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멘터리 동과 서 - 서로 다른 생각의 기원
EBS 동과서 제작팀 외 지음 / 지식채널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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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

 

동양과 서양의 의식차이를 조명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이자 그 다큐멘터리의 연구내용을 정리한 책이다필자는 서재에 꽂힌 책들 중에 아무 것이나 내키는 대로 읽은 버릇이 있는데 특별히 읽어달라고 부탁을 받지 않는 경우에는 인문서가 우선 순위이다그 다음이 육아서적(요즘 아이 키우는 것이 필자의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이다.

 

지난 해에는 두께가 600페이지(생각하는 뇌 ……) 800페이지(예루살렘 전기인문서적으로 읽어내느라 지쳤는데 가벼운 책 몇 권을 읽고 나니 다시 인문학 책이 손에 잡힌다그런데 막상 1장을 읽고 나니 좀 허무하기도 하다이 책은 몇 개의 단편들을 각각 하나의 장으로 모아두고 동서양을 비교하는 방식의 편집을 택했는데 그 내용은 꽤 쉽게 씌어져서 필자의 경우에는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서양인들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는 아주 오래 전 역사시기 이전부터 다르게 발전한 세상을 보는 방법에서 기인하는데 그것이 현재는 서로간의 모든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의 기원이다서양인들과 만 몇 일이라도 함께 생활하다 보면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눈에 띄는 분쟁이 당장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정말 사소한 하나 하나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차이를 보인다만일 이들이 몇 년을 함께 지내기로 했다면 당장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동서양의 차이는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반목이 오래되면 충돌할 소지가 많다서로를 이해 못해서는 발생하는 지구상 분쟁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인 기독교인들과 이슬람들의 분쟁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그것은 바로 동서양 사람 각자가 자신과 세상을 바로는 보는 관점의 차이이다동양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서로간의 연결에 기인한다고 본다따라서 동양인들은 자신을 인지할 때도 자신을 비추는 타인에게서 그 것을 파악하고 어떤 사건을 인식할 때 그것의 원인을 먼저 파악한다반면 서양인들은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파악하려고 한다따라서 서양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객체라는 개념을 서양인들은 세상을 볼 때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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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로망스
김민관 지음 / 고려의학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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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작가로부터 쪽지가 왔다. '제가 책을 썼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책을 손에서 놓고는 일주일도 못 참는 사람이라 책을 보내준다는 것은 참 감동적인 일이다. 책을 받은 지는 한달 가까이 되는 다른 아직 읽지 못하고 책꽂이 누워있는 책들이 많아 지난 주에 잡기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는 수필이겠거니 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책의 디자인과 생뚱하게도 의학서적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는 점에서였다. 의사 쓴 낸 미셀러니(경수필)겠거니 했다.

 

슈퍼맨 로망스의 첫 단편 '김동구'를 읽는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접시를 타고 다니는 외계인이 지구에 추락하고 자기 별로 돌아가려는 생존의 투쟁(?)중에 어떤 시한부를 도와준다는 이야기이다. 수필과는 거리가 멀었고 SF와는 더더욱 멀었다. 일반 소설도 아니었다. 이건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단편을 읽고 나니 일종의 선입견이 생겼다. 기왕 받은 것이니 가볍게 읽자. 즉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

 

 

아직은 설 익은 작가이기에 각 단편마다 재미나 기술적(?)인 면이 들쭉날쭉 하다. 단편이기는 하지만 비약이 심한 글들이 몇 편 보인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느리게 걸어간다는 것은 이 책이 단순히 초보작가(필자는 감히 이렇게 부르고 있다.)의 글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단편들 하나 하나를 읽어나가며 독자들은 스멀스멀 가슴이 따스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나 영화 그리고 다른 장르와 매체들은 많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은 글들은 기교가 빠짐(또는 부족함)으로 인해 좀 더 그 본질적인 이야기에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특히 이 책의 타이틀인 슈퍼맨 로망스는 무척이나 수줍은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로 흔한 소재이지만 밥을 굶은 어린아이가 말하는 슈퍼맨의 정의(定義)를 통해 사람 안에 어떤 힘이 존재하는지를 일깨운다.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온 우주적인 원리와 절대자의 섭리가 심어져 있음을 한 불행한(?) 아이의 입을 통해 각성하게 한다. 

