가 지적했듯이 이렇게 들어내는 행동이 혹시라도 남에 보이기 위해 과장되거나 의도된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들어내기 위하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 이런 행동은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지체와 교제하며 건강한 생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화려한 예배, 멋지고 큰 교회당, 은혜롭게 보이는 기도 모임, 설교가 멋진 목사에 집중하는 오류 범하는 것도 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교회에 오는 행위, 능력있는 목사님의 멋진 설교, 유명한 교회의 교인, 교회에서 맏은 직분에 집중하여 정작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여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동떨어진 상황에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은 마치 환타지 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이고 그 것을 습관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 예로 희생양 제사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희생양 제물은 그냥 글 자체로 받아들이기 떄문에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희생재물이 된 것으로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현대인들이 희생재물이 어떤 의미인지 잘알고 있다면 예수의 희생제사를 생각하면 끔찍하다거나 서러움이 복바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대목을 그냥 지식과 습관적으로 받아들인다. 진정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면 예수의 생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이 당연 할지도 모른다.
내 동생이 내 형이 33살의 젋은 나이에 진리를 전하려 다니다가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반나절을 고통속에 말라 죽었다고 생가하면 당연히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치밀 것이다. 

 

바로 앞에서 필자는  개신교의 통성기도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전했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것은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눈물로 기도를 한다. 그러니 그 진정성이 없다는 점을 굳이 이야기 하자면 일부에 국한 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성이라 부분이 누군에 대한 것인가를 이야기라면 과연... 예수의 희생양 되심을 생각하면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내 자신도 내 고통을 이야기 할 때는 눈물을 아니어도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

앞서 이야기 했 듯이  근대 지성의 시대 이후 인류는 모든 것으로 정반합으로 논리를 맞추어서 판단하는 습관이 들었다. 소위 합리주의니 이성주의니 하는 사상들에 의하면 내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논의 대상이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이 말은 참 멋진 말이지만 내 존재 조차도  검증이 필요한 시기에 사는 인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느껴진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증거를 찾아 증명해야 내가 존재한다면  존재 자체가 불행할 수 있다. 
내 존재 사실도 부정으로 부터 애써 증명하게 된다면 내가 다른 타인의 존재의 어찌 증명할 것인가?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내가 남의 생각을 대신 하지 못한다면 남의 존재는 어찌 증명할 것인가? 이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현대의 인간들은 합리라는 제약안에서 사고 하게 됨으로 써 스스로 또 하나의 고통에 갖힌 것이라 볼 수 있다.

 

증명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데 인간이 가진 증명의 방법이 완전하다고 보장 할 수 없다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발생한다.
이런 모습들이 현대인들 사이 만연되어 있다.
저자는 신학교에서 겪어던 고통스런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신을 가르치던 신학교수들이 예술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확시이 없었던 것 같은데...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이 믿음이 아닌 학문으로써... 일로써 신학을 가르치는 상황에서 필자는 절망 스러웠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원죄는 선악과 따먹음으로 써 시작하고 중동과 서아시아의 설화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이 두가지 이야기는 공통으로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즉 지나친 호기심으로 금지된 열매를 먹어서 자신이 알몸임을 알고 어둠으로 피하고 열어보지 말라고 한 상자를 열어 온갖 고통을 인간세상에 풀어버린 것이다.여기서 지나친 호기심이 일어난 이유를 찾다보면 자만심과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먹어보고 열어보면 자신이 자신의 배경인 세상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이 호기심을 부추긴 것이라는 비약(?) 이 가능하다.

 

성경에 보며 야휘가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괴롭히고 살려내고 괴롭히고 살려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받을 때와 구원 받을 때의 상황은 단 하나 그들이 야휘안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가장 큰 죄는 바알로 대표되는 이방신과 우상숭배이다. 그들이 야휘에게 순종할 때는 고통을 내리지 않았고 고통중에라도 건져내었다. 

이런 일련의 반복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신에 의지하지 않고 자만하고 방종하여 스스로의 신을 만들어 낸일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의 신에게 순종하여 그 안에 머물고 의지하지 않음을 경고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보통의 경우라면 자신에게 닥힌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또 공동의 문제나 타인의 문제도 처리하려고 하고 처리하기도 한다. 특히나 물질 세계의 일들에 대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로 문제 해결이 되는 것 처럼 보인다. 또 해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비물질계를 함께 가지고 있다. 즉 마음의 문제도 물질계에서 처럼 인간의 의지로 조절이 가능할까?
일면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오랜시간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심이 가는 것은 필자의 잘못된 생각일까?
인간의 지성이 관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요? 물질계에서는 그 유효성의 기한 표기가 아직 안보일 수도 있다.(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차치하고라고 비물질계에서는?

