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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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물이라고들 한다. 흔히들 인간의 사유가 말과 글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지만, 이 감옥은 쉼없이 분열하고 복제하며 변이한다. 이런 면에서 언어는 진화론적 존재다. 8, 90년대의 TV 자료 화면을 유튜브로 다시 볼 때면 그들이 쓰는 단어와 어투가 그렇게 생경할 수 없다. 고작 30~40년 사이에도 이만치 바뀌었는데, 수 백년 시간의 지층에 퇴적된 언어는 대체 어떠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 책은 언어의 지층을 파내고 먼지를 털어내어 단어의 계보를 추적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영단어와 관용구들의 유래가 무엇인지,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는지 밝힌다. 마치 화석 발굴을 통해 생물의 진화 과정을 나열하여 보여줄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절대 학술적이거나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무척이나 가볍고 유쾌한 책이다. hotdog가 어떻게 만들어진 단어인지, papillon과 pavilion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의 rolling stone은 구르는 돌이 맞는지, ‘The buck stops here‘는 대체 어디서 온 말인지. 이 책을 보면 이런 소소잡다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책은 짧은 챕터 수 십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어에 대한 책이니 만큼 첫 챕터는 ‘book‘과 관련된 단어들을 파헤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언어는 끝없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라고 웅변하듯 한 챕터의 끝과 다음 챕터의 시작이 곧바로 이어진다. 다소 억지스럽게 연결되는 챕터들도 없잖아 있지만, 여섯 다리만 건너면 세상 모든 사람과 아는 사이가 된다는 케빈 베이컨의 법칙처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단어들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런 고로 이 책의 제목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라고 짓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book‘에서 시작한 이 책은 수많은 단어와 숙어와 관용어구를 돌고 도는 기나긴 여행을 거쳐 다시 ‘book‘으로 돌아온다. 자기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전설 속의 뱀 우로보로스처럼, 저자는 언어가 영원히 생성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이 모든 걸 차치하고,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싶다. 위키백과의 링크를 끝없이 타고 들어가길 즐기는 나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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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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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을 다루는 책들은 각자 고유한 서술 방법이 있다. 독소전 전반을 주욱 따라가는 책(<독소전쟁사>). 스탈린과 히틀러 두 독재자에 초첨을 맞추는 책(<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특정한 전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군인이나 민간인들의 증언에 의지하는 책(<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등.

그 중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었다. 상상하기 조차 힘든 거대한 규모로 사람을 갈아넣은 비정한 전쟁의 수레바퀴를 처절하게 묘사한 명저인데, 책을 읽는 내내 복잡미묘한 다양한 감정을 느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꽤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동프로이센 나머지 지역은 소련군의 복수에 무방비 상태였다. 독일 주민에게 가해진 대접을 숨길 수 없다. 전쟁 초기에 자행된 일련의 야만 행위들이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1944년 10월에 점령한 첫 마을들에서 병사들이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강간하고 고문하면서 주민들을 살육했다. 피난민들은 포격과 폭격을 당하고 진격하는 탱크 궤도 밑에 깔렸다.˝

전쟁 말기, 불리했던 전세를 극적으로 뒤집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며 마침내 나치 독일의 영토까지 밀고 들어간 ‘대조국전쟁‘의 붉은 군대 병사들은 숭고하기만한 영웅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불타고 전리품을 탐하며 색욕에 눈이 뒤집힌 악귀가 그네들의 일면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 대목을 짧게 묘사하고 넘어갔지만, 그전까지 보여준 붉은 군대의 영웅 서사에 흠집을 내기 충분했다. 이 대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러고서 10년 넘게 지나서야 <베를린 함락 1945>를 찾아냈다. 이 책은 붉은 군대가 독소전 종반에 독일 영토로 진입하여 베를린으로 신속히 진격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 앤터니 비버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출간한 이후 주영 러시아 대사에게 받은 당혹스러운 대접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만큼 이 책은 소련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서 행했던 갖은 만행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중상모략으로만 치부하고 있다. 고결하고 숭고한 붉은 군대가 200만명 이상을 강간하고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걸 러시아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테니까.

