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15년 만에 두 번째로 만나는 저자의 소설집-
전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보인 글들이 준 여운이 빛을 발하지만 이 작품 또한 한층 농익은 삶에 대한 시선이 깊어짐을 느낀다.
15편의 두 장에 걸친 아주 짧은 단편이 있는가 하면 중편소설처럼 여길 수 있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된 이번 작품집은 모두 '시간'이란 주제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멕시코와 가까운 텍사스주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화자는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인 중장년 남성들이 화자로 등장한다.
예술계나 대학강사, 아니면 시간타임 일자리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은 자신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위 사람들과의 소통과 인연을 통해서 지나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 회상을 그린다.
흔히 말하는 치기 어린 청춘이라 불리는 20대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실패하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많고 이런 경험을 통해 어떤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만 결혼이나 동거, 자녀가 생기면 나 자신 위주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현실과의 타협을 보다 우선시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는 이런 청춘을 지나온 남성들이 주변에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겪는 외로움과 타인일지라도 내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 감정, 자신들 주위에 영향을 미치고 떠난 사람, 경력에 못 미친 자신의 실력에 좌절하고 오해하는 모습들이 사실적인 일반인들의 모습처럼 다가온다.
또한 자신의 신체 일부가 어떤 병의 징후로 인해 미래 불확실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닥쳐올 것이 분명한 불안에 대비해야 만 하는 감정들이 섬세한 시선으로 동질감 내지는 스스럼없이 다가설 수 있게 하는 글들로 독자들에 마음을 흔든다.
여기엔 '시간'이란 속성이 주는 미련과 아쉬움, 안도감, 때론 흔들렸던 지나온 시절을 마주 보는 것과 다시 미래를 향해 나갈 '시간'이 함께 있다는 것을 유연하게 그린 글들로 인해 가슴에 와닿는 구절구절들이 참 많았다.
아마도 저자 자신도 이 작품집을 출간하면서 그동안 세월의 시간이 준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특히 작품 제목이자 마지막 작품인 '사라진 것들'에서 보인 존재하던 그 누군가의 빈자리가 예고도 없이 닥쳤을 때 몰려오는 감정에 대한 글은 '시간'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 자식을 땅에 묻는 불가해한 과제 앞에서는 인생의 그 어떤 경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눈을 내리깔고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떨렸고 내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사라진 것들)
-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첼로)
-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히메나)
- 나는 그녀도 아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우리는 아주 이상한 이틀을 함께 보냈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 우리는 아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어쨌든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에겐 아직 반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 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사라진 것들)
과거의 찬란했던 것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에 대한 행복감 내지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찰나라는 시간을 보듬어주는 작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