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이 차례로 서거하면서 진보진영과 다소 진보적인 시민들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이유가 상식을 넘어서는 방법을 동원한 보복이라는 점과 30년 가까운 민주화 운동이 1-2년 만에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4.19의거’,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등의 우리나라 역사의 굵직한 시민민주화의 결실로 세기가 바뀌면서 진보민주정권을 이루었고 시민운동에 의해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초유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던 이 들에게 보수정권이 등장한지 1년도 안되 일어난 일 들의 맥 빠질 일들이었다.
그리고 줄지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전 정권을 나름 진보적인 민주정권으로 자부하였지만 실상은 응집력이 전혀 모래, 자갈, 진흙이 제각각 흩어진 빈 땅 위에 얼기 설기 이것 저것 잡히는 대로 주워다가 붙여놓은 정체 모른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번지르르하게 지은 상징 탑 같은 것이었다.
사상누각(沙上樓閣) 이라는 말이 있다. 모래 위에 건물을 지었으니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대통령은 잘 세웠는데 정부는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들이 가득 차 있고 정권말기에는 대통령을 밀어주던 정권 마저 서로 자기만 살아보자고 오합지졸 분당을 일으켰다. 우리 정치사에 가장 극적이며 민주적인 사건인 ‘대통령 탄핵기각’ 때를 제외하고는 국민들도 정권에 등을 돌렸다. 표면적으로는 부동산 정책 실패를 선두로 경제정책 전반에 걸친 무능력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제 다음 정권말년에 이르러 전 정권을 돌아보면 이것이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사상누각
다소 진보적(우리나라에 과연 진보가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보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자면…)인 성향인 필자는 노무현 정권에 가장 치명적인 정책실패라는 부동산 정책과 외환 문제에 대해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사실 당시에는 그냥 헤매고 있고나~ 하는 정도이니 그걸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경제관련 책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 그리고 외환, 거시경제 정책이 어느 순간부터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근대에 우리가 가난을 탈출하면서 사용한 수출지향적 정책은 분명 우리가 20세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가장 큰 공신 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OECD에 가입하는 시점 이후 우리의 수출주도적 경제정책은 수정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그 동안 수출에서 이익을 얹을 수 있었던 것은 개발도상국이라는 지위 때문에 받은 여러 가지 국제사회의 양보와 국내의 저축에 힘입은 것이었는데 우리가 선진국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의 혜택과 선진국 진입이라는 사회 분위기 등으로 국민의 소비(지출) 증가로 수출은 외화벌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뿐 아니라 국부유출이라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은 지금도 80년대와 동일하다. 또 세기가 바뀌면서 인류는 거시(巨視)보다는 미시(微時)를 지향하게 되었고 그런 영향들은 경제정책 수립에서도 이제는 무시 못하는 부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제정책은 소위 ‘케인즈 학파’ 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파’ 라 불리는 문하의 경제학자(또는 경제관료)들에 의해 세워진다. 최근 비주류(또는 야인) 경제꾼들의 책에서 이 문제는 적나라하게 지적 질 당하고 있는 것인다. 사막 위에 서 있는 망루에 앉은 왕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백성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아니 사막 위 망루에서 소리 지르는 왕을 보는 백성들은 왕이 한심해 보인다.
우리가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면서 홍보했던 문구가 있다 ‘풀 뿌리 민주주의’ 이 말은 민주주의란 어떤 모양을 가져야 하는 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작은 뿌리 하나부터 민주여야 한다. 나무 위에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나무는 물을 주고 가꿀 때만 아름다울 뿐이다. 그 손길을 거두면 오래 버터지 못한다.
앞에서 경제관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딴 이야기를 조금 했다. 전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는 노무현 정권의 정책 실패라기 보다는 사실 몇 십 년을 지배해온 우리나라 경제시스템의 실패이다. 정권의 수장이 시스템 탓을 하면서 책임 회피만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시스템 특히 정책부분은 우리 경제의 걸림돌임에는 확실하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이렇게 3 정권 동안 그 정도는 달라도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은 동일하고 동일한 실패를 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들여다보면 경제관료 때문이다. 3정권 내내 경제정책을 세우는 관료들은 자리만 바뀌어 앉았을 뿐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그분들 그대로이다. 또 이분들의 이력들을 살펴보면 신경제학파라는 같은 문하를 제외하고도 개인적인 성향이나 내력이 비슷한 부분들이다 시쳇말로 끼리끼리 놀고 있는데 그러니 정권이 바뀌었어도 노는 판이 그대로 인 것이다.
