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요새 계속 나에게 사과를 한다. 미안하다. 그 때 너에게 화를 내서 미안하다. 이제 보니 너도 어린 애였는데 나는 니가 아주 큰 앤 줄 알았다. 요즘 같으면 뉴스에나 나올 법한 일도 겪은 적이 있어서 그런 기억 때문에 많이 힘들었었던 건 사실이다. 꼭 사과를 받고 싶다고, 그 때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이렇게 작고 약하고 만지기도 아까운 게 자식이라 더욱 내 엄마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내가 느끼기에 엄마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희생적인 엄마도 아니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를 뒤집는 자식 이기는 부모였다. 안 보고 산건 아니지만, 결혼하고서도 엄마와는 여전히 조금씩 불편하고 삐걱댔다.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억울하다고 투정하는 딸만이 아니라, 남편 땜에 속 썩는 아내도 되고 자식 땜에 밤을 새는 엄마도 되고 먹고 사느라 바쁜 생활인도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그 때의 젊은 엄마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신의진, 정혜신의 책들을 읽었다. 똑똑하고 솜씨 좋고 꿈도 많았던 엄마. 고된 시집 살이를 견디면서도 무너지지 않은 엄마. 남편도 자식도 성에 차지 않아 속 상했을 엄마.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되서 어디에든 분노를 쏟아내고 싶었을 엄마의 손을 잡아 주었다. 더 이상 엄마가 밉지 않았다.

여든을 넘기면서 엄마는 크게 두 번 병원 신세를 졌다. 나도 중년에 들어섰고 엄마의 늙은 몸을 어느 정도 공감할만한 나이가 되었다. 엄마는 전신 마취를 두번 하고는 섬망이 와서 감정 통제가
되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고 공격적이 된 엄마가 감당이 안 될 적도 있었다. 그 때는 가족 모두가 힘들었다. 다들 일을 해야 하니 아버지가 엄마를 돌봤다. 아버지 전화를 받고 야간 퇴근 한 날 잠도 못 자고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의 증세가 곧바로 중증 치매로 진행된 건 아니지만 확실히 예전 같진 않다. 자존심 강한 엄마는 실수 할 까봐 겁내고 눈치 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자꾸만, 나에게 사과를 한다. 그런데, 사과를 받는 내 마음이 불편하다. 늙고 아픈 엄마의 끊임 없는 사과는 뭔가 이생의 짐을 털어놓고 가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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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9-26 12: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프시겠습니다.
이젠 자식들이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들이 닥쳐 저도 지인들 또는 친구들과 연세 드신 부모님 돌봄 이야기들을 자주 하게 되더군요.
모쪼록 힘 내세요~^^

호우 2022-09-26 12:4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강건하던 부모님이 돌봄이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건 역시 서글픈 일인 거 같아요. 이게 삶인가, 싶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기도 하고요~

거리의화가 2022-09-26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요. 저도 어머니가 꽤 오랜동안 미웠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애정이 없다면 그렇게 못견디게 싫은 감정이 생길 수도 없지요. 이제는 그만큼 제가 나이를 먹었고 어머니가 처했던 환경을 일면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함께할 시간이 조금 더 오래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지요.

호우 2022-09-26 13:03   좋아요 2 | URL
애증의 관계!! 맞는 말씀인 거 같아요. 미운 마음만큼 엄마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도 큰 거 같아요. 요즘은 좋은 기억을 만들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바람돌이 2022-09-26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친정엄마가 전화를 하셧어요. 아침 일찍 전화하는 적이 없어서 또 어디 아프신가 가슴이 살짝 쿵 햇는데 용건은 절에 가려고 집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택시가 15분을 기다려도 한대도 안지나간다는 얘기였네요. 일단 살짝 안심하고 카카오 택시 불러드렸습니다.
일상의 작은 곳에서도 부모님들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런데 저렇게 자꾸 옛 일을 사과하시는건 진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터는게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나이가 든다는건 이래 저래 걱정이 또 많아진다는 다른 말인 것 같기도 해요. 힘내세요.

호우 2022-09-26 21:55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저도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 전화가 오면 일단 마음이 덜컹합니다.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요.

blanca 2022-09-26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픈데...어머니 모습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그렇게 사과하시고 받아들이는 이 과정이 참 특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식에게 사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는 부모들보다 어쩌면 더 성숙하신 모습 같기도 하고요.

호우 2022-09-26 21:58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자식한테는 사과 할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들도 많지요. 끝끝내 화해하지 못 하고 떠나는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더라구요. 그래서 이 특별한 과정을 잘 겪어야 겠어요. 자식이지만 부모이기도 한 저에게도 성숙해지는 경험이 되겠지요.

프레이야 2022-09-28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우 님 힘드시겠어요. 가족 모두 힘내시고 어머니도 잘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섬망이 오면 본인도 그렇지만 가족이 힘들어요. ㅠ 잘 관리하셔서 오래 곁에 계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돌봄이 필요한 엄마!

호우 2022-09-28 20:2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프레이야님. 댓글 감사합니다. 섬망은 괜찮아지셨지만 예전같진 않으시네요. 자식이 나이가 드니 부모도 돌봄이 필요해집니다. 이게 삶인가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