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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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 루이스하면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의 인기 만큼이나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평생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이 중에서 기독교인들의 필독서로 불리는 '순전한 기독교' 을 비릇한 명작들이 있다. 성인이 된 후에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성경의 바울 사도처럼 그의 남은 생애를 믿음에 관하여 저술을 하며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나니아 연대기' 역시 아이들에게 예수와 하나님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쓴 이야기이다.

필자는 작년에 소천한 고 김성수 목사의 강해설교를 통해 몇 권의 책을 접했다. 다른 곳에서 라면 알지도 못했을 책들 그 중에 하나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이다. C.S. 루이스 저작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은 역시 '순전한 기독교'이다. 사실 나디아 연대기도 어린 시절에는 읽지만 성인이 이 책을 다시 잡아 읽기는 쉽지 않고 주위에서 이 책 스크류테이프의 편지를 알려주는 성도도 목사도 없었다. 평신도에게서 소개 받지 못한 이유야 뻔하다. 책을 안 읽기 때문이고 성직자가 평신도에게 권해주기에는 다소 무리수가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유혹자라고 자신을 칭하는 이들. 악마, 사탄의 부하들 중에 특별히 인간을 유혹해서 죽은 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맡은 조직의 관리자 급 인사이다. 이자가 편지를 쓴 이유는 자신이 관리하는 조직의 신참 유혹자이며 조카 뻘되는 웜우드의 활동을 질타하고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불안한 웜우드의 활동을 보고 받고 조언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초기 편지의 내용을 보면 웜우드는 한 초신자 남자를 유혹하는 중이었는데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죄의 유혹을 강하게 사용하는 웜우드에게 스크류테이프는 초신자에게는 강한 죄의 유혹은 오히려 회계를 하게 한다며 그 남자가 자신의 믿음이 성장시키며 교회에 열심하게 하라고 조언을 한다.




스크루테이프는 소위 종교적 열심이나 스스로 만드는 성령 충만 같은 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공작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습관적인 예배, 기도, 기부 같은 것과 도덕적으로 완전해 보이는 부류 등과의 교류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종교적 자만심 같이 보통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그런 마을을 부추기라고 지시한다.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흔히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 오히려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필자가 교회를 옮기게 된 이유 중에 하나도 소위 열심이라고 불리는 겉으로 드러난 것들과 그런 행동의 목표인 이 세상에서의 부와 건강에 대한 간구들이 아주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만 소개해도 왜, C.S. 루이스의 책이지만 쉽게 권하기 어려운지 이해가 될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처음 접하면 악마가 쓴 것이라는 설정 때문에 재미있다.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내용과 표현이 반어적인 것임을 알지만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악마의 주장을 거꾸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이다. 이 문제는 이 편지의 결론을 읽어보면 그렇게 머리 아프게 계산한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는데 젊은 유혹자 웜우드가 작업 중이던 그 남자가 어떻게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그 젊은 초신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그들이 말하는 그 자(하나님)에게 매달리며 죽을 것이 분명한 자기 일터에 나갔다가 죽는다.  지옥의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는 유혹자가 영혼 하나를 그 자에게 빼앗기는 사태는 악마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이다 보니 멘토인 스크루테이프가 웜우드의 영혼을 먹어서 그 존재를 지워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존재하고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희생자의 영과 육의 건강, 잠시 세상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의 부귀와 권력 그리고 남들이 우러러 보는 영예로 영혼의 무게가 무거워진 이들을 끌어다가 지옥으로 잠기게 하고 그들이 영원토록 겪는 고통을 그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그들의 존재를 지속 시킨다.  






