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로맨서 환상문학전집 21
윌리엄 깁슨 지음, 김창규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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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소설'이라고 싸잡아(?) 분류하기에는  SF들은 실러 다양한 주제와 방식으로 씌어졌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SF인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메카닉(도시, 비행체, 전투장비 등등...), 독특한 캐릭터들과  액션 장면들을 맛있게 조합한 것들이라 사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SF장르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장르들은 나름의  꽤 심오한 사상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모든 대중이 이를 접하거나 이해하기에는 내용이나 서술방식에서 너무나 큰 담을 앉고 있기도 하다.

 

 

뉴로맨서는 얼마 전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안철수 선생이 인용한 문장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 은 캐나다 작가 윌리엄 깁슨의 유명한 인터뷰 내용중에 하나이다. 이 문장은 깁슨의 꽤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문장


이라서 이 문장의 인용은 안철수 선생의 많은 생각 함축적으로 쏟아낸 것이지만 이 말의 뜻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안철수의 인용으로 월리엄 깁슨과 그의 출세작 뉴로맨서는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도 SF의 고전들 만큼은 읽었다 자부하였지만 월리엄 깁슨은 처음 알게되었다. 그의 대표작인 뉴로맨서 1984년도 데뷔작이다. 사이버펑크 장르를 완성한 작품이라고 알려져있다.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7천만부 넘게 팔려나가는 동시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SF의 3대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더욱 멋진 것은 1980년대 아직은 화면 가득 문자만 가득하던 데이터 통신의 여명기에 사이버스페이스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개념 자체가 고루하게 느껴지지만 작가가 뉴로맨서를 저술할 당시에는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컬러 모니터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ON/OFF DOT 가 매우 조밀한 전광판 같은 모노크롬 모니터만 존재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를 세밀하게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고무스럽다. 혹자들은 그가 본 소설에서 그려내는 사이버스페이스로의 접속이나 다이빙시의 상황이 그의 시스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SF의 장르였던 하드SF의 영향을 생각하면 SF속의 묘사가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하다면 더욱 재미있겠지만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SF의 본질을 벗어난다고 질타할 근거는 없다. SF역시 문학적 표현이라는 점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물론 1982년에 이미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의 선악의 대결을 그린 트론(1982년)이 개봉을 했고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깁슨도 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가 표현한 사이버스페이스가 오로지 그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한편  뉴로맨서는 이후 한 때 유행하던 사이버펑크 문학과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데 특히 마사무로 시로우의 '공각기동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나 공각기동대의 두 인물 '모토코'와 '바토'에서는 뉴로맨서의 주인공 몰리의 영과 육(특히 바토의 이식렌즈)이 분리 전이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두 AI, 원터뮤트와 뉴로맨서는 그 들을 설계한 어떤 사람의 계획대로 새로 창조된 자유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원터뮤트는  AI라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계획을 수행 중인 뉴로맨서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 것은 삶이 죽음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의 삶이 인간의 손을 벗어난 영역을 지배하려는 시도이다. 오래 전에 인간이 저지른 범죄처럼 신을 죽이고 영생을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니체는 신을 죽였다. 그런데 니체는 죽었다.' 이런 우스갯 소리를 기억하는가?(기억한다면 아마도 필자와 동년배이거나 비슷한 세대일 것이다. ^.^) 19세기 합리주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절대권력을 부여했다. 지난 세기까지의 인류의 눈부시 진보의 원천은 바로 인간 스스로 신에 가까워지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러나 신을 묻어버린 진보 뒤에 남은 것들이 무엇이었나? 


마약쟁이 아나키스트이며 생계를 위해서는 어떤 위법도 저지르는 카우보이(크래커/해커) 케이스와 살인 청부업자 몰리가 누군가로 부터 의로받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흥미진지하면서도 썩 유쾌하지 않은 미래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케이스의 사이버스페이스 다이빙을 통해  오색찬란하고 자극적인 사이버스페이스를 시각적으로 느낀다.(필자는 글로 표현된 공감각을 이해라지 못하는 장애(?)가 있어 그 느낌을 적절히 표현하기 참 어렵다. ^^;;;) 


그러나 우리가 종국에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과연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존재의 문제이다.




얼마전 유명인의 의해 언급된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unevenly distributed.)'는 단지 단어적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어적 '미래'만을 의미한다면. 그 미래는 절대로 와 있을 수 없다. 두 AI의 계획, 그리고 두 AI의 코어를 설계한 한 인간의 계획, 그리고 인간을 설계한 또 다른 어떤 존재의 계획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거나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이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 계획을 제대로 인지하고 드러낼때 만이 그 미래가 현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많이 드러내지 않거나 계획을 잘못 이해할 경우에도 그 계획된 미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래를 드러내기 위해 또 많은 시간을 여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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