 

역시 필자 스스로 밝혔듯이 그가 가장 소중히 생각할 만한 글이다. 완성도 면에서 이 책 안에서 가장 높은 단편이다. 역시 오랜 탈고의 덕인가? 

 

그 신비한 힘을 깨우는 방법을 같이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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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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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문제는 굳이 종교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속세에서도 ‘강권(强勸)’하는 문제 중에 하나이다. 게으름 핀다는 것 자체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것이다.

이 책은 게으름의 문제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규범적 차원을 넘어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게으름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게으름을 부지런함의 반대개념 이상의 광의(廣義)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게으름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좀더 넓어 시각에서 단호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에서의 게으름은 정직, 신실함, 현명함의 반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잠이 많다거나 - 이 책의 저자는 잠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서 이 분이 새벽에 기도를 위해 잠을 깨기가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 모든 일에 굼뜨고 노는 시간이 많다는 의미 이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게으름에는 정신적 게으름이 포함된다. 게을러서 남들보다 적게 일하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더 부자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하곤 한다. 즉 일한 만큼 수확하기 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게으름을 불성실을 넘어 불의한 자로 칭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세상의 핑계에는 그 저변에 ‘하기 싫어서 거부’하는 생각이 깔려있다. 핑계라는 것 자체가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당당함이 사라진다. 당당하게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겠다고’ 하고는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게으름을 피운다. 그래서 게으름에는 불성실과 거짓이 늘 함께 하게 된다.





게으름은 시작일뿐이다.

게으름은 타락을 이끈다. 그 이유는 게으름이 육체의 편함을 모든 가치에 우선하다 보니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편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기도나 성경읽기 또는 아침운동 같은 눈에 띄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지만 그렇게 익숙해진 상황이 지속되면 몸과 마음은 더 편하길 갈망하여 절도, 사기, 자살, 살해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육체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동을 하여야 하는 인간에게 이런 육체의 본성은 매우 취약한 부분이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게으름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여러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정도 취업을 준비하다가 취업이 어려워지자 본격적으로 백수생황을 시작한 이가 있다고 하자. 얼마 간은 매일매일 취업사이트에서 구인정보를 확인하고 주기적으로 이력서를 손을 본다. 가끔 취업 박람회도 가보고 면접 제의가 들어오면 옷을 차려 입고 외출도 한다. 가끔 친구들과 전화통화도 하고 만나서 밥도 먹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외출이 무의미 해진다. 면접 제의도 없고 친구들과는 창피한 기분에 소원해진다. 시간이 많아지자 낮에도 잠을 자거나 비디오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정규TV  프로그램은 물론 케이블TV도 찾아보기 시작하자 밤에 취침시간이 늦어지고 해가 뜰 때까지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낮에는 자거나 잠에 취한 멍한 상태가 지속된다.


그리고 이런 생활에 개선이 없이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게으름은 그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되먹임이 되어 훨씬 높은 경지의 타락(?)을 원한다. 일하기는 싫은데 밥은 먹어야 하니 불법한 행동을 쉽게 하게 된다. 심지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양심에 가책을 받다가 그 횟수가 늘어가면 나름의 당위성까지 부여한다. ‘나는 가난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생존해야 한다.’ 같은 의식이 자리 잡으면 절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죄에 집중하기 보다 벌에 집중하게 되면서 반사회적으로 악마로 변해간다.