이 책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스크루테이프가 웜우드를 독려하기 위해 알려주는 적(하나님)에  대한 정보이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알고 알아야 하는 바로 그것을 악마 스크류테이프의 입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반어적 표현의 극치인 것이다. 이런 진리를 아는 것을 보면 스크류테이프도 조만간 누군가의 양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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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생각 Meta-Thinking - 생각 위의 생각
임영익 지음 / 리콘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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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학교를 다닐 때 공부 때문에 압박을 받은 기억이 적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제일 커야 하는데 필자의 기억에는 공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대학교 졸업을 한 지 20년이 넘은 필자에게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중년의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추억은 아름다운 법'이라고 이야기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난 기억은 세세한 문제들 보다 두리 뭉실하게 장면으로 기억이 되기 쉬우니까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정말로 공부에 대한 부담이 많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수학이라는 학과목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예 수학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중학교 과정에서는 초기에는 기하학을 공부하고 중2 후반부터 대수학을 배운다. 중2 때는 수학 교사가 설명한 증명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증명을 하기도 하고 역으로 증명을 하기도 했다. 좋은 점수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B에 해당하는 점수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과정에서 미분을 시작하면서 수업시간의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고 초기에는 외워서라도 풀어보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언어를 듣는 것처럼 멍해지더니 급기야 수학을 포기하고 수업 시간에는 다른 상상을 하며 보냈다. 고2가 되자 수학 담당 교사도 나에게 계산을 해보라고 시키지 않았다. 필자는 3년 내내 평균 20점의 수학 점수를 기록했다. 그냥 1,2,3,4 순서로 답을 찍으면 그 정도의 점수가 나온다. 당시 필자는 선지원 후시험을 대학 입학시험을 보았다. 이 시험에서 수학 시험은 찍어서 기입하고 해당 시간에는 30분 가량을 누워서 명상(?)을 했다. 그 명상 덕분인지 대학에 합격을 했다. 

 

그러나 공대에서는 미적분뿐 아니라 공업수학(내용은 미적분이 대부분이지만 다행히 우리 과 교수는 이 시간에 컴퓨터 모델링 기초를 가르쳤다.) 그리고 역학을 필수로 이수해야 했다. 미적분을 아예 포기한 필자는 계산만 해야 하는 미적분 수업을 4번이나 재 수강 한 후에 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수학은 나의 일생에서 멀어졌다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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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아닌 생각을 위해서 공부하라!

 

 

대학을 졸업한 후 원래 하고 싶어하던 디자인 공부를 한 후 필자는 애니메이터로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 일하게 되었고 늘 새로운 툴(Tool)과 기술이 쏟아지는 IT 분야에서 살아 남자며 필자의 일은 물론 연관 분야의 정보를 빨아 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컴퓨터그래픽 툴에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아뿔싸!!!! 깊이 들어가니 알고리즘(Algorism) 부분에서 보간법을 이해해야 했다. 보간법은 뉴튼방정식의 기초이고 뉴튼방정식은 미적분의 기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미 30을 넘어서 대학을 졸업한 지도 5년이 넘은 필자는 이 부분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계산은 여전히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소개하고 긴 글 머리를 마치겠다. 

 

미적분 등의 대수학을 왜 배우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해 못하면 외어서라도 시험을 통과하라는 주문이 너무 싫었다. 친구들은 수학은 포기한 놈이 물리는 A의 점수를 유지하고 증명도 해내는 필자를 재미있는 놈이라고 했다. 필자는 알고 싶었던 것이지 시험을 통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과 관련되어 시작한 공부는 그 이유가 분명했다. 내 목표도 있었다. 그리고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제서야 왜 미적분이 필요한지 이해가 된 것이다.

 

 

 

 

 

 

 

사고를 위해 수학을 한다.

 

 

이 책, 메타생각 - 생각의 2중 스캐닝을 받아보고는 처음에는 살짝 실망을 했다. 그 이유는 우선 책 표지에 씌어져 있는 카피(Copy) 때문이었다. 특히 '공부의 기술' 이 워딩(Wording)이 마치 이 책이 공부하는 이들에게 공부를 쉽게 또는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책에 사용된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의 내용이 수학 공부와 시험에 대한 에피소드로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뇌의 사고 처리 과정에 대한 고찰과 그것의 예로서 수학에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관심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수학 문제로만 제한하지 않는)를 풀어가는 과정에는 여러 과정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소위 말하는 메타생각이 어떤 것인가? 이었다.

