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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바깥은 눈보라가 연일 휘날리는 우랄 지역의 어느 기차역-
모스크바행 기차가 연착으로 이어지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나'는 같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기력한 각각의 모습을 보며 뮌헨의 철학자가 말한 용어인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떠올린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과 다른다는, '처한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명명할 수 있기에’ 그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믿는다.
그렇게 지치도록 기다리다 (존재하지 않는 장소, 끝없이 이어지는 밤, 시간의 갓길로 내던져진 하룻밤-p13) 속에서 음악 소리를 듣는다.
추위 속에 울리는 음악, 그 음악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는 어두운 곳에 피아노 앞에 앉은 한 노인을 보게 된다.
잠깐 한순간에 본 그의 손은 피아노를 치기엔 어울리지 않는 손을 갖고 있었고 익명성으로 만난 그들은 모스크바행 기차가 도착하자 허름한 객실에서 함께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들려주는 이야기, 화자인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음악을 사랑하고 그 음악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갖고 있는 자가 급변하는 체제 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촉망받던 그가 피아노 연주회를 하려던 그때, 공포 속 체제는 전반적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켜버린다.
한 집에서 삼 개월 이상을 살지 못하는 이웃을 보기 쉬웠고 그 자신도 부모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기 직전 탈출을 할 수 있었던 경험을 갖게 된다.
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죽은 병사의 신분인 세르게이 말체프로서 전장에 나가 적과 싸운 일에서 장군의 운전병이 되기까지 그가 격은 세월은 음악과 동떨어진 삶이었다.
하지만 장군의 딸이 피아노를 치고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시간을 통해 잊었다고 생각했던 음악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갈 때 원치 않은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남자,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여인, 전장에서 언제 탄로 날지 몰라 불안에 떨던 감정, 저자는 구 소련 체제에서 음악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부서지고 깨진 파편의 인생의 부침을 베르그란 인물을 통해 그려낸다.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 삶에 익숙했던 그가 그 스스로 피아노 연주를 통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거대한 체제 앞에서 굴복하면 살아갈 수박에 없는 미약한 인간의 형상이 음악이란 매개를 통해 다시 자신의 삶으로 환원되는 이야기를 시적인 감성을 풀어냈다.
오선지 위에 정해진 악보대로 인생의 길을 향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느 순간 미지의 강한 힘에 부딪쳐 다른 악보대로 연주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지녔던 남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외면했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피아노 앞에서 선 순간 본연의 자신을 드러냈을 때의 모습은 미세한 떨림마저 느끼게 한다.
전 작인 '프랑스 유언'이 러시아인으로서 프랑스어를 통해 자전적인 내용으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그렸다면 이번 작품은 구 소련을 배경으로 삶 속에 드리운 지난 기억에 대해 음악과 철학적인 느낌으로 다가서게 한다.
작품 속 화자인 '나'가 듣는 것이 아닌 독자가 베르그 앞에서 듣는 것처럼 다가온 문체의 부드러움과 피아노를 치는 장면 묘사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한 작품, 베르그가 사랑한 음악과 피아노 연주를 듣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