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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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도 아니고 친소세력(親蘇勢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조국이며 한 때 자유주의 진영의 상징이었던 대영제국(大英帝國)에게도 협조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반체제 인사(反體制 人事)까지는 아니어도 주의(主意)을 기울여 지켜봐야 할 인물 중에 하나였다.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던 사람이었다. 동료(同僚)작가들 사이에서도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독설(毒舌)은 일관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가사회에서 그나마 그에 대한 평가가 일방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성공작(成功作)인 ‘동물농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유별나게 수십 권의 번역본이 쏟아졌다. 필자가 확인한 바도 올해도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런 유난스런 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저자인 조지오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은 특이하다.
조지오웰 평전의 저자는 이 문제의 발단을 조지오웰의 정치적 신념 때문으로 보고 있다. 앞의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한 대로 조지오웰은 ‘사회주의자’ 였고 표면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였다. ‘농물농장’, ‘1984’을 제외한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영국정부에 대한 비판과 영국사회의 부조리를 담고 있고 스페인 참전 이유도 그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日帝)로부터의 해방(解放)과 한국전쟁(韓國戰爭)을 겪으면서 반공교육이 절실했던 한국 사회의 입맛에 딱 맞는 교육용 자료였지만 정작 그 저자는 빨갱이(?)라 소개 자체가 안되었던 것이라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입장에서도 조지오웰은 구미가 당기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2차 대전 종전 이전까지의 영국의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소련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회주의가 인류발전의 해답(解答)’ 이라는 생각에서였는데 오웰은 스탈린의 독재(獨裁)와 이미 이루어진 ‘피의 숙청(淑淸)’을 예로 들며 소련도 그들이 ‘스페인 시민전쟁(市民戰爭)’에서 겪었던 독재의 다른 얼굴 일뿐이라며 비판(批判)했다. 이 때문에 그의 활동 근간(近間)이던 사회주의 작가들 사이에서도 배척(排斥)을 받았다.
거기다가 오웰은 활동가(活動家)라기 보다는 사색가(思索家)였다. 그의 글 들에서 보여지는 날 선 비판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의 그는 목가적(牧歌的)이며 조용한 시골에서 먹거리를 키우며 생활하는 것을 사랑했다. 
따라서 시류(時流)에 편승(便乘)하는 경향(京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소위 작가 단체들, 출판사(出版社)들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지냈고 교조주의(敎條主義)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그의 삶은 결코 녹녹하지 않았다. 몇 권의 단행본이 꽤 잘 팔렸지만 그의 일생 동안 끼니 걱정을 하며 지냈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것은 그의 말년에 출판된 ‘동물농장’ 덕분이었다. ‘동물농장’은 소련을 비판하는 내용 때문에 영국에서 출판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의아해할 이야기이지만 당시 영국의 분위기는 그랬다. ‘동물농장’은 오히려 해외에서 많이 팔렸는데 여기에는 미국무부(美國政府)가 개입하였다는 것이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웰 자신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말년까지도 영국정부의 독단적(獨斷的) 해외정책(海外政策)들을 대해 비판(批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국무부가 자신의 책에 대한 해외판권(海外版權)을 사들여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용인(容認)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 사실을 몰랐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해외판(海外版)에 추가되는 작가의 인사말이 우크라이나판(版)에만 있다는 점이다. 

동물농장의 이야기는 ‘볼세비키혁명(革命)’ 과정과 스탈린의 독재에 대한 풍자(諷刺)와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스탈린 정권의 독재성을 비꼬는 우화(偶話)라는 것이다. 돼지들과 이웃 농장주들의 이름표만 바꾸면 여느 (西方陣營)이나 민주국가라는 간판을 건 나라들 또는 어떤 회사나 단체에서도 일어날 (蓋然性)이 충분한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 양보(良輔)하고 배려(配慮)하는 사회는 인간 내면의 욕심 때문에 말 그대로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보여지는 천사의 모습들에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구나!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현대(現代)의 자본주의(資本主義) 국가들도 사회적 약자(弱者)를 보호(保護)하기 위해 정책(政策)의 많은 부분에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주의 성격의 정책을 시행한다. 특히 경제 부분에서는 이미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로 구분된 고전적인 경제이론이나 정책은 이미 사라졌다. 자본주의는 전면 수정되어 소위 수정자본주의(修正資本主義)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미 수십 년의 수정자본주의를 겪고 난 우리는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기술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그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사상(事相)의 문제(問題)를 논(論)하는 시대는 지났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가 확정 되었고 민주자유주의, 자본주의안에도 충분히 사회주의가 녹아 들었다. 이걸 '다원주의(多元主義)' 라고 묶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 조차 무의미하다. 
인간사회에서는 독재가 없을 수 없다. 제국주의, 파시즘 이 전에도 소위 권력의 독재와 그에 따른 불평등(不平等)은 존재 해왔고 현대의 우리는 정보와 돈의 강력한 권력 안에 살고 있다. 이것들은 눈에 덜 뜨면서도 엄청난 독재를 자행할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보에 관해서는 누구나 독재자가 될 개연성은 커졌다. 



이런 시대에 타협을 거부하려던 오웰의 정신은 다시 생각해 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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