 

많은 이의 이해를 위해 저자는 '겜'이라 불리는 학생과 잠시 동안 그의 수학 과외 선생이었던 ‘나’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 속에서 수학 성적이 낮아서 고민하며 수학에 대한 흥미는 물론 공부 자체에 회의를 가지게 된 '겜'에게 시험 과목인 수학을 넘어서 사고를 위한 수학, 생각을 하기 위한 수학을 가르친다. 저자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수학 성적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메타 생각'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수학 성적의 향상에 도움을 주는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그것은 차원이 높은 개념이다. 저자가 ‘겜’에게 간간이 설명하는 사고의 기술, 즉 생각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 뇌의 동작 메커니즘(Mechanism)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저자 역시 이 책이 단순히 '공부의 기술'에 머물기를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겜’은 이상한 수학선생의 설교(?)에 조금씩 포섭(?)이 되어 가지만 종종, 성적 올리는 방법이나 쪽 짚게 예상 문제를 요구한다. 수달(수학의 달인) 선생은 ‘겜’의 요구를 무시(?)하고 생각의 기술만을 설명한다. 친절하게도 생각의 기술이 몸에 익으면 성적도 자연스럽게 오른다고 위로하지만 역시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이다. 그가 숙제로 내주는 문제들 역시 사고를 위한 문제이지 시험 점수를 높이는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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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을 넘어 수학을 넘어서

 

저자가 집필 의도가 어찌하던 간에 요즘 소위 ‘천재인지 둔재인지 가늠하는 문제들(위상수학이라고 해야 하나?)’의 매뉴얼 형식이 되어 그것을 훈련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이 들에게  좋은 구성이 되었다.

 

이 책이 정말 공부의 기술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고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뇌의 기능이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부분은 잘 모르는 이 들은 이 참에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학은 실제로 어렵지만 이 것이 필요한 이유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거나 나중에 수학자, 엔지니어가 되지 않더라고 뇌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뇌의 발전은 용량이 커지거나 세포의 품질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신경과 신경의 연결이 많아지고 다양해지며 신경의 처리 경로가 짧아지고 빨라지는 것이다. 이런 발전에는 수학같이 깊이 있고 종합적인 사고를 요하는 연습이 도움이 많이 된다. 또한 단순히 수식을 잘 계산 해내는 것보다는 새로운 방법, 저자가 예로든 이미지 연상이나 과거의 단상과 지식을 연결하여 사고하면 사고의 폭과 깊이, 즉 뇌의 기능이 더욱 발전한다.

 

그래서 수학을 열심히 하고 문제를 푸는 방법을 다양화하는 것은 성적을 넘어서서 더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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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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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굉장히 유명한 작품이다. 디스토피아(Dis-topia)를 그린 세계대전 시기의 작품으로는 조지오웰의 1984 와 함께 이야기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멋진 신세계’를 읽기 전에 드는 선입견은 헉슬리가 20세기 초, 중반을 살아간 작가이기에 그가 그린 미래는 우리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Block-Buster)에서 보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지는 미래의 모습은 당혹스러운 것이다.

주요 교통수단으로 묘사된 헬리콥터는 이미 개발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작가 알고 있었을 수 있고 고층 건물이나 대륙간 로케트(Rocket)도 충분히 상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포분열 단계에서 특정한 자극을 주어 인간의 모습과 크기, 성격 등을 조절하게 할 수 있다는 상상은 급진적이기 까지 하다.

1984의 조지 오웰이 그랬듯이 헉슬리 역시도 세계대전을 통해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들을 그려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멋진 신세계의 결말과는 다르게 후기의 작가는 젊은 시절에 비해 좀 더 관조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작품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기 바로 전에 1984 를 읽고자 했다. 이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과 평전을 읽은 여파였고 1984년을 읽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보상으로 낯선 작품을 집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편함과 생경한 느낌은 채 5장을 넘기기 전에 현실이 되었다.