위에서 언급한 여러 책을 통해 나치가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저지른 끔찍한 악행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군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학살과 강간, 약탈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복수의 겉껍질을 쓰고 있었을 뿐, 소련군이 독일 점령지에서 벌인 행태는 인간의 원초적인 추악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였다. 최전선에서 싸운 선봉 부대보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2선 부대의 전쟁 범죄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 독일에 강제로 끌려간 러시아 여성들이나 해방된 유태인들도 강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 책은 또한 히틀러의 오만한 어리석음이 수많은 국민들을 어떻게 사지로 몰아넣는지를 잘 보여준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도 베를린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피난시킬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벙커에 들어앉아 극적인 역전을 꿈꾸었다. 연합군이 자기들과 손잡고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실 이건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는데, 의심이 지독하게 많았던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이 소련을 견제하는 도구로 독일을 이용할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독일의 패망이 확실해진 시점에도 괴링과 힘러, 보어만 등은 히틀러의 뒤를 이어 제국의 지도자가 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범 재판을 받고 자살하거나 도피 과정에서 살해되는 최후를 맞는, 비참한 죽음의 운명이었는데도 말이다.

판데모니움이라고 해도 좋을 이 가공할 만한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고 또 한없이 고결해질 수 있는가를 실증하는 무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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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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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든 술을 마신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기쁜 일이 있어서, 슬픈 일이 있어서. 그네들은 기어코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그래서 이 에세이집의 제목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술꾼들의 그럴 듯한 핑계 같다. 하지만 정지아, 그녀의 삶을 가만 들여다 보면 꼭 핑계 만은 아닌 듯 하다.

학창 시절 부터 빨치산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아버지는 투철한 혁명 전사였지만 농사에는 젬병이었다. 당연히 생활이 넉넉했을 리 없다.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에 열심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빨치산 활동을 다룬 첫 책 때문에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국보법 위반으로 수배를 당한다. 3년을 그렇게 숨어 살다 자수해서 집행유예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모교에 출강을 하고, 아동소설을 쓰고... 그러다 예순 가까운 나이에 자전적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정지아. 평생의 친구인 술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오랜 시간을, 그토록 힘들었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닥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원체 천성이 낙천적이어서인지, 술이 사람을 푸근하게 만들어서인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술에 얽힌 에피소드 만으로 삼 백 페이지가 넘는 에세이를 써내려면 그녀의 삶에 수많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을 터.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을 그녀는 툭툭 가볍게 풀어낸다. 술 한 잔으로 털어내 버릴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 앞에서도, 칼에 베일 듯 날카로운 야쿠자 앞에서도 그녀는 기죽지 않는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좋은 술이니까. 입에 맞는 술만 있다면 그녀는 당당하다. 특히 그게 조니워커 블루라면!

이 책을 통해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발자취를 좇았던 그녀의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사회주의자의 이상을 따라 평생을 살려고 노력했던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전남 구례 시골 마을에서 조니워커 블루에 탐닉하는 딸에게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딸이 큰맘 먹고 선물한 시바스 리갈을 소주 한 짝과 맞바꿔 먹는 아버지답게 ‘양놈들 술은 금테두리라도 둘렀다냐?‘라고 지청구를 놓았을까? 아니면 고등학생 딸이 친구들과 밤새 매실주를 홀짝이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대범한 유물론자답게 ‘지 하고 자픈 대로 하게 냅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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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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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 클래리사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조는 요즘 잘 나가는 과학 칼럼니스트로 몇 권의 베스트셀러 과학 도서의 저자이면서, 정기적으로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TV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클래리사는 영국의 요절한 천재 시인 존 키츠를 연구하는 아름답고 유능한 영문학 교수이다. 둘은 런던 북부의 고급 아파트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클래리사의 안식년이 끝나고 귀국하던 날, 조는 클래리사를 공항에서 맞아 교외로 함께 피크닉을 간다. 숲에 도착해 준비해온 와인과 음식을 꺼내는 순간, 조의 눈에 저 멀리서 집채만한 열기구가 서서히 추락하는 게 보인다. 열기구 쪽으로 본능적으로 뛰어간 건 조 혼자가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다섯 명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열기구로 뛰어갔으니까. 추락한 열기구 안에는 열 살 남짓한 소년이 타고 있었고 열기구 조종사- 소년의 할아버지였다 - 가 필사적으로 열기구의 공기를 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불운하게도 그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소년을 구하려던 사람들은 열기구의 밧줄을 단단히 붙잡아 다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지만,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모두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공중에 띄워지고 말았다.

누구였을까. 맨 먼저 손을 놓은 사람은. 훗날 조는 그게 자기가 아닐까 자책했지만, 조였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다. 이타적인 동기로 모인 여섯 명이었지만 자신의 목숨과 생판 모르는 소년의 목숨을 저울질하여 선택하는 건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이가 있었다. 의사이면서 산악구조 봉사 활동을 하는 건장하고 온화하며 정의로운 이, 존 로건. 그는 열기구가 100미터 상공에 올라갈 때까지 밧줄에 매달려 버텼지만 인간은 중력을 이길 수 없다. 끝내 추락하여 충격적인 죽음을 맞은 그를 보며 나머지 다섯 명은 큰 충격을 받는다. 운명은 얄궂은 것이다. 열기구에 타고 있던 소년은 정신을 차리고 열기구를 조종하여 무사히 착륙했으니까.