관료사회 전체를 예로 들자면 복잡하고 필자가 그럴 능력도 안되고 하니 과학기술 부분을 예로 들자면 일반적으로 정권이 바뀌면 관료 사회에서는 다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전 정권에서 프로젝트를 주도하던 실무진이 대거 자리를 이동하거나 해임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새로운 정권과 줄이 닿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낙하산이라고 해도 나름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니 전혀 엉뚱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물갈이가 되고 나면 문제는 이전 정권에서 작업 중이던 프로젝트도 그 성과나 진행 정도 여부를 떠나서 모두 사라져 버리고 설혹 프로젝트가 유지된다고 해도 관련 인력이 바뀐 상황에서 제대로 진행될 일이 만무하다. 성과가 없으니 중단된 것이 아니냐 할 수 도 있는데 4년 만에 성과를 낼 만큼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라면 사실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더 쉽게 이해 되도록 실제 예를 들어보면 ‘와이브로’가 그 적절한 예이다. ‘와이브로’는 김대중 정권 때 무선네트워크가 차세대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라며 진행하던 프로젝트로 노무현 정권 초에 어느 정도 보급이 되었고 필자는 3년 넘게 사용하던 기술이다. 이 방식은 이동형 무선 네크워크 기술로는 거의 최초 사용한 된 기술이며 기술 수준으로도 1~2위를 하던 것인데 이 좋은 잘 만들어진 기술을 두고 4G 이동통신 서비스는 생뚱하게도 유럽에서 만든 LTE를 채용했다. 와이브로를 세계 표준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3G와 3.5G 시장을 독식하던 CDMA 방식을 대체하려던 시도는 엉뚱하게 LTE채용을 결론이 났다. 그 배후에는 바로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에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인력들이 현 정권이 들어서면 물갈이 되면서 와이브로를 활용한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 프로젝트에 투여되던 자금도 끊겨서 KT 혼자 이 기술을 확장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와이브로가 4G 서비스의 표준이 되면 이 기술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한 KT가 원천기술을 가지고 시장을 흔들 가능성도 있어서 경쟁사들의 막후 로비가 있었으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듯 관료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가 없다면 정칙적인 변혁, 특히 정권 수장들의 변화가 국가의 변화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다. 소신대로 뛰어 가다 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형국이 바로 노무현 정권의 모습이었다.
더 큰 문제 : 전혀 움직이지 않는 국민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면 관료들의 모습이 바로 국민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관료들은 원래 보수적이고 복지부동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국민까지 싸잡아 욕을 할 생각이냐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말기에 국민이 보여준 모습들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쉽게 퇴보한 원인이 과연 현정권의 실세들과 늘 그래왔던 관료주의의 문제뿐 아니라 바로 국민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명박 후보는 사실 정치적으로는 매력적인 후보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는 단 하나 그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경제라고 말하니 그 광범위한 뜻은 다소 고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를 적나라하게 까보면 바로 이기적인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경제라는 것은 바로 부자로 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동산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토건으로 이름을 날리고 서울시장 재직 당시 재건축 사업으로 인기를 얻었던 이 후보야 말로 침체된 부동산 경기를 살려서 내 배를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이다. 우리의 부동산에 대한 신념에 대해 부정적이던 필자도 이 사람이라면 ‘적어도 경기는 회복 시키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었다. 물론 이 것은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기대였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았지만 이 기대감에 투표를 했던 많은 비주류(소위 ‘강부자’로 지칭 되는 주류 국민에 반대되는…) 국민들에게 나타난 정신병적인 현상에서 우리 국민들이 민주화에 대한 이해와 의지 박약을 여실히 볼 수 있다.