멋진 신세계는 어둠 침침한 태아발육(胎兒發育)시설(施設)부터 소개한다. 이 곳이 바로 멋진 신세계 그 곳의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다. 신세계에서는 어떤 사람도 임신(妊娠), 출산(出産)을 할 수 없다. 더욱이 새로운 객체(客體)의 출생(出生)은 사전(事前)에 계획된 인구 량과 각 조직의 필요에 따른다. 신세계 밖에서 온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공장의 생산(生産) 시스템(System)을 연상(聯想)하게 한다.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원시인(?) 존은 이런 시스템에 격분한다. 필자는 이런 시스템을 현재의 식육(食肉) 생산시스템에 비유하고 싶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런 인구 조절 방식은 영화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에서 보여준 크립톤 인들의 실패 사례에서 보듯이 계획에 의한 인구조절과 신생아 제조, 미리 정해진 수요(需要) 에 따라 태아(胎兒) 의 미래(未來)를 조정하는 것, 미래의 다양성을 제거하는데 이는 개인과 사회의 활력(活力)을 거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클립톤 인들은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전혀 진취적(進就的)이지 못하고 심지어 무기력(無氣力)하기까지 하다. 곧 닥칠 행성(行星)의 폭발(爆發) 앞에서도 무기력하게 대응한다. 그 들에게는 새로운 행성을 개척(開拓)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생(營生)을 위해 그런 모든 노력들을 포기한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영생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젊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20대의 젊음을 유지한다. 이런~ 제길!!! 전혀 다행스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인구조절(人口調節)은 그들 사회의 질서유지(秩序維持)에 필수 불가결(不可缺)한 방법이다. 본문에서 총통(總統)이 설명하듯이 같은 레벨(Level)의 사람들이 제한된 구역에 함께 존재하는 경우에 그들 간의 계급투쟁(階級鬪爭)이 벌어져 평화(平和)가 깨진다. 전쟁(戰爭)을 피하기 위해서는 계급질서(階級秩序)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는 바로 안정된 삶에 대한 욕구가 철저히 반영된 세계인 것이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철저한 계급사회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慾求)는 계급사회의 피라미드 하단에 위치하기를 거부하고 계급 사회에는 하부를 안정되게 유지하면서 피라미드가 유지될 자원을 생산할 하층계급(下層階級)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계급에게 필요한 덕목(德目)과 기능(器能)에 따라 철저히 훈련(訓練)된 인간이 필요했다. 이런 완벽히 순종(順從)하는 인간은 자연상태(自然常態)에서는 태어날 수도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 수 없다. 이런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세계의 빌어먹을 정도로 안정된 모습들은 마치 감정을 가진 로봇집단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각 개인의 생각하는 방식까지도 제어(制御)하다 보니 사고를 담당하는 A 플러스 계급까지도 금지(禁地)된 생각을 할 수 없고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세계에서 다섯 명 이내의 총통들만이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총통은 모든 사실을 알고 현명한 판단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의도처럼 그 역시 안정이라는 절대가치 밖의 것은 인정하지 않고 그 가치 안에서 만 가치 판단을 하도록 훈련을 받은 인간일 뿐이다. 그 가치 밖의 것은 그저 지적유희(知的柳僖)에 불과하고 그런 상황은 그와 그의 피지배계층을 구분하는 차이점일 뿐이다.

멋진 신세계의 효율적인 시스템의 실체는 감마계급 노동자들의 겉 모습이 알파계급의 그것과 현저히 다르다는 점에 나타난다. 철저히 세뇌된 그 들 사이에는 이상하지 않은 그것이 다른 세계에서 온 존에게는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주고 반사적으로 뒤집어 버리고 싶을 만큼 추악한 것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서 나타난 멋진 신세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두서 없이 긴 글을 마칠까 한다.