성범죄의 문제에서 이런 현상은 극에 달한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름의 노력으로 사회로 복귀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이 게으름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자극적인 것들에서 위안(?)을 찾게 되는데 그 중에 일부가 자극적인 성인 영상물에 집착하는 경우를 보이며 이것의 결과로 성적욕구의 제어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성범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 중에 하나가 그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자의던 타의던 이런 게으름의 지속은 결국 정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노력과 능력의 결여로 이어지고 이 것이 극에 달하면 반사회적이고 비양심적인 범죄행위를 아무런 느낌도 없이 자행할 수 있는 타락함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게으름

다시 본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게으름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해보자.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바빠서 기도합니다.’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게으름과 핑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책의 독후감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게으름은 하나님과의 대화 부재로 나타난다. 기도가 줄고 말씀(성경) 읽기가 중단되며 그리스도인은 특히나 영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영적인 문제는 바로 현실 생활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보통, 중요한 의무인 주일예배/미사의 꾸준한 참석,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기 등을 꾸준히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비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소위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서 본서는 그 이유 중에 하나로 지목되는 게으름에 대해 강하게 질타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으름의 문제는 ‘새벽기도’와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도 자유롭지 못하다. -.-;;;;;; 




다시 돌아오려는 노력

그렇다면 이미 게으름에 빠져서 길에서 멀어지거나 길가 도랑에 빠져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게으름의 종국은 타락이고 파국이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거나 주위 사람들이 걱정한다면 빨리 자신의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한동안 책꽂이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성경이 있다면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읽는 습관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이나 MP3 같은 미디어를 통해 설교나 성경 강해(講解)등을 언제 어디서나 접하는 것도 위급 상황에 대한 긴급한 조치 중에 하나이다. 물론 이 방법은 이후에도 습관화 해야 할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먼저 들기 보다 잠시 누워서라도 새 아침과 오늘을 살아갈 숨을 주심에 감사하며 잠시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가장 큰 걱정거리를 주님께 보여 드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다만 이것은 긴급조치이며 회복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조금씩 그 분량과 질을 높여야 할 것이다.



반면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완벽하기를 추구한다면 게으름에 빠질 이유가 없겠지만 영적으로는 이런 완벽주의는 자칫 자만심이나 영적인 ‘자기의(自起義)’에 빠져서 절대자에게서 멀어지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방향이 자신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열심’이라면 게으름의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을 것이고 설혹 잠시 한눈을 팔더라도 다시 돌아오는 길이 흐릿하지도 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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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 20주년 확대개정판
빌 하이벨스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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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데 기도할 수 있는 이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몇 가지 습관을 들라고 하면 주 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성결 읽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을 대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중요한 신앙생활들이라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며 하나님과 예수를 기리는 제사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기본이 되는 부분이다. 이 기본이 지켜진다는 전제하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이 꼭 필요하다. 성경을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을 읽고 이해하는 것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대화하는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우리는 이 과정에서 대부분 듣는 이의 입장이다. 반면 기도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취한다.
 
 
창조주의 목적
  
하나님을 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따르게 되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주의 백성이라고 해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죄 사함으로 하얗게 정화된 종이 위에 먼지가 쌓이고 기름 때가 묻으면 변색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먼지를 털어내고 세탁을 하지 않으면 죄로 오염이 된다. 그렇다고 죄 사함 이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는 죄 사함을 받았더라도 완전해 질 수 없다. 이것은 원죄 이후 사람들에게 부여된 멍에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완벽한 인간으로 승화되는 간편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유혹에 넘어지게 하셨을까? 그럼 이 질문을 해보자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을 살아가도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큰 계획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피조물 즉 창조한 인간들의 삶과 역사를 통해 스스로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실 소위 믿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명제라서 시쳇말로 이야기하면 스스로 만든 피조물 인간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피조물이 드리는 창조자에 대한 찬양을 받기 원해서라는 것이다. 이하로 형이하학적인 표현을 하면 이해는 쉬울지 모르지만 조심스러워 더 이상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창조주를 닮아가는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가르침을 본보기로 예수와 가장 닮아가려는 노력을 일생 매진하여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분과 많이 닮아있어 마치 아버지가 자신을 많이 닮은 아들을 보고 기뻐하듯이 성화된 인생의 결과물로 그 분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의 필요성