6월 항쟁 이후 줄 곳 민주화의 길을 가던 대한민국은 국민의 의지로 세운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이후 내리막을 걸었고 소위 ‘민주화 세력(?)’의 노력(?)이나 최근의 국민들의 각성된 민주의식에도 불구하고 국가 전체에 퍼진 무관심과 보수적 생각과 행동들은 스스로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민주화의 급격한 후퇴라는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라고 말을 한다.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도 피부로 느낄 만큼 상황이 악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여전히 뒤로 걸어가는 분들이 있어 참 안탑갑다.
무지와 무책임에 대한 고백
고인이 되신 두 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민주주의는 거저 얹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었다. 가만히 바라만 보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그 떡고물이나 받아먹겠다는 소극적인 자세, 나 같이 힘없는 사람이 무슨 정치를 바뀔 것이며 무슨 능력으로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냐며 스스로를 묶어 둘 때 우리사회는 후퇴하는 것이다.
그저 하루, 그날 그날을 보내고 ‘오늘도 무사히~’ 이러면서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만 묻히거나 나와 나 가족만 잘살면 되지 하며 당장의 상황만 피하려는 태도로 소극적으로 사는 동안 우리는 더욱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우리로부터 나온 권리를 남에게 맡겨 놓고는 그것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인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은 더욱 힘든 세상을 살게 된다.
어렵지 않아요.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민주화 하고 진보시키려는 움직임은 이제는 진보적인 학생이나 야권 정치인들, 진보적인 지식인, 종교지도자들 만의 몫이나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 세기 민주화 과정에서는 그들의 피와 땀의 매우 소중하게 뿌려졌으나 우리가 이 정권에서 후퇴하는 민주화의 가장 큰 원인이 국민들의 의식에 민주라는 개념이 깊이 인지 되지 못하고 주권자와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있음을 생각 할 때 이제는 국민들 하나 하나가 삶에서 민주와 진보를 실천하지 않으면 무서운 속도로 후퇴하는 우리 사회를 구해 낼 수 없다.
지난 세기의 민주운동은 참 어려웠다. 소위 말해 시위현장에서 최루탄 가스 한 번은 마셔보고 눈물, 콧물 쏟아봐야 그래도 내가 민주화에 조금 기여했다 말 할 수 있었다. 이러 저러한 상황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분명 여러 가지로 지난 세기와는 다르다. 많은 부분은 보편화 되고 쉬워졌는데 민주화라는 개념과 그 실천에 대해서도는 매우 쉬운 접근을 하고 있다.
지난 ‘광우병 파동’에서 시위 현장에서 보여진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이 시대에서 반영이 되는 가를 보았다. 그들은 굳이 민주화니 진보니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관심도 없는 단어이다. 그 들이 말한 것은 그런 상징성이나 개념이 아닌 바로 생활에서 느낀 불편함에 대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말이던 춤사위였던 간에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자신들이 느꼈던 불편함을 이야기 했다.
SNS를 통한 투표 독려,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며 그것 때문에 겪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연예인들, Podcast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직설적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게 많아진 다양한 매체와 방법, 각각의 개성대로 생겨먹은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또 남의 말을 받아 들여서 자기화 한다.
