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게으름의 문제는 굳이 종교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속세에서도 ‘강권(强勸)’하는 문제 중에 하나이다. 게으름 핀다는 것 자체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것이다.

이 책은 게으름의 문제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규범적 차원을 넘어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게으름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게으름을 부지런함의 반대개념 이상의 광의(廣義)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게으름을 보는 그리스도인은 좀더 넓어 시각에서 단호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에서의 게으름은 정직, 신실함, 현명함의 반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잠이 많다거나 - 이 책의 저자는 잠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서 이 분이 새벽에 기도를 위해 잠을 깨기가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 모든 일에 굼뜨고 노는 시간이 많다는 의미 이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게으름에는 정신적 게으름이 포함된다. 게을러서 남들보다 적게 일하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더 부자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하곤 한다. 즉 일한 만큼 수확하기 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게으름을 불성실을 넘어 불의한 자로 칭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세상의 핑계에는 그 저변에 ‘하기 싫어서 거부’하는 생각이 깔려있다. 핑계라는 것 자체가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당당함이 사라진다. 당당하게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겠다고’ 하고는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게으름을 피운다. 그래서 게으름에는 불성실과 거짓이 늘 함께 하게 된다.





게으름은 시작일뿐이다.

게으름은 타락을 이끈다. 그 이유는 게으름이 육체의 편함을 모든 가치에 우선하다 보니 결국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편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기도나 성경읽기 또는 아침운동 같은 눈에 띄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지만 그렇게 익숙해진 상황이 지속되면 몸과 마음은 더 편하길 갈망하여 절도, 사기, 자살, 살해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육체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노동을 하여야 하는 인간에게 이런 육체의 본성은 매우 취약한 부분이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게으름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여러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정도 취업을 준비하다가 취업이 어려워지자 본격적으로 백수생황을 시작한 이가 있다고 하자. 얼마 간은 매일매일 취업사이트에서 구인정보를 확인하고 주기적으로 이력서를 손을 본다. 가끔 취업 박람회도 가보고 면접 제의가 들어오면 옷을 차려 입고 외출도 한다. 가끔 친구들과 전화통화도 하고 만나서 밥도 먹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외출이 무의미 해진다. 면접 제의도 없고 친구들과는 창피한 기분에 소원해진다. 시간이 많아지자 낮에도 잠을 자거나 비디오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정규TV  프로그램은 물론 케이블TV도 찾아보기 시작하자 밤에 취침시간이 늦어지고 해가 뜰 때까지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렇게 되면 낮에는 자거나 잠에 취한 멍한 상태가 지속된다.


그리고 이런 생활에 개선이 없이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게으름은 그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되먹임이 되어 훨씬 높은 경지의 타락(?)을 원한다. 일하기는 싫은데 밥은 먹어야 하니 불법한 행동을 쉽게 하게 된다. 심지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양심에 가책을 받다가 그 횟수가 늘어가면 나름의 당위성까지 부여한다. ‘나는 가난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생존해야 한다.’ 같은 의식이 자리 잡으면 절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죄에 집중하기 보다 벌에 집중하게 되면서 반사회적으로 악마로 변해간다.

성범죄의 문제에서 이런 현상은 극에 달한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름의 노력으로 사회로 복귀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이 게으름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자극적인 것들에서 위안(?)을 찾게 되는데 그 중에 일부가 자극적인 성인 영상물에 집착하는 경우를 보이며 이것의 결과로 성적욕구의 제어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성범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 중에 하나가 그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자의던 타의던 이런 게으름의 지속은 결국 정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노력과 능력의 결여로 이어지고 이 것이 극에 달하면 반사회적이고 비양심적인 범죄행위를 아무런 느낌도 없이 자행할 수 있는 타락함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게으름

다시 본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게으름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 해보자.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바빠서 기도합니다.’에서도 그리스도인의 게으름과 핑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책의 독후감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게으름은 하나님과의 대화 부재로 나타난다. 기도가 줄고 말씀(성경) 읽기가 중단되며 그리스도인은 특히나 영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영적인 문제는 바로 현실 생활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보통, 중요한 의무인 주일예배/미사의 꾸준한 참석,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기 등을 꾸준히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비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소위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서 본서는 그 이유 중에 하나로 지목되는 게으름에 대해 강하게 질타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으름의 문제는 ‘새벽기도’와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도 자유롭지 못하다. -.-;;;;;; 




다시 돌아오려는 노력

그렇다면 이미 게으름에 빠져서 길에서 멀어지거나 길가 도랑에 빠져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게으름의 종국은 타락이고 파국이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거나 주위 사람들이 걱정한다면 빨리 자신의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한동안 책꽂이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성경이 있다면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읽는 습관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이나 MP3 같은 미디어를 통해 설교나 성경 강해(講解)등을 언제 어디서나 접하는 것도 위급 상황에 대한 긴급한 조치 중에 하나이다. 물론 이 방법은 이후에도 습관화 해야 할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먼저 들기 보다 잠시 누워서라도 새 아침과 오늘을 살아갈 숨을 주심에 감사하며 잠시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가장 큰 걱정거리를 주님께 보여 드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다만 이것은 긴급조치이며 회복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조금씩 그 분량과 질을 높여야 할 것이다.



반면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완벽하기를 추구한다면 게으름에 빠질 이유가 없겠지만 영적으로는 이런 완벽주의는 자칫 자만심이나 영적인 ‘자기의(自起義)’에 빠져서 절대자에게서 멀어지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방향이 자신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열심’이라면 게으름의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을 것이고 설혹 잠시 한눈을 팔더라도 다시 돌아오는 길이 흐릿하지도 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