 앞에서 하나님을 나의 주님, 나의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늘 세속과 악한 세력의 시험을 받아 때가 묻는다고 말했다. 이것을 세속적은 상황으로 예를 들면 그토록 간절하면 취업이 된 어떤 청년이 1년을 정신 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2년이 되니 조직이 돌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고 뭔가 자신의 손을 일구어낸 결과물에 뿌듯하다. 그런데 3년차 정도되니 일은 많아지고 자신에게 쏟아지던 정감 어린 시선들도 사라진다. 또 기대치가 커진 만큼 실수가 많아지고 그에 대한 반응을 차갑다. 소위 ‘3년차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첫 입사 당시와 비교하면 스스로는 더욱 발전했고 주변 여건이 특별히 나빠지지 않았지만 입사 때가 더욱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3년이 지나는 동안 공급보다 소비가 많았던 열정이 고갈되자 에너지에 대한 목마름이 생긴 것이다. 사람은 식사를 제때 하지 않으면 움직임이 둔해지고 30일 이상 지나면 죽음에 이르듯이 영적인 에너지를 일정 수준 유지해야 한다. 쓴 만큼 보충하지 않으면 갈급하고 갈급이 도를 넘으면 쓰러지고 만다. 영(靈)이 쓰러지는 사례는 요즘에 와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우울증, 무기력증, 대사증후군 등 이제는 일반화된 병들이 제때에 올바른 것으로 채우지 못해서 생기는 병들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의 갈급을 채려고 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오죽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에 기반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영적 건강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영적이 갈급함을 채운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형제, 자매들과 교류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채움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활동 중에서도 기본이면 중요한 부분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 나의 목소리를 주님에 전달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도는 주님과의 사적인 대화 방법이라서 그 분과의 아주 친밀한 관계 유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극도로 중요한 생활이다.
 


기도하기 어렵다.
  
기도는 정해진 방법도 없고 분량도 없다. 장소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법적 구속력도 없이 자유롭게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유로운 것인데도 현실적으로 기도만큼 부담되고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한다. 필자 역시 기도에 대해서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어렵게 느끼는 시기는 대부분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바쁘지 않은 때이다. 자연스럽게도 정말 바쁘고 힘들 때에는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의 시기가 지나고 견딜만한 상황이 되면 언제 ‘살려다’라고 매달렸나 싶게 기도의 질이나 양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몸이 편해지게 되면 기도를 안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대화는 호흡과도 같아서 신선한 산소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쉽지 않다. 비단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타 종교인들이나 비 종교인 들에게도 이런 영적 에너지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거나 지속적인 부재는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너무 바빠서 못한다'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있다. '너무 바빠서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다'는 아빠는 동아리 술자리에는 꼭 참석하고 5년째 밥 '한번 먹자'는  옛 친구는 새로 알게 된 친구와는 일주일이 멀다고 만난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동료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한 시간 내내 모바일게임을 한다. 이런 예들을 들자면 꽤 많다. 바빠서 못한 것이 아니라 관심과 정성이 없어서 또는 지금 당장에 이익이나 욕구에 맞는 것을 먼저하다 보니 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일순위에서 밀리면 아예 못하는 것이 된다.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은 알지만 동아리 사람들과 만난 술자리에서 오가는 관심사에 끼는 것이 더 흥미 있고 눈 아프고 머리쓰기는 것보다 습관적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것이 더 쉽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니 게임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고 그렇게 교육 받아서 잘 알고 있지만 편하고 쉬운 것에 잘 끌리기 정작 중요한 것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 시키 위해


필자도 한 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10개월 이상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야 근무지 근처의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본당에 앉았다가 왔고 차츰 매일 매일 찾게 되고 무릎 끓게 되고 프로젝트 막바지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갔으며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새벽에 눈을 뜨면 먼저 하는 것이 게임이다. 그 프로젝트 이후 2년간 생에 처음으로 성경을 일독하고 이 독하고 삼 독했다. 한 동안은 눈을 뜨면 감사기도 먼저 했다. 


