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 20주년 확대개정판
빌 하이벨스 지음, 김성녀 옮김 / IVP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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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쁜데 기도할 수 있는 이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몇 가지 습관을 들라고 하면 주 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성결 읽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을 대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중요한 신앙생활들이라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며 하나님과 예수를 기리는 제사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기본이 되는 부분이다. 이 기본이 지켜진다는 전제하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이 꼭 필요하다. 성경을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을 읽고 이해하는 것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대화하는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우리는 이 과정에서 대부분 듣는 이의 입장이다. 반면 기도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취한다.
 
 
창조주의 목적
  
하나님을 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따르게 되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주의 백성이라고 해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죄 사함으로 하얗게 정화된 종이 위에 먼지가 쌓이고 기름 때가 묻으면 변색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꾸준히 먼지를 털어내고 세탁을 하지 않으면 죄로 오염이 된다. 그렇다고 죄 사함 이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는 죄 사함을 받았더라도 완전해 질 수 없다. 이것은 원죄 이후 사람들에게 부여된 멍에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완벽한 인간으로 승화되는 간편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유혹에 넘어지게 하셨을까? 그럼 이 질문을 해보자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을 살아가도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큰 계획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피조물 즉 창조한 인간들의 삶과 역사를 통해 스스로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실 소위 믿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명제라서 시쳇말로 이야기하면 스스로 만든 피조물 인간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피조물이 드리는 창조자에 대한 찬양을 받기 원해서라는 것이다. 이하로 형이하학적인 표현을 하면 이해는 쉬울지 모르지만 조심스러워 더 이상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창조주를 닮아가는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가르침을 본보기로 예수와 가장 닮아가려는 노력을 일생 매진하여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분과 많이 닮아있어 마치 아버지가 자신을 많이 닮은 아들을 보고 기뻐하듯이 성화된 인생의 결과물로 그 분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의 필요성

 앞에서 하나님을 나의 주님, 나의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늘 세속과 악한 세력의 시험을 받아 때가 묻는다고 말했다. 이것을 세속적은 상황으로 예를 들면 그토록 간절하면 취업이 된 어떤 청년이 1년을 정신 없이 회사생활을 하고 2년이 되니 조직이 돌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고 뭔가 자신의 손을 일구어낸 결과물에 뿌듯하다. 그런데 3년차 정도되니 일은 많아지고 자신에게 쏟아지던 정감 어린 시선들도 사라진다. 또 기대치가 커진 만큼 실수가 많아지고 그에 대한 반응을 차갑다. 소위 ‘3년차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첫 입사 당시와 비교하면 스스로는 더욱 발전했고 주변 여건이 특별히 나빠지지 않았지만 입사 때가 더욱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3년이 지나는 동안 공급보다 소비가 많았던 열정이 고갈되자 에너지에 대한 목마름이 생긴 것이다. 사람은 식사를 제때 하지 않으면 움직임이 둔해지고 30일 이상 지나면 죽음에 이르듯이 영적인 에너지를 일정 수준 유지해야 한다. 쓴 만큼 보충하지 않으면 갈급하고 갈급이 도를 넘으면 쓰러지고 만다. 영(靈)이 쓰러지는 사례는 요즘에 와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우울증, 무기력증, 대사증후군 등 이제는 일반화된 병들이 제때에 올바른 것으로 채우지 못해서 생기는 병들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의 갈급을 채려고 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오죽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에 기반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영적 건강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영적이 갈급함을 채운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형제, 자매들과 교류를 하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채움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여러 활동 중에서도 기본이면 중요한 부분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 나의 목소리를 주님에 전달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도는 주님과의 사적인 대화 방법이라서 그 분과의 아주 친밀한 관계 유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극도로 중요한 생활이다.
 


기도하기 어렵다.
  
기도는 정해진 방법도 없고 분량도 없다. 장소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법적 구속력도 없이 자유롭게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유로운 것인데도 현실적으로 기도만큼 부담되고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한다. 필자 역시 기도에 대해서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어렵게 느끼는 시기는 대부분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바쁘지 않은 때이다. 자연스럽게도 정말 바쁘고 힘들 때에는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의 시기가 지나고 견딜만한 상황이 되면 언제 ‘살려다’라고 매달렸나 싶게 기도의 질이나 양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고 몸이 편해지게 되면 기도를 안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대화는 호흡과도 같아서 신선한 산소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쉽지 않다. 비단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타 종교인들이나 비 종교인 들에게도 이런 영적 에너지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거나 지속적인 부재는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흔히들 말하는 '너무 바빠서 못한다'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있다. '너무 바빠서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다'는 아빠는 동아리 술자리에는 꼭 참석하고 5년째 밥 '한번 먹자'는  옛 친구는 새로 알게 된 친구와는 일주일이 멀다고 만난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동료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한 시간 내내 모바일게임을 한다. 이런 예들을 들자면 꽤 많다. 바빠서 못한 것이 아니라 관심과 정성이 없어서 또는 지금 당장에 이익이나 욕구에 맞는 것을 먼저하다 보니 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일순위에서 밀리면 아예 못하는 것이 된다.