설국열차의 설정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원작(原作)과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탐욕이라는 같은 이유로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진 빙하기(氷河期)에 쉬지 않고 달리는 기차라는 닫힌 공간에서 일어나는 계급투쟁(階級鬪爭)의 이야기이다. 원작과 달리 계급투쟁 부분이 강조된 이유는 영화적 재미 때문으로 보이지만 원작과 동일하게 기차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몸부림을 담고 있다

결국 갈등 해소의 방법은 죽거나 기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고 갈등의 원인인 계급구조(階級構造)가 사실은 닫힌 생태계(生態界)를 최대한 오래 지속 가능케 하는 차악(遮惡)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기차 내의 제한된 공간과 자원으로는 애초에 평등이 일어나기도 어려웠고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특성은 결국 다른 갈등(葛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논리는 가진 자들의 비열한 논리일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가장 냉철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시움은 소수의 부자들이 더 이상 관리하기 어려워진 지구를 떠나 지구 궤도상에 이상적인 주거 환경의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살며 그 들이 방치해 버린 지구의 문제들을 외면하는데 이 문제를 어떤 선택된 이(이런 설정은 마치 이 영화가 영적(靈的)인 문제를 다룬 듯 착각(着角)을 하게 한다.)가 해결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도 닫힌 생태계 문제는 다시 등장하는데 그 가장 현실적(現實的)인 선택은 역시 ‘차악’이었다. 즉 약자와는 거리를 두고 그들을 물성화한 후 양심의 가책(呵責) 없이 철저히 이용하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이가 자신을 희생해서 지구를 구한다는 것으로 끝나는데 인간적으로 눈시울을 적실 만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면 웃기는 발상(發想)이다. 엘리시움을 기술적(技術的)으로 지속성(持續性)을 유지하려면 결국 엘리시움과 지구상에는 더 가혹한 차별(差別)이 생겨야 한다. 그 어마 어마한 세상의 욕구들은 막대한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하고 그래서 부자들은 지구를 그 것으로 이용한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엘리시움의 결말은 엘리시움을 파괴하고 지구를 재건하는 모습이어야 했다.





결코 멋지지 않은 신세계의 실체는 욕망이라는 거대한 괴물 위에 멋진 외관을 씌우고 자랑하는 꼴이다. 늘 행복해 보이는 모습 뒤에는 ‘소마’라는 향정신성 약물 중독이 숨어있고 부지런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한 모습 뒤에는 유전자 조작과 세뇌학습이라는 잔인(殘忍)한 공작이 숨어있다. 총통은 인류가 마치 완벽한 행복에 다가간 처럼 말하지만 신(神)을 버리고 인간을 신의 자리에 올린 그들의 모습은 죽음의 두려움에 미쳐버린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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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의 모든 것 -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만나는 C.S. 루이스의 세계
캐스린 린즈쿡 지음, 김의경 옮김 / 크림슨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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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CS 루이스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교회에서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꽤 유명한 인물이다. 신학자는 아니지만 그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어느 신학자나 종교 지도자 못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나니아 연대기' 보다 그리스도인 CS루이스를 먼저 알았기에 그의 '나니아 연대기'는 좀 엉뚱했다.

 

CS루이스는 최고의 환타지 작가인 J.R.R툴킨와 같이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이 둘은 친한 친구이기도 했기에 아마도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관계는 '반지의 제왕'에 대한 해설에서 알고는 참 신기해 했었다.