지금은 오전 시간에 하는 말씀 묵상과 교회 홈페이지에서 들을 수 있는 설교를 들으며 일하는 정도만 하고 있다. 고난의 시기 막바지에 충만했던 희망(곧 프로젝트가 끝나리라는)과 몇 달간 지속된 감사하는 마음. 자신감, 열정(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었던, 그러면서도 일반 서적도 꽤 많이 읽었던, 일을 재미있게 했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죄 사함과 받은 은혜에 대한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지속적인 주님과의 친교, 기도가 끊어지더라도 주님의 백성 된 자녀 된 그리스도의 친구된 자로서 자격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사도들이 서신 서에 들 지적하듯이 이 세상에서 죽을 존재로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은 죄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 때 마다 종이를 누렇게 변색되고 거울은 혼탁해진다.  몇 년을 살던 사는 동안 밝고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의 바램이며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일 진데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지속적인 새 숨결을 받아 건강해져야 한다. 


삶이 힘들어 절실한 기도를 하던 시기에는 오히려 마음에 꽉 찬 충만감을 느꼈다. 하지만 삶이 고요해지고 평이해지자 오히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 차이는 '기도'이다. 




매일 매일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기도의 문제는 있다.


그렇다면 매일 매일 기도하며 꾸준히 예배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충만한 삶을 살까?  앞에서 줄 곳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강력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사람의 삶은 지속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 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기본이라고까지 강조했다. 그렇다면 소위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늘 에너지로 충만하고 주님이 은혜로 삶이 평안할까?


애석하게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저자 고든 맥도날드 같은 저자들이 기도하는 삶에 대해 책을 써서 독자들에게 이 부분을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신실하다는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목회자들에게 기도의 문제가 생기기 쉽고 그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에 분주하고 주님의 일을 많아서 지칠 정도라고 해도 주님과의 일대 일의 교류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속세의 사람들처럼 일, 술자리, 모임이 많아서 힘들어 하는 것도 같을 수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해도 기도할 시간이 없다면 쉽게 지치고 세상의 욕망에 무뎌질 수 있다.


게을러진 사람이 어떻게 정욕(세상에서 말하는 성적인 욕망과는 다르게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체적인 욕망 전체를 지칭한다.)에 무뎌지고 타락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읽고 있는 '게으름'에 대한 독후감(?)에서 좀더 다룰까 한다. 이 두 책은 본의 아니게 연속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묘하게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현명한 기도 방법


원래 이 책 '바빠서 기도합니다'은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바쁠수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와 기도방법을 안내하는 책이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풀어나가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슨 설교처럼 되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면 주님과의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가.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위한 기도
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하는 기도
다. 지은 죄를 숨기며 하는 기도
라. 자기의 이야기만 해버리고 마치는 기도
마.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이 너무 바빠서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도에 귀 기울리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능력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함께 하는 기도.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요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주님에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바가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거나 남은 전혀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것을 주님께 구할 가능성이 크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가격상승을 염두하고 산 아파트를 정작 돈이 필요할 때 안 팔린다고 비싼 가격에 팔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가정해 보자.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어 시중가 보다 비싸게 팔렸다고 해보자 그럼 누군가는 시중가 보다 비싼 가격에 하락세인 애물단지를 떠앉을 수도 있다. 이런 기도들을 주님이 모두 이루게 해주신다면 그리스도인만 모두 부자가 될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사고 팔았다고 해보면 이 기도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면서 말로만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가 되어 달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는 제사를 드리려다가 형제와 다툼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에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이 것은 제사의 형식 즉 예배를 잘 들이거나 헌금을 잘 들이는 보이는 것보다는 내면의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겉만 번지르르한 바르세인들에 대해 예수가 칭한 '독사의 자식들'이란 말을 생각해 보자. 당시에 이 말은 지금은 상스럽지 못한 욕이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대중들 앞에서 입에 담기 힘들 말이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단어는 알레고리컬 하게 해석해보면 '사탄의 무리'로도 해석 가능해서 굉장히 위험한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사는 인간은 크던 작던 간에 죄를 매일 매일 죄를 짓거나 죄에 해당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에는 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렇게 쓰고 나니 오히려 기도가 더 부담이 된다. ^.^;;;;;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 일방으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으며 서로를 이해 해가는 과정이다.  최소한 대화 상대가 한 번씩은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주님과의 대화는 사실 일방적으로 인간이 전능 자에게 위로를 받고 원하는 바를 달라고 하는 대화이기 때문에 내 넉 두리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고난의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 희망과 안도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멀어져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의 실체이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인격을 닮게 만든 인간과 같은 바로 그 특징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므로 우리가 그렇듯이 누군가와 대화에서 나의 의견을 말하고 나의 공감을 전하고 싶으실 것이다. 누구와 대화를 하는 상대가 일반적으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는 자~ 그러니 언제 이거 해줄껀데요? 하면 누가 좋아할 것인가? 그분도 백성, 아들 예수의 피 값을 자녀 된 피조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것이다. 원하는 것만 던지고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분이 들려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할 것이다. 자녀와 부모간에 가장 먼저 성립되어야 할 것은 신뢰와 사랑이다. 신뢰와 사랑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하나님의 능력과 자녀 하나하나의 갈구를 살피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가지고 있다면 기도의 응답은커녕 기도와 멀어질 것이다. 이런 의심은 마치 창조 주을 피조물이 염려하는 모습으로 세속적으로는 배려 심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신이 바쁠까 봐 심려할까 봐 강구하지 않는 것은 기복신앙에 사용되는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도는 다음과 같은 순서와 내용을 바탕을 하라고 저자는 권한다.