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은 알지만 동아리 사람들과 만난 술자리에서 오가는 관심사에 끼는 것이 더 흥미 있고 눈 아프고 머리쓰기는 것보다 습관적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것이 더 쉽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니 게임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고 그렇게 교육 받아서 잘 알고 있지만 편하고 쉬운 것에 잘 끌리기 정작 중요한 것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 시키 위해


필자도 한 때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10개월 이상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는데 6개월이 지나서야 근무지 근처의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본당에 앉았다가 왔고 차츰 매일 매일 찾게 되고 무릎 끓게 되고 프로젝트 막바지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찾아갔으며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새벽에 눈을 뜨면 먼저 하는 것이 게임이다. 그 프로젝트 이후 2년간 생에 처음으로 성경을 일독하고 이 독하고 삼 독했다. 한 동안은 눈을 뜨면 감사기도 먼저 했다. 


지금은 오전 시간에 하는 말씀 묵상과 교회 홈페이지에서 들을 수 있는 설교를 들으며 일하는 정도만 하고 있다. 고난의 시기 막바지에 충만했던 희망(곧 프로젝트가 끝나리라는)과 몇 달간 지속된 감사하는 마음. 자신감, 열정(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었던, 그러면서도 일반 서적도 꽤 많이 읽었던, 일을 재미있게 했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죄 사함과 받은 은혜에 대한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지속적인 주님과의 친교, 기도가 끊어지더라도 주님의 백성 된 자녀 된 그리스도의 친구된 자로서 자격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사도들이 서신 서에 들 지적하듯이 이 세상에서 죽을 존재로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은 죄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 때 마다 종이를 누렇게 변색되고 거울은 혼탁해진다.  몇 년을 살던 사는 동안 밝고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의 바램이며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일 진데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지속적인 새 숨결을 받아 건강해져야 한다. 


삶이 힘들어 절실한 기도를 하던 시기에는 오히려 마음에 꽉 찬 충만감을 느꼈다. 하지만 삶이 고요해지고 평이해지자 오히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 차이는 '기도'이다. 




매일 매일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기도의 문제는 있다.


그렇다면 매일 매일 기도하며 꾸준히 예배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충만한 삶을 살까?  앞에서 줄 곳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강력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사람의 삶은 지속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 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기본이라고까지 강조했다. 그렇다면 소위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늘 에너지로 충만하고 주님이 은혜로 삶이 평안할까?


애석하게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저자 고든 맥도날드 같은 저자들이 기도하는 삶에 대해 책을 써서 독자들에게 이 부분을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신실하다는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목회자들에게 기도의 문제가 생기기 쉽고 그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에 분주하고 주님의 일을 많아서 지칠 정도라고 해도 주님과의 일대 일의 교류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속세의 사람들처럼 일, 술자리, 모임이 많아서 힘들어 하는 것도 같을 수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해도 기도할 시간이 없다면 쉽게 지치고 세상의 욕망에 무뎌질 수 있다.


게을러진 사람이 어떻게 정욕(세상에서 말하는 성적인 욕망과는 다르게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체적인 욕망 전체를 지칭한다.)에 무뎌지고 타락하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읽고 있는 '게으름'에 대한 독후감(?)에서 좀더 다룰까 한다. 이 두 책은 본의 아니게 연속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묘하게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현명한 기도 방법