 




 

 

우상과 상징

 

나니아 연대기를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동화라고 전제하고 생각해보면 몇 가지 해결하고 넘어가야 문제가 있다. 우선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과 우상을 연상시키는 것들. 그리고 나니아를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며 연대기 내내 이야기를 함께 하는 많은 '말하는 동물'들 이것을 우상이라는 단어로 분류하기는 아주 쉽다. 그러나 조금 더 성숙한 그리스도 인이라면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과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을 우상이라고 하며 특별히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화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신이라 불리는 것들, 온전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것들을 보며 다른 신이라고 하며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자칫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문학에 등장하는 상징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 그 상징에 부여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라고 이름 지어진 어떤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아는 그분과 다르다면 그냥 신이라 부르는 어떤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어떤 초능력을 가진 존재가 나니아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상징이다. 특히 나니아에 등장하는 몇몇 신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징으로 이미 알고 있는 아슬란과 다른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상징으로 이해하는 그리스의 많은 신들처럼 말이다.

 

말을 하고 두 발로 걷는 짐승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동화라는 점을 생각하기 바란다. 이 역시 상징일 뿐이다. 나니아라는 공간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듯이 나니아 인()들도 이브의 자손(인간: 人間)을 처음부터 정상으로 보지 않았다. 심지어 ‘아슬란’까지도 말이다.

 

 

 

유다의 사자

 

그리고 나니아 연대기가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이면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장 필요한 질문은 바로 하나님이 왜 '사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니아인들은 사자가 가장 강하고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연한다.  ‘아슬란’이 사자가 아니면 그 무엇이어야 하냐? 라고도 되묻는다.  CS루이스가 하나님을 사자에 비유한 이유는 성경에서 유래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다의 사자’가 그것이다. 또 삼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자의 시체에서 흐르던 꿀은 예수의 희생을 의미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의미하기 한다.

 

상상해보자 보기만 해도 겁이 난다. 그러나 너무나 위엄이 있어서 그대로 도망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살 다가가 부드럽고 풍성한 황금 빛 갈기에 얼굴을 묻는다. 이 든든한 느낌, 묵직한 신뢰감. 그러나 늘 사자가 말할 때 그의 눈을 바라볼 수는 없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강하고 두렵다.

 

그렇다면 어떤 동물이 이런 상징에 합당할까? 그래 동물 중에서 고르라면 사자가 가장 합당하다. 그런데 왜, 동물의 왕이냐고? 이런 질문을 하지 말자. 나니아 연대기는 동화이다.

 

 

 

 

이 책은 나니아 연대기를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CS루이스가 이해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친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나니아 연대기 중에서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새벽 출정호의 항해' 두 편을 영화로만 보고 원작은 아예 읽어보지 못한 필자는 이 책 곳곳에서 인용하는 구절과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슬란’이 하나님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원작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을까 기대가 된다.

 