가. 그 동안 주신 크고 작은 은혜에 감사한다.
나. 주님의 은혜와 전능하심을 찬양한다. 
다. 기억하는 가능한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와 회복을 간구한다. -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 원치 않음을 고백한다.
라. 간구하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은혜를 원한다.
마. 은혜가 지속되기를 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기도를 마무리 한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예가 바로 주기도문이다. 이 기도는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예로 든 기도인데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에서 매 예배나 미사 때 마다 같은 기도문을 읽는다.



응답도 거절도 없는 경우

내용과 형식과 량에 모두 합당한 기도 생활하고 세속의 삶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수 있다. 이기적인 이유나 남에 피해주는 것에 대한 간구가 아닌데도 응답이 없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욥의 고난에서처럼 '본인도 모르는 죄 때문에 응답이 안 되는 것이니 죄를 알아내서 회계하고 그냥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해라' 라고 무정하게 조언할 문제가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했 듯이 '기도가 장성한 분량'에 까지 차기를 기다리시는 경우가 있다. 즉 우리가 기도에서 원하는 것은 당장의 문제 해결인데 반해 주님이 단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더 장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간구자가 그런 응답을 감당할 능력이 될 때까지 단련하기 위해서 기도에 응답을 늦추기도 한다. 따라서 간구 자는 생각 치도 못한 큰 응답을 받기도 한다. 



너무 바빠서 기도 합니다

작가
빌 하이벨스
출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발매
200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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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그냥 책에 대한 느낌만 간단하게 피력하고 시작한 글인데 장황한 글을 되었다. 어느 순간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고 기도는 의무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제는 마치 정해진 시간에 시간을 알리듯 중언부언 몇 마디를 그분께 날리는 날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시간도 없이 기도를 마쳐버린다. 일이 많거나 모임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3년 전 그분을 만날 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설마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분의 전능하심, 의로우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의심했던 것은 아닐까?  믿음이 없어지면 영적인 게으름에 빠진다고 한다. 삶에 대한 계획이 없어지면 원하는 것도 없고 그러니 주님에 간구할 것도 없어진다. 기도할 의지도 기도할 것도 없는 삶은 무료하고 불안하다. 

이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결코 적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목표의식과 기쁨을 가득할 때 비로서 기도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신실한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기쁠 수 있다. 이 것이 바쁠수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고 바쁨에도 기도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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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맨서 환상문학전집 21
윌리엄 깁슨 지음, 김창규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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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소설'이라고 싸잡아(?) 분류하기에는  SF들은 실러 다양한 주제와 방식으로 씌어졌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SF인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메카닉(도시, 비행체, 전투장비 등등...), 독특한 캐릭터들과  액션 장면들을 맛있게 조합한 것들이라 사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SF장르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장르들은 나름의  꽤 심오한 사상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모든 대중이 이를 접하거나 이해하기에는 내용이나 서술방식에서 너무나 큰 담을 앉고 있기도 하다.

