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 - 믿음에 갇힌 여자들
제럴딘 브룩스 지음, 황성원 옮김 / 뜨인돌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저자는 6년간을 중동에 나가 있으면서 그간 자신이 직접 겪었고 가까운 이슬람 여성들을 통해서 , 또는 그 사회에 들어가서 경험했던 일을 엮은 책이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거부당하는 저자- 

이유인 즉슨 남자와 같이 동행을 하지 않았단 점으로 인해서 거부를 당한 것이다.  

언뜻 보면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기도 하는 이 어이없는 상황은 실제이고 현재 이슬람 나라에서 여성들의 지위에  대해서 생각케하는 제도의 한 일부분이다.  

이란은 호메이니의 혁명 후 기존의 샤에 의해서 행해졌던 여러가지 시행된 일들이 일부 후퇴를 당하고 전통의상을 입으면서 생활하는 보수적인 사회로 돌아갔다.  

호메이니의 결정이 그런 것이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런 것이었고, 여성들이 남자들의 축구경기는 비록 아들과 같이 대동한다치더라도 관람 자체가 안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일부다처제의  관습도 실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규정짓지는 않았다는 점, 즉 모든 부인들에게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자라면 허용이 됬단 점, 간통에 의한 돌팔매질도 코란에는 그런 행위가 없다는점, 2대 칼리프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 오늘 날까지 행하여졌단 점에서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작은 부분을 수정해 준다.  

이슬람 특유의 조혼제도로 인한 여성들의 피해현실, 할례에 의해서 출산 때마다 무수한 고통을 겪는 여성들의 현 실태를 꼬집는 현장의 묘사는 이 모든 행위가 이슬람에서 권장한 사항이 아닌 오랜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관습이 이슬람이란 종교가 혼합이 되면서 굳어졌단 점에서도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중동에 위치한 이집트는 비교적 자유로운 여성의 활동이 있는 나라라고 하지만 작가의 비서였던 여성의 말과 행동에서조차도 이슬람의 법도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부국인 사우디에선 아예 여성의 존재 자체는 집 안에서만 있어야하는 존재로 외출시 아들이나 남편, 집안의 남자들과 동행시에만 가능하며 이마저도 얼굴과 손만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가린 천을 덮고서야 가능하다. 

운전 자체가 용납이 안되면서도 대학의 학문과정중엔 운전학과가 있단 사실, 왜냐하면 운전자가 차가 고장났을 경우 이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확인차 필요함이란 말엔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단 생각이 든다.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밸리댄서들의 보존방식은 제쳐두고서라도 그들이 돌연 활동을 중지하고 베일로 돌아간다는 발표는 이 이슬람이란 종교가 어떻게 한 여성이기 전에 사회적으로 한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례를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의 한 아이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을 낳은 엄마, 그리고 사랑에 빠져서 두 번째 부인을 들인 아버지로 부터 이혼의 권유를 받던 엄마가 끝내 친정으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자신의 양육을 빼앗길 위험에 돌부처처럼 평생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고 두 번째 부인과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을 씁씁히 내뱉는 과정은 종교의 힘을 떠나서 인간이 인간이 정한  제도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누굴 위한  정책인가 하는  일부분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함을 준다.  

여성의 선거 자체란 있을 수 없으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한 터키에서 마저도 여성이 정계에 진출하려하자 비판의 소리를 높인점, 다른 나라에선 아예 여성은 대통령 선거에 나올 자격조차 주지않는다는 점, 돌팔매시에 금방 죽이지 않되 서서히 고통을 줘 가면서 죽이는 방법으로서 신체의 한 부분을 공략한다는 점에선 간혹 신문에서 조차도 나오는 기사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단 점에서 종교의 무시한 권력을 새삼 느끼게된다.  

하지만 비단 이런 비관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이란의 라프산자니의 딸이 이슬람 여성들만 출전해서 경기를 이룰 수 있게 도전해 본 이슬람여성 운동경기대회, 전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의 부인인 미국인 출신 누르왕비의 정계활동에 맞춘 여성에대한 정책, 미국에서 공부 하다가 만난 이슬람 남편을 둔 미국여성이 어떻게 자신이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시엄마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과 친정인 미국을 오가면서 절충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일부 불편한 진실을 다소나마 안정을 유지시켜준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일부 진보적인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돌팔매라든가 할례의 관습은 이슬람에서 행하라고 한 적이 없는 일라고 하면서 정작 그들은 그것이 사실은 이슬람 태동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행해왔던 관습이었음을 왜 주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신이 영국에 있을 때 남편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여성의 재판을 보면서 같은 영국인이라도 자신이 겪어 본 중동의 실정을 알지 못하는 한 재판의 결정 상황은 180도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될 수 있단 점에는 문화의 이해와 종교가 세속에 얼만큼의 관여를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한 작가는 성기절제, 은둔생활, 베일 사용만이 여성을 위한 일이 아닌 이것을 행함으로써 여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숨어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극히 제한적인 경우를 두고서도 불평등하며 남편으로 부터 이혼하겠단 말을 세 번 들으면 이혼 성립이 된다는 것 자체가 남녀 불평등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한다.  

오늘 신문을 보니 중동에 이어서 중아아시아 이슬람권에서도 민주화의 바람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정작 서방세계들과 러시아는 전전긍긍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데, 천연가스를 둘러싼 자원의 이해 분배에 있어서 자칫 자국의 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는 점에서란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슬람의 정작 고유한 좋은 교리와 그것에 맞춰서 살아간다면 이처럼 여성이 고통받는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이 시대의 참 설명만으론 좀체 쉽게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단 생각이 들게한다.  

내부의 비판없이는 잘못된 관행자체를 고칠 수 없는 폐쇄된 이슬람이란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삶은 행복해 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투쟁의 무기는 결국 폭탄, 총, 대규모의 검거가 아닌 대화란 말이 입가에 맴도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조선시대의 가풍에 젖어서 열녀문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슬람에 있어서 명예살인이 용납되는 한 여성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성의 지도하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도달할 것이고 이런 고리가 근절되지 않는 한 오늘도 여전히 이슬람의 여성들은 자신의 딸에게까지, 아니 그 이후의 세대까지 결코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생각의차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슬람의경전인 꾸란- 

이 꾸란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성과 남성의 공존시대가 존재 할 수 있을 터인 지금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비록 조그만 시도라 할 지라도 안해본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집힌 여성들만을 위한 제도가 확층되었음 하는 바램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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