  

예수는 길지 않은 공생활 중에 늘 한 부류를 공격했다. 늘 낮은 자세로 행동하여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세리, 죄 때문에 병에 걸렸다 하여 멀리하던 병자들과 가까이 하고 무식쟁이들을 제자로 삼았고 그 제자들에게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행동인 발 씻김까지 했던 그가 악마라고 까지 욕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리세인들과 사두게인들 이었다. 특히 바리세인들을 경멸했는데 그 이유는 한가지 였다. 잘난 척하며 사람들에게 인사 받기 좋아하며 종교적으로 경건한 척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목회를 하기 때문에 죄없이 깨끗한 분이 그렇게 통열히 비난을 한 것이다. 

 

혼자 잘나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면 누군가의 그늘에 기대는 것도 필요하고 누구와의 관계에서 봉사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지혜로 낮추임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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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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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초인가? 유튜브에서 이미 랜디포시 교수가 출연한 '오프라 원프리' 쇼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몇 가지 이야기가 기억이 나는데 늘 걱정을 하며 사는 '이오르'와 늘 방방 떠다니는 '티거'에 대한 이야기, 박사학위를 받은 아들을 '네 아들이랍니다. 방금 닥터가 됐지만 병을 고치지는 못한답니다.' 라고 소개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이 남는다.
 


최근 몇 주 동안 야근은 기본이요 철야을 주에 3~4회씩 하는 와중에도 책을 3권이나 읽었다.
지난 주일 그러니까 7월 25일, 아내는 사당까지 와서 식사를 같이 했다. 아내는 다시 다시 지하철을 타고 북쪽으로 가고 난 지하 서점에서 10분내로 읽을 책을 골라야 했다. 원래 사고 싶었던 책은 '내려 놓음'에 대한 책이었는데 찾지 못하고 있던 터에 이 책이 보였다. 덥썩 집어서 계산을 했다.

책의 분량에 비해 비싼 12,000원, 할인도 없이 그냥 샀다. 



랜디포시는 마지막 강의로 유명세를 타던 당시에 필자도 호감을 가지고 있던 카네기 멜론 대학의 컴퓨터공학부 교수였다. 그의 전공은 가상현실 -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 학문이다. 또 그는 말기 췌장암 환자로 반 년도 못 산다고 선고 받았고 임종 전까지 편안한 생을 마감하기 위한 최소한의 화학요법을 받고 있었다. 강단에 오른 그는 말기 암 환자로 보기에는 강단있는 모습과 밝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던지 이야기에서 그는 자신이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암 환자이며 의학적으로 치료를 포기한 상태임을 밝힌다.
(그는 자신을 부상당한 사자로 표현하고, 부상당한 사자도 포효하고 싶어한다고 표현한다. 또 자신의 병을 '방안의 코끼리' 같이 감추고 싶은 이야기 지만 말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마지막 강의는 명예 퇴임하는 노교수들의 퇴임인사 같은 행사이지만 포시는 이 강의를 독특한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얼마남지 않은 시간 중에 작지 않은 시간을 사용하여 강의 준비를 한다. 이유는 그의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랄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자신의 거실에서 촬영해도 되었지만 공개 강의를  통해, 방송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정하고자 했던 이유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서글픈 유년을 보내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아이들이 아버지의 부재 보다 더 큰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게 하고 싶어서 였다.

 

그는 디즈니랜드를 사랑했고 그 때문에 디즈니랜드에서 일할 꿈을 꾼다.
사실 디즈니랜드에서 일할 기회는 쉽지 않다. 교수 생활 중에 안식년을 얻어 일했던 이미지니어도 순전히 억지를 부려 얻은 자리였는데 여기서 그는 알라딘에 등장하는 마술카페트를 모티브로 한 가상현실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래서 인지 그는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자신 스스로도 어린시절 디즈니랜드을 만드는 사람에 되겠다는 생각이 노력끝에 현실이 되었고 자신의 가르친 학생이 어린시절 제다이를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어 ILM에 입사하여 스타워즈 에피소드 II에서 중요한 역활을 한 것을 예로 든다.

  
포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꿈을 확장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까지도 그가 들려주는 아버지의 사랑담긴 잔소리(?)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마치 인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냥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마치 성자 처럼...

어느 날 그는 학교 근처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볼크스바겐 비틀 카브리오레(헝겁 지붕이 열리는 차)의 지붕을 열고 왼손을 차 문위로 살짝 내어 놓고 음악을 들으며 평안한 얼굴로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  누가 그를 말기 암 환자라 하겠는가?


나의 마지막 강의를 어떤 내용을 꾸며야 할까?

 

성자 랜디포시는 2008년 7월 25일 새벽, 자택에서 좋은 세상으로 떠났다.
필자가 책을 사던 날로 부터 꼭 2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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