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짐 - 내 삶이 행복해지는 항복훈련
더글러스 웹스터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요즘 마음에 좀 무겁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라서 내 고민이 도움이 되지 않지만 책임자라는 상황이 그렇게 만든다. 아내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주었는데... 나는 같이 온 낮추이라는 책을 열심히 읽고있다. 낮추는 것과 내려 놓은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이지는 않지만 내가 낮추임을 먼저 잡은데에 의미를 두고 싶어진다.
 

 

이 책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자들을 위한 책이고 이야기의 소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을 가지고도 인간을 어찌 대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위에서 굴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어서  봉사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성이고 완전하며 죄없는  완벽한 존재(그러면서도 또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이기에 현대의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로는 괘변 같은)이면서 먼저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실천했던 그리스도의 공생활을 보면서 기독교 신자들이 어찌 살아야 하는 가를 일깨운다.
 

필자는 개신교에 입교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60,70년대 어린시절 많은 아이들이 동네 교회를 한 두 번은 들락 거렸다.
부활절과 성탄절에 주는 선물과 과자들... 여름성경학교에서의 놀이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 교회는 우리들에게는 낮선 곳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고등교육을 받고 자신의 생각이 생성되고 나면 많은 비 기독교인들이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같은 기독교인데도 천주교와 개신교를 보는 시선은 또 다르다.
천주교는 오랜 동안의 기간 동안 현지에 맞는 방식으로 변했고 보편적인 인간 사회의 잣대를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고 개신교는 그에 비해 매무 보수적인 교리를 적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매우 강한 유교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전반의 보편적인 정서라는 것이 중요하고 그 중에 도덕률이 가장 기본이 되는 인간의 도리인데 개신교의 생각에서는 도덕 률에 앞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여호와를 믿는 것이기 떄문이다. 비 기독교인이 보기에는 예수만 믿으면 도덕적이지 않아도 천국 간다는 논리는 비약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은 각종 미디어등에서 개그 소재나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드는데 자주 이용이 된다. 예를 들면 투캅스에서  안성기는 형사이지만 온갖 자잔한 비리의 온상이다. 그런데 안성기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울면서  그 주에 행한 악행을 씻어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주를 준비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 것은 비 기독교인들이 바로 보는 시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나 종교적인 체험에서 개신교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열정적어서 보는 사람에 따라 오해를 하기도 한다.
순간 느껴지는 종교적인 체험과 그 표출 모습은 매우 사적인 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은 불편하기 그지 없고 심하게는 '광신도' 라는  단어까지도 등장시킬 만하다. 보편적이지 않은 모습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일이라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과잉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개신교에 대한 비 기독교 신자들의 오해가 심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 한 듯이 자신의 의지를 떠난 어떤 체험이 아닌 의도적인 행동이 종교적인 체험의 순간에 일어난 다거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보다 예배 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신자가 있다면 이것은 어찌 보아야 할까? 교회 밖에서 어찌 보던 이런 신자가 실제로 있다면 이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소위 통성기도라고 하는 기도의 내용을 입밖으로 크게 외치는 기도의 형태나 방언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이 알아드리기 힘든 외침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개신교의 예배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통성기도는 자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장로교파 중 일부 엄숙한 분위기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개신교에서 하는 기도 형태이다. 그런데 필자가 지적했듯이 이렇게 들어내는 행동이 혹시라도 남에 보이기 위해 과장되거나 의도된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들어내기 위하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 이런 행동은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지체와 교제하며 건강한 생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화려한 예배, 멋지고 큰 교회당, 은혜롭게 보이는 기도 모임, 설교가 멋진 목사에 집중하는 오류 범하는 것도 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교회에 오는 행위, 능력있는 목사님의 멋진 설교, 유명한 교회의 교인, 교회에서 맏은 직분에 집중하여 정작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성경에서 보여주는 여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동떨어진 상황에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은 마치 환타지 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이고 그 것을 습관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 예로 희생양 제사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희생양 제물은 그냥 글 자체로 받아들이기 떄문에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희생재물이 된 것으로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현대인들이 희생재물이 어떤 의미인지 잘알고 있다면 예수의 희생제사를 생각하면 끔찍하다거나 서러움이 복바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대목을 그냥 지식과 습관적으로 받아들인다. 진정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면 예수의 생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이 당연 할지도 모른다.
내 동생이 내 형이 33살의 젋은 나이에 진리를 전하려 다니다가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달려 반나절을 고통속에 말라 죽었다고 생가하면 당연히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치밀 것이다. 