 

 

뉴로맨서는 얼마 전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안철수 선생이 인용한 문장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 은 캐나다 작가 윌리엄 깁슨의 유명한 인터뷰 내용중에 하나이다. 이 문장은 깁슨의 꽤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문장


이라서 이 문장의 인용은 안철수 선생의 많은 생각 함축적으로 쏟아낸 것이지만 이 말의 뜻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안철수의 인용으로 월리엄 깁슨과 그의 출세작 뉴로맨서는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도 SF의 고전들 만큼은 읽었다 자부하였지만 월리엄 깁슨은 처음 알게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뉴로맨서 1984년도 데뷔작이다. 사이버펑크 장르를 완성한 작품이라고 알려져있다.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7천만부 넘게 팔려나가는 동시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SF의 3대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더욱 멋진 것은 1980년대 아직은 화면 가득 문자만 가득하던 데이터 통신의 여명기에 사이버스페이스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개념 자체가 고루하게 느껴지지만 작가가 뉴로맨서를 저술할 당시에는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컬러 모니터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ON/OFF DOT 가 매우 조밀한 전광판 같은 모노크롬 모니터만 존재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를 세밀하게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고무스럽다. 혹자들은 그가 본 소설에서 그려내는 사이버스페이스로의 접속이나 다이빙시의 상황이 그의 시스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SF의 장르였던 하드SF의 영향을 생각하면 SF속의 묘사가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하다면 더욱 재미있겠지만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SF의 본질을 벗어난다고 질타할 근거는 없다. SF역시 문학적 표현이라는 점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물론 1982년에 이미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의 선악의 대결을 그린 트론(1982년)이 개봉을 했고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깁슨도 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가 표현한 사이버스페이스가 오로지 그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한편  뉴로맨서는 이후 한 때 유행하던 사이버펑크 문학과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데 특히 마사무로 시로우의 '공각기동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나 공각기동대의 두 인물 '모토코'와 '바토'에서는 뉴로맨서의 주인공 몰리의 영과 육(특히 바토의 이식렌즈)이 분리 전이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두 AI, 원터뮤트와 뉴로맨서는 그 들을 설계한 어떤 사람의 계획대로 새로 창조된 자유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원터뮤트는  AI라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계획을 수행 중인 뉴로맨서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 것은 삶이 죽음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의 삶이 인간의 손을 벗어난 영역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오래 전에 인간이 저지른 범죄처럼 신을 죽이고 영생을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니체는 신을 죽였다. 그런데 니체는 죽었다.' 이런 우스갯 소리를 기억하는가?(기억한다면 아마도 필자와 동년배이거나 비슷한 세대일 것이다. ^.^) 19세기 합리주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절대권력을 부여했다. 지난 세기까지의 인류의 눈부시 진보의 원천은 바로 인간 스스로 신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신을 묻어버린 진보 뒤에 남은 것들이 무엇이었나? 


마약쟁이 아나키스트이며 생계를 위해서는 어떤 위법도 저지르는 카우보이(크래커/해커) 케이스와 살인 청부업자 몰리가 누군가로 부터 의로받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흥미진지하면서도 썩 유쾌하지 않은 미래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케이스의 사이버스페이스 다이빙을 통해  오색찬란하고 자극적인 사이버스페이스를 시각적으로 느낀다.(필자는 글로 표현된 공감각을 이해라지 못하는 장애(?)가 있어 그 느낌을 적절히 표현하기 참 어렵다. ^^;;;) 


그러나 우리가 종국에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과연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존재의 문제이다.




얼마전 유명인의 의해 언급된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는 단지 단어적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어적 '미래'만을 의미한다면. 그 미래는 절대로 와 있을 수 없다. 두 AI의 계획, 그리고 두 AI의 코어를 설계한 한 인간의 계획, 그리고 인간을 설계한 또 다른 어떤 존재의 계획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거나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이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 계획을 제대로 인지하고 드러낼때 만이 그 미래가 현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많이 드러내지 않거나 계획을 잘못 이해할 경우에도 그 계획된 미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래를 드러내기 위해 또 많은 시간을 여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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