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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정약전과 그의 동생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단 죄로 끌려와 고초를 겪다 정약종의 죽음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정약전은 흑산으로 가는 유배길에서 지난 날의 일을 되새기면서 그 자신이 먼저 천주교에 대한 설명과 교리를 형제들에게 옮겼지만 정작 순교를 한 사람은 동생인 약종이었고 그 자신은 긍정도, 거부도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그저 동생의 죽음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행운을 맞은 사람이다.
동생인 정약용의 배교와 밀고로 인해서 제일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의 죽음은 그 이후 둘 사이에 금언이 된 말이 되었고, 이는 후일의 일이었다.
흑산_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군진 별장인 오칠구에 의해 다스려졌고 그에 의한 명으로 새로운 유배자가 올시엔 거절할 명도 없는 당연지사로 죄인의 목숨까지 살려먹여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이 있는 곳이었다.
바다와 풍랑, 거친 파도의 세기에 따라서 살아서 돌아온 이도 있고 약전을 받들어 모시는 명을 받은 조씨의 조카되는 순매 또한 그런 사연을 갖고 있는 과부다.
이런 오고가는 사람이라곤 그저 문풍세라 불리는 사공이 젓는 배가 옴에 따라서 육지의 소식을 듣게되는 흑산에서 약전은 황사영의 소식과 더불어서 파도치는 바다를 보면서 그 너머의 세상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희망과 함께 결국은 여기서 생을 마감하겠구나 하는 의심의 여지없는 희망을 저버리게되는 삶의 고난을 연속해나간다.
선왕과 자신의 핏줄이라곤 없는 대왕대비의 자교로 내려진 칙교에 의해서 전국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색출해내려는 과정에서 아전출신의 박차돌의 젓갈장수 행세와 그들의 조직을 타파해야만 자신이 산다는 긴박한 삶의 연속, 점과 점이 모이고 이것이 선으로 이어져 전국적으로 촘촘한 조직망을 이루고 있는 천주교인들의 집합체는 사실상 나라에서도 뿌릴 뽑아내기엔 그 수가 불어나느 추세인지라 나라와 민초간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왕대의 부패한 정치를 타파하려는 모색의 방안으로 받아들인 천주교란 종교가 지닌 힘을 의식한 대결이라고 할 수가 있다.
16살의 나이에 급제한 황사영- 그 자신을 아끼던 왕의 부름을 잊지않고 있던 그에게 처 삼촌들로부터 들은 천주교에 대한 사상과 교리는 맑은 심성을 가진 그에겐 차후의 지금의 세상이 아닌 저 너머 어딘가에 고난의 삶을 이끌어 해결해 줄 누군가가 있단 믿음하에 육손이를 면천해주고 평안 정주의 역참의 마부로 있던 마노리를 소개 받으면서 그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같은 행보를 보이는 행동은 권력핵심으로부터 , 정약용의 배교로 인한 증거로 그를 추적하는 발판이 되어버리는 과정이 약전의 회상속으로 그려진다.
흑산에 묻혀있으면서 장창대란 청년과 함께 고기의 생김새와 새의 생활형태를 관찰하고 그 와중에 순매와의 생활은 또 다른 정씨 가문의 핏줄을 잉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황사영은 마노리가 청에서 만난 구베아주교로 부터 받은 은화가 발각되어 결국은 육손이, 김개동, 그 자신,황사영이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되는 이 소식은 그들이 죽은 후 몇 년후에야 약전의 귀에 들어가게된다.
약전 또한 현산어보라 불려졌던 지금의 우리가 알고있는 자산어보를 집필하게 되고 이는 곧 창대에게 자신의 책 제목을 붙인 연유를 말한다.
"같지 않다.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P338
아마도 약전은 흑산이 지니고 있는 캄캄한 세계보단 그나마 나은 색으로 볼 수있는 어둡고 깊은 심연의 바닷속을 보면서 자신이 비록 순교를 못했을지언정 그 너머의 어딘가에 있을 구원의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하는 구절이다.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의 배경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서양인들의 자발적인 선교에 의해서가 아닌 지식인들 사이에서 오로지 현 정권에 대한 부패와 일반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구축하고자 한 깨어있던 지식인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구하고자 받아들엿단 데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의 바램이 무엇인가?
그저 부역안하고 지나친 노비, 매노의 신세로 전락 안하면서 등 따습고 배 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야 행복을 느끼지않겠나?
이런 의미에서 계급차별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 죄를 짊어진 저 윗 분의 사상은 당연히 그들만이 느낄 수있는 받아들이기에 부담이 없었던 종교가 아니었을까 싶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단순히 자신들의 처지에서 나오는 위의 바램의 소원을 읆는 구절구절마다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는 위의 노래처럼 평민들과 노비들, (강사녀, 궁녀출신인 길길녀, 아리)또 윗 계급인 황사영처럼 진지한 삶에 대한 탐구와 정권에 대한 불만은 비록 여러 박해 사건으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저자는 흑산에 유배된 약전의 시각으로 그 당시의 애환과 자신의 종교관에 대한 자세와 생각을 읽어나갔다.
김 훈 작가의 글은 부드럽지가 않다.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이 작품도 그 작가만의 분위기를 우리가 많이 알고있는 정약용의 시선이 아닌 동생과 같은 배교를 했으면서도 순교의 길을 하지 못했단 생각에 유배지인 흑산에 머물다 생을 마감한 정약전이란 인물에 비추어 당시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한 종교을 가짐에 있어서 순교냐 배교냐를 떠나서 작가는 두 가지의 경우 모두 그 나름대로의 삶에 대한 결정이었고 그 둘을 비교해 비판할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나름대로 읽으면서 추측해본다.
결국 삶을 버리면서 순교한 정약종이나 처조카를 고발하고 배교한 정약용이나, 흑산에 유배되어 또 다른 삶을 이어나간 정약전 , 그들 모두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만 달랐을 뿐 누가 옳고 그른 삶을 살다 갔다고 말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흑산 넘어로 파도치는 그 너머 어딘가에 있을 저 먼 어느 세상을 그리면서 흑산에 서당을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친 정약전의 삶은 그래서 오히려 빛나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