 

바로 앞에서 필자는  개신교의 통성기도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전했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것은 모두를 싸잡아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눈물로 기도를 한다. 그러니 그 진정성이 없다는 점을 굳이 이야기 하자면 일부에 국한 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성이라 부분이 누군에 대한 것인가를 이야기라면 과연... 예수의 희생양 되심을 생각하면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내 자신도 내 고통을 이야기 할 때는 눈물을 아니어도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

앞서 이야기 했 듯이  근대 지성의 시대 이후 인류는 모든 것으로 정반합으로 논리를 맞추어서 판단하는 습관이 들었다. 소위 합리주의니 이성주의니 하는 사상들에 의하면 내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논의 대상이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이 말은 참 멋진 말이지만 내 존재 조차도  검증이 필요한 시기에 사는 인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느껴진다.

 

나는 존재한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증거를 찾아 증명해야 내가 존재한다면  존재 자체가 불행할 수 있다. 
내 존재 사실도 부정으로 부터 애써 증명하게 된다면 내가 다른 타인의 존재의 어찌 증명할 것인가?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내가 남의 생각을 대신 하지 못한다면 남의 존재는 어찌 증명할 것인가? 이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현대의 인간들은 합리라는 제약안에서 사고 하게 됨으로 써 스스로 또 하나의 고통에 갖힌 것이라 볼 수 있다.

 

증명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데 인간이 가진 증명의 방법이 완전하다고 보장 할 수 없다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발생한다.
이런 모습들이 현대인들 사이 만연되어 있다.
저자는 신학교에서 겪어던 고통스런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신을 가르치던 신학교수들이 예술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확시이 없었던 것 같은데...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이 믿음이 아닌 학문으로써... 일로써 신학을 가르치는 상황에서 필자는 절망 스러웠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원죄는 선악과 따먹음으로 써 시작하고 중동과 서아시아의 설화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이 두가지 이야기는 공통으로 인간의 호기심이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즉 지나친 호기심으로 금지된 열매를 먹어서 자신이 알몸임을 알고 어둠으로 피하고 열어보지 말라고 한 상자를 열어 온갖 고통을 인간세상에 풀어버린 것이다.여기서 지나친 호기심이 일어난 이유를 찾다보면 자만심과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먹어보고 열어보면 자신이 자신의 배경인 세상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자만심이 호기심을 부추긴 것이라는 비약(?) 이 가능하다.

 

성경에 보며 야휘가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괴롭히고 살려내고 괴롭히고 살려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 받을 때와 구원 받을 때의 상황은 단 하나 그들이 야휘안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가장 큰 죄는 바알로 대표되는 이방신과 우상숭배이다. 그들이 야휘에게 순종할 때는 고통을 내리지 않았고 고통중에라도 건져내었다. 

이런 일련의 반복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신에 의지하지 않고 자만하고 방종하여 스스로의 신을 만들어 낸일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의 신에게 순종하여 그 안에 머물고 의지하지 않음을 경고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보통의 경우라면 자신에게 닥힌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또 공동의 문제나 타인의 문제도 처리하려고 하고 처리하기도 한다. 특히나 물질 세계의 일들에 대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로 문제 해결이 되는 것 처럼 보인다. 또 해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비물질계를 함께 가지고 있다. 즉 마음의 문제도 물질계에서 처럼 인간의 의지로 조절이 가능할까?
일면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오랜시간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심이 가는 것은 필자의 잘못된 생각일까?
인간의 지성이 관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요? 물질계에서는 그 유효성의 기한 표기가 아직 안보일 수도 있다.(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하지만 물질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차치하고라고 비물질계에서는?

  

예수는 길지 않은 공생활 중에 늘 한 부류를 공격했다. 늘 낮은 자세로 행동하여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세리, 죄 때문에 병에 걸렸다 하여 멀리하던 병자들과 가까이 하고 무식쟁이들을 제자로 삼았고 그 제자들에게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행동인 발 씻김까지 했던 그가 악마라고 까지 욕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리세인들과 사두게인들 이었다. 특히 바리세인들을 경멸했는데 그 이유는 한가지 였다. 잘난 척하며 사람들에게 인사 받기 좋아하며 종교적으로 경건한 척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해 목회를 하기 때문에 죄없이 깨끗한 분이 그렇게 통열히 비난을 한 것이다. 

 

혼자 잘나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다면 누군가의 그늘에 기대는 것도 필요하고 누구와의 관계에서 봉사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지혜로 낮추임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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