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꿈 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취미 생활에 푹 빠진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취미 공간을 갖고 싶어한다. 대부분 현실의 제약 때문에 공상만 하다 말지만. 이 책을 쓴 평론가 김갑수는 마포 한 구석 지하실에 취미를 향유할 공간을 만든다. 그게 ‘줄라이홀‘이라 이름 붙인 그의 작업실(이라고는 해도 거기서 딱히 창작 활동을 하는 건 아니란다)이다. 한 가지에 꽂히면 그것만 들입다 파는 사람이 김갑수다. 커피에 맛들여서 온갖 원두와 머신을 섭렵하고, 커피맛이 잘 나올 때까지 열 몇 잔을 들이마시다 토악질을 하는 미련한 사람. 3만장의 LP를 소장하고 버는 돈을 족족 오디오 장비 구하는데 탈탈 털어 쓰는 사람. 요 몇 년새 종편에 나오는 것도 오디오질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책은 그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취미 편력기이다. 커피와 오디오, 그의 취미는 이 두 가지인데 둘 다 철저한 아날로그다. 근 10년 전에 쓰여진 책인데도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을 만치 트렌디하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 이 취미들이 외려 트렌디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해도 커피와 오디오를 즐기는 그의 집요하고 극단에 가까운 태도가 참 재미있다. 또한 글쟁이답게 갖은 인문학적 지식을 취미와 엮어내는 재주가 좋다. 문체도 레트로 해서 아저씨 냄새가 풀풀 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절반은 재미있고 나머지 반은 그저 그런 책이었다.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를 다룬 파트는 신나게 읽었지만, 오디오, 특히 클래식을 다룬 파트는 영 흥미가 붙지 않았다. 나이 들면 재즈가 좋아지다가 결국 클래식으로 정착한다는데 그것도 사람 취향 나름인가 보다.
이 책의 컨셉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하다. 세계 곳곳의 가족들이 일주일 동안 먹는 식재료나 음식을 죄다 꺼내어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 누군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면 된다는 말처럼, 이 가족들이 먹는 음식은 그 나라의 현실을 반영한다.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 영양과다로 비만에 시달리는 나라, 패스트푸드의 습격으로 전통 음식의 설 자리가 사라져 가는 나라... 그 나라의 식문화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변화와 이슈, 시민들의 생활상 또한 예리하게 잡아낸 책이다.사진작가 남편과 작가 아내의 공동 취재로 만든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사진의 놀라운 힘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만 가지 단어보다 사진에 찍힌 인물의 눈빛과 그 순간의 풍경이 훨씬 더 독자의 마음에 깊은 각인을 새긴다. 필름과 디지털이 반반 섞인 사진들을 풀컬러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건강한 채식주의가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지고선이라고 주장하는 게 나같이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내는 공사장에서 일한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보잘것 없는 사내. 어느 날 그에게 갑작스레 어머니의 죽음이 찾아온다. 어머니를 수습하고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던 아들과 집으로 돌아온 그는 차가운 고통에 시달린다. 사내는 마침내 고통의 해묵은 원인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간 애써 피해 왔던 복수를, 정의를 실현하러 그는 아들과 함께 낡아빠진 봉고를 타고 길을 떠난다.레너트 코페트가 지은 전설적인 야구의 聖書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제목을 따온 소설이지만, 작가의 말대로 ‘이것은 야구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홈플레이트를 떠나 낯선 길 위에 선 아버지와 아들의 소시민적 로드무비이자, 동생을 잃은 남자의 트라우마와 모진 복수, 그리고 화해와 귀환에 대한 이야기다. 토끼를 닮은 부자는 늙은 거북이처럼 여기저기 고장난 승합차에 몸을 싣고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그들은 흙탕물 섞인 급류 마냥 거센 운율의 문장을 타고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변주한다. 이 소설에서 김경욱은 조금 독특한 작법을 동원한다. 그는 앞 단락에서 등장한 단어를 곧바로 끄집어내 집요하게 쫓는다. 마치 복수를 위해 추적에 나선 사내처럼. 그리고 그 단어를 이용해 오래된 스웨터에서 올을 뽑아내듯 이야기를 술술 만들어낸다. 실마리가 되는 단어들의 절묘한 배치와 정교한 연결로 인해 이야기는 쉴 틈도, 끊기는 법도 없다.1980년의 광주에서 시작된 사내의 이야기는 잠실야구장에서 끝을 맺지만, 야구가 늘 그렇듯 ‘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칼을 품은 사내와 나침반을 간직한 아들은 청산가리를 버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
러시아 10월 혁명을 다룬 르포르타주의 고전 중의 고전. 이 책을 통해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수없이 많은 좌파 세력들 사이에서 어떻게 볼셰비키가 혁명을 성공시켰는지를 보고 있자면 역시 인생 뿐만 아니라 역사도 타이밍인듯 하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바로 그 때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무장봉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우경화된 임시정부와 부르주아지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극도로 억압받던 노동자, 농민 세력에 의해 혁명은 촉발되었겠지만 그 시기는 한참 뒤였을 터. 역사의 흐름은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확신하지만, 이렇게 탁월한 개인이 변곡점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리고 놀라운 건 이렇게 엄청난 혁명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혁명의 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의 적백 내전, 스탈린의 숙청, 독소전에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점에서 10월 혁명은 순수한 열정과 혁명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낸 지극히 드문 사건이 아닐까 싶다. 저자 존 리드가 좀더 오래 살아서 러시아 적백 내전도 기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그간의 김영하 단편집 가운데서도 특별히 길이가 짧다. 두 세 페이지 가량의 엽편소설도 네 편이나 실려 있다. 비록 그 길이는 짧지만 장편에서 볼 수 있는 김영하 특유의 매력적인 상황/구도 설정은 여전하다.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를 납치하다시피 동해안으로 끌고 온 대학원생, 백화점 좀도둑을 잡으러 다니는 비위 경찰, 연쇄살인마에게 가족을 잃고 아버지의 유산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 여대생 등등. 그런데 정작 김영하는 이렇게 흥미로운 플롯을 짜 놓고는 갑자기 이야기를 툭 끝내 버린다. 어찌 보면 레이먼드 카버 스럽기도 한데, 카버 보다는 긴장이 좀 느슨한 편이지만 뒷이야기가 참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책을 다 읽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한 번 상상해 보라는 뜻일까. 중편이었으면 더욱 멋졌을 하나하나의 소재들이 아깝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