아슬란’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과 일대일로 독대(獨對))하는 장면은 필자가 알기 시작한 하나님과 너무나 닮아 있다. 물론 저자가 골자 만 뽑아서 설명한 것이라 원작을 읽으면 더욱 더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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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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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도 아니고 친소세력(親蘇勢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조국이며 한 때 자유주의 진영의 상징이었던 대영제국(大英帝國)에게도 협조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반체제 인사(反體制 人事)까지는 아니어도 주의(主意)을 기울여 지켜봐야 할 인물 중에 하나였다.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던 사람이었다. 동료(同僚)작가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독설(毒舌)은 일관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가사회에서 그나마 그에 대한 평가가 일방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성공작(成功作)인 ‘동물농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유별나게 수십 권의 번역본이 쏟아졌다. 필자가 확인한 바도 올해도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런 유난스런 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자인 조지오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은 특이하다.
조지오웰 평전의 저자는 이 문제의 발단을 조지오웰의 정치적 신념 때문으로 보고 있다. 앞의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한 대로 조지오웰은 ‘사회주의자’ 였고 표면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였다. ‘농물농장’, ‘1984’을 제외한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영국정부에 대한 비판과 영국사회의 부조리를 담고 있고 스페인 참전 이유도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日帝)로부터의 해방(解放)과 한국전쟁(韓國戰爭)을 겪으면서 반공교육이 절실했던 한국 사회의 입맛에 딱 맞는 교육용 자료였지만 정작 그 저자는 빨갱이(?)라 소개 자체가 안되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입장에서도 조지오웰은 구미가 당기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2차 대전 종전 이전까지의 영국의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소련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회주의가 인류발전의 해답(解答)’ 이라는 생각에서였는데 오웰은 스탈린의 독재(獨裁)와 이미 이루어진 ‘피의 숙청(淑淸)’을 예로 들며 소련도 그들이 ‘스페인 시민전쟁(市民戰爭)’에서 겪었던 독재의 다른 얼굴 일뿐이라며 비판(批判)했다. 이 때문에 그의 활동 근간(近間)이던 사회주의 작가들 사이에서도 배척(排斥)을 받았다.
거기다가 오웰은 활동가(活動家)라기 보다는 사색가(思索家)였다. 그의 글 들에서 보여지는 날 선 비판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의 그는 목가적(牧歌的)이며 조용한 시골에서 먹거리를 키우며 생활하는 것을 사랑했다. 
따라서 시류(時流)에 편승(便乘)하는 경향(京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소위 작가 단체들, 출판사(出版社)들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지냈고 교조주의(敎條主義)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그의 삶은 결코 녹녹하지 않았다. 몇 권의 단행본이 꽤 잘 팔렸지만 그의 일생 동안 끼니 걱정을 하며 지냈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것은 그의 말년에 출판된 ‘동물농장’ 덕분이었다. ‘동물농장’은 소련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영국에서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의아해할 이야기이지만 당시 영국의 분위기는 그랬다. ‘동물농장’은 오히려 해외에서 많이 팔렸는데 여기에는 미국무부(美國政府)가 개입하였다는 것이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웰 자신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말년까지도 영국정부의 독단적(獨斷的) 해외정책(海外政策)들을 대해 비판(批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무부가 자신의 책에 대한 해외판권(海外版權)을 사들여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용인(容認)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 사실을 몰랐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해외판(海外版)에 추가되는 작가의 인사말이 우크라이나판(版)에만 있다는 점이다. 

동물농장의 이야기는 ‘볼세비키혁명(革命)’ 과정과 스탈린의 독재에 대한 풍자(諷刺)와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스탈린 정권의 독재성을 비꼬는 우화(偶話)라는 것이다. 돼지들과 이웃 농장주들의 이름표만 바꾸면 여느 (西方陣營)이나 민주국가라는 간판을 건 나라들 또는 어떤 회사나 단체에서도 일어날 (蓋然性)이 충분한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 양보(良輔)하고 배려(配慮)하는 사회는 인간 내면의 욕심 때문에 말 그대로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보여지는 천사의 모습들에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구나!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현대(現代)의 자본주의(資本主義) 국가들도 사회적 약자(弱者)를 보호(保護)하기 위해 정책(政策)의 많은 부분에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주의 성격의 정책을 시행한다. 특히 경제 부분에서는 이미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로 구분된 고전적인 경제이론이나 정책은 이미 사라졌다. 자본주의는 전면 수정되어 소위 수정자본주의(修正資本主義)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의 수정자본주의를 겪고 난 우리는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그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사상(事相)의 문제(問題)를 논(論)하는 시대는 지났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가 확정 되었고 민주자유주의, 자본주의안에도 충분히 사회주의가 녹아 들었다. 이걸 '다원주의(多元主義)' 라고 묶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 조차 무의미하다. 
인간사회에서는 독재가 없을 수 없다. 제국주의, 파시즘 이 전에도 소위 권력의 독재와 그에 따른 불평등(不平等)은 존재 해왔고 현대의 우리는 정보와 돈의 강력한 권력 안에 살고 있다. 이것들은 눈에 덜 뜨면서도 엄청난 독재를 자행할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보에 관해서는 누구나 독재자가 될 개연성은 커졌다. 



이런 시대에 타협을 거부하려던 오웰의 정신은 다시 생각해 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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