부에 대한 삐뚤어진 생각들(돈과 권력에 대한…)이 ‘부동산 불패신화’라는 망국적이고 치욕적인 국민 정신병을 일으켰다.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교묘히 이용하는 세력들은 전국민이 부동산에 미쳐있을 때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배를 불렸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보다 높은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더 먹고 더 먹고 배가 터질 정도로 먹어도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병이다. 거식증이라는 병이다. 국민 전체가 돈에 대한 거식증에 걸렸던 것이다. 정신병에 걸렸으니 의사가 이건 병이다. 치료해야 한다. 해도 무시했던 무서운 병이다. 많은 국민들이 무서운 병에 걸려 인생을 허비한 후에야 ‘아~ 이건 좀 아니다 싶다’ 라고 하는 판국이다. 기왕 지사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이제라도 눈을 떠서 다행이다. 라며 이제 생각을 판을 바꾸어야 한다. 다음 끼니 걱정을 하던 시대의 생각을 틀을 가지고는 마냥 그 타령으로 의식주 생각을 하며 뒤로 후퇴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기계조차 학습을 하는 시대이다. 하물며 인간이 엄청난 학비를 내고 배운 것을 잊는 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식민시기를 겪으면서 급격한 사회 변혁이 일어났다. 식민시대 바로 직전의 봉건사회에서 불과 40년의 기간 동안 근대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식민해방 이후 바로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갑자기 현대사회를 만나게 된다. 스스로가 아닌 외부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변화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스스로 이런 변화를 만들 나라는 없을 만큼 이것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봉건사회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데 100년이 안 걸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사회에는 봉건사회의 의식이 남아있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겪은 봉건사회와 근대사회의 의식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에 대한 종교와 같은 믿음이다. 사실 강남 부동산 문제가 이 강한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지금 우리가 겪은 학교와 학생들의 문제는 신분상승이 생존의 문제였던 시대의 소산이라고 보면 과대망상에 침소붕대일까?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고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를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창의력이 무기인 시대인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들어 좀 다른 교육을 하는 학교와 부모들 그리고 색다른 시스템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가 늘고 있다. 소위 대안학교니 홈 스쿨링이니 하는 것들과 또 다른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떤 문제가 있느냐를 다 떠나서 보도에서 보여진 아이들의 공통된 모습에서 아~ 이것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도 해보자. 어른들의 민주만 생각하고 아이들은 무시한다면 그것부터 비민주요 역사에 대한 뒷걸음질 인 것이다.
필자는 최근 그 유명한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읽고 있다.
소설에서 회색사나이들은 시간을 저축하라며 사람들을 유혹하는데 그들에게 유혹된 사람들의 말로(?)는 하나 같이 시간이 없다며 모든 즐거움을 저당 잡히고 살아간다. 늘 바빠서 시간에 허덕이고 늘 괴롭고 화난 얼굴을 하고 산다. 남보다 더 돈 많고 남을 부리는 위치에서 살겠다는 바르지 못한 생각에 생의 즐거움과 가족의 행복을 저당 잡혀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닮지 않았는가?
정말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회색사나이들에게 우리의 생을 빼앗겨서 자신의 삶을 제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런 암울한 미래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 줄 수도 있다.
정말 무엇이 선이지 파악하며 늘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권력의 핵심이고 정치인들은 우리의 대표이다. 정치인들은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맡겨서 대신 우리의 의지를 대표하는 이들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지금은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의사 권이 국민들이 빌려준 것이라는 것을 잊고 국민의 이름을 팔고 엉뚱한 것을 위해 또 엉뚱한 이들을 위해 일한다. 따라서 선거권은 이들에게 우리가 주권자임을 보여줄 귀한 기회이다. 그들을 바로 보고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귀한 선거권을 헛되이 쓰지 않을 수 있다.
또 선거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대화와 의사표현의 수단을 이용하여 주권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자 시류에 매우 민감한 정치인들은 SNS같은 의사소통 수단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다. 작은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압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시민모임이나 정치관련 세미나. 교육에 참여하여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은 좀 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 뿐 아니라 스스로 정치인이 되어 봄직도 하다.
다시 한번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그리고 예수의 말을 생각해 본다.
움직이지 않으면 가진 것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움직인다면 다수의 힘은 위대한 것을 해낼 것이다. 작은 실천 하나가 결국에는 변화를 만들 것이고 나 하나의 헛된 수고가 모이면 대세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은 2011년에 있었던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들을 편집한 것이다.
초반 부에는 대한민국의 정치상황, 민주화가 퇴보한 원인 등 정치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한다. 중반부에는 부동산, 경제 문제들이 어떻게 정치와 연관되어 움직이는 가를 이야기 한다. 저소득층이 왜 보수적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필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늘 이해가 안되던 부분이었었다. 그리고 후반 부로 가면 교육과 사회복지 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민주화는 거창한 부분이고 하면서 일상화적인 것들이 모인 혼합 결과이다. 내가 나에 대해 더 나아가 가족관계에서 민주화될 필요도 있고 내 신념을 대외적으로 피력하여 힘을 결속할 필요도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교육 현실을 개탄하면서 암담한 미래에 대해 걱정이 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내용이 잊혀질 무렵 작은 실천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