원래 이 책 '바빠서 기도합니다'은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바쁠수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와 기도방법을 안내하는 책이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풀어나가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슨 설교처럼 되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한다면 주님과의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가.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위한 기도
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면서 하는 기도
다. 지은 죄를 숨기며 하는 기도
라. 자기의 이야기만 해버리고 마치는 기도
마.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이 너무 바빠서 나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도에 귀 기울리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능력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함께 하는 기도.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요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주님에 말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바가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거나 남은 전혀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것을 주님께 구할 가능성이 크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가격상승을 염두하고 산 아파트를 정작 돈이 필요할 때 안 팔린다고 비싼 가격에 팔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가정해 보자.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어 시중가 보다 비싸게 팔렸다고 해보자 그럼 누군가는 시중가 보다 비싼 가격에 하락세인 애물단지를 떠앉을 수도 있다. 이런 기도들을 주님이 모두 이루게 해주신다면 그리스도인만 모두 부자가 될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사고 팔았다고 해보면 이 기도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면서 말로만 주님의 영광스런 도구가 되어 달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는 제사를 드리려다가 형제와 다툼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에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이 것은 제사의 형식 즉 예배를 잘 들이거나 헌금을 잘 들이는 보이는 것보다는 내면의 성화를 강조하고 있다. 겉만 번지르르한 바르세인들에 대해 예수가 칭한 '독사의 자식들'이란 말을 생각해 보자. 당시에 이 말은 지금은 상스럽지 못한 욕이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대중들 앞에서 입에 담기 힘들 말이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단어는 알레고리컬 하게 해석해보면 '사탄의 무리'로도 해석 가능해서 굉장히 위험한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사는 인간은 크던 작던 간에 죄를 매일 매일 죄를 짓거나 죄에 해당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에는 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렇게 쓰고 나니 오히려 기도가 더 부담이 된다. ^.^;;;;;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 일방으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으며 서로를 이해 해가는 과정이다.  최소한 대화 상대가 한 번씩은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주님과의 대화는 사실 일방적으로 인간이 전능 자에게 위로를 받고 원하는 바를 달라고 하는 대화이기 때문에 내 넉 두리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고난의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 희망과 안도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멀어져 갑자기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의 실체이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인격을 닮게 만든 인간과 같은 바로 그 특징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므로 우리가 그렇듯이 누군가와 대화에서 나의 의견을 말하고 나의 공감을 전하고 싶으실 것이다. 누구와 대화를 하는 상대가 일반적으로 자기 이야기만 하고는 자~ 그러니 언제 이거 해줄껀데요? 하면 누가 좋아할 것인가? 그분도 백성, 아들 예수의 피 값을 자녀 된 피조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것이다. 원하는 것만 던지고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분이 들려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할 것이다. 자녀와 부모간에 가장 먼저 성립되어야 할 것은 신뢰와 사랑이다. 신뢰와 사랑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하나님의 능력과 자녀 하나하나의 갈구를 살피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가지고 있다면 기도의 응답은커녕 기도와 멀어질 것이다. 이런 의심은 마치 창조 주을 피조물이 염려하는 모습으로 세속적으로는 배려 심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은 신성모독이라고 까지 할 수 있다. 신이 바쁠까 봐 심려할까 봐 강구하지 않는 것은 기복신앙에 사용되는 우상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도는 다음과 같은 순서와 내용을 바탕을 하라고 저자는 권한다.

가. 그 동안 주신 크고 작은 은혜에 감사한다.
나. 주님의 은혜와 전능하심을 찬양한다. 
다. 기억하는 가능한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와 회복을 간구한다. -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 원치 않음을 고백한다.
라. 간구하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은혜를 원한다.
마. 은혜가 지속되기를 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기도를 마무리 한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 토시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예가 바로 주기도문이다. 이 기도는 이런 내용들이 포함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예로 든 기도인데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에서 매 예배나 미사 때 마다 같은 기도문을 읽는다.



응답도 거절도 없는 경우

내용과 형식과 량에 모두 합당한 기도 생활하고 세속의 삶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수 있다. 이기적인 이유나 남에 피해주는 것에 대한 간구가 아닌데도 응답이 없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욥의 고난에서처럼 '본인도 모르는 죄 때문에 응답이 안 되는 것이니 죄를 알아내서 회계하고 그냥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해라' 라고 무정하게 조언할 문제가 아니다. 

바울 사도가 말했 듯이 '기도가 장성한 분량'에 까지 차기를 기다리시는 경우가 있다. 즉 우리가 기도에서 원하는 것은 당장의 문제 해결인데 반해 주님이 단편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더 장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간구자가 그런 응답을 감당할 능력이 될 때까지 단련하기 위해서 기도에 응답을 늦추기도 한다. 따라서 간구 자는 생각 치도 못한 큰 응답을 받기도 한다. 



너무 바빠서 기도 합니다

작가
빌 하이벨스
출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발매
200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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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그냥 책에 대한 느낌만 간단하게 피력하고 시작한 글인데 장황한 글을 되었다. 어느 순간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고 기도는 의무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제는 마치 정해진 시간에 시간을 알리듯 중언부언 몇 마디를 그분께 날리는 날리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시간도 없이 기도를 마쳐버린다. 일이 많거나 모임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3년 전 그분을 만날 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설마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분의 전능하심, 의로우심, 자녀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의심했던 것은 아닐까?  믿음이 없어지면 영적인 게으름에 빠진다고 한다. 삶에 대한 계획이 없어지면 원하는 것도 없고 그러니 주님에 간구할 것도 없어진다. 기도할 의지도 기도할 것도 없는 삶은 무료하고 불안하다. 

이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결코 적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목표의식과 기쁨을 가득할 때 비로서 기도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신실한 기도에 열심을 내어야 기쁠 수 있다. 이 것이 바쁠수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고 바쁨에도 기도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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