조의 인생은 이때부터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하지만 독자가 예상하는 바와 같이 사건의 비극성 때문만은 아니다. 현장의 여섯 명 중 하나, 제드 페리 때문이다. 로건의 시체를 살피러 간 조에게 페리는 끈질기게 함께 기도하자고 간청한다. 사실 조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조가 기도를 거절하면서 페리가 조를 스토킹하기 시작했으니까.

조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페리는 끊임없이 조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자동응답기로 돌려놓자, 이젠 조의 집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조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흡사 종교에 가까운 사랑을 말이다. 페리가 조에게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고, 흐느끼고, 급기야 화를 내는 장면은 섬찟하다. 페리는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온 거예요. 목적은 당신 안에 있는, 그리고 당신과 한몸인 그리스도께로 당신을 이끌기 위해서요. 그게 바로 사랑의 선물이예요. 아주 간단하죠?˝

페리가 단단히 미쳤다고 결론내린 조는 페리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페리가 조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담당 경사의 말에 조는 좌절한다. 과학 칼럼니스트답게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뒤져 공부한 끝에 조가 내린 결론은 페리가 전형적인 ‘드클레랑보 증후군‘ 환자라는 것이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이런 것이다. 영국의 조지 5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은 53세의 프랑스 여성의 사례가 있다. 그녀는 버킹엄 궁전 앞에서 조지 5세를 기다렸다. 궁전 창문의 커튼이 움직이면 조지 5세가 자신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런던의 모든 이들이 그녀가 조지 5세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의 숙소 예약을 막고 짐을 훔쳐갔다고 주장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환자는 자기보다 훨씬 높은 지위의 사람과 애정어린 소통을 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믿으며, 그 사람이 먼저 사랑에 빠져 자기에게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조의 말을 믿지 않은 건 경찰 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 클래리사도 조가 지나치게 예민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페리가 전화를 한 것도 듣지 못했고, 페리가 아파트 앞에 잠복하고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애정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이다. 조는 페리 때문에 자기 신변을 위협받고 있는데, 자기의 연인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 사랑은 차갑게 식다 못해 갈라지고 있었다. 사랑과 믿음을 잃어가는 조는 급기야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고 있으면 과연 페리라는 인물이 실재하는지, 미친 건 페리가 아니라 조가 아닌지 독자도 클래리사처럼 의심의 늪에 빠지게 된다. 스릴러는 아니지만, 스릴러의 문법을 적절히 이용하는 특기를 여러 작품에서 발휘해온 이언 매큐언 답게 <견딜 수 없는 사랑>도 긴장의 끈을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 비극은 그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일상에 연쇄적인 상흔을 남긴다. 조는 ‘견딜 수 없는 사랑’에서 벗어나 클래리사와 함께 행복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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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오늘날의 세상을 만든 6가지 혁신
스티븐 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프런티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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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년 전 우리에겐 스마트폰이 없었다. 50년 전엔 PC가 존재하지 않았고, 80년 전엔 원자력 발전을 알지 못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손끝을 스치는 조그만 상처에도 감염으로 죽을 수 있었다.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까. 150년 전에는 밤을 밝히는 전구가 없어서 인류의 생활패턴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치면 불과 다섯 세대 만에, 그러니까 나의 5대조 할아버지만 해도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대로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How we got to now?

인류의 문명을, 지금의 세상을 만든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은 불, 전기, 반도체, 인터넷 등을 꼽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이 책을 쓴 스티브 존슨은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여섯 가지 기술 혁신에 주목한다. 유리, 냉기, 소리, 청결, 시간, 빛이 그것이다.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든, 미시사의 관점에서든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여섯 가지를 소재로 저자는 이른바 ‘롱 줌 역사‘를 기술한다. ‘롱 줌‘ 역사를 스티브 존슨은 ‘고막을 때리는 음파의 진동부터 대중의 정치적 운동까지 어떤 사건을 다각도로 한꺼번에 조사함으로써 역사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럼 이 책의 첫번째 주제, 유리를 보자. 2천 6백만년 전의 뜨겁기 그지 없는 리비아 사막에서 이산화규소 알갱이들이 녹아서 뭉쳐져 커다란 유리조각이 만들어졌다. 1만년 전 쯤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들은 이 유리를 가져다 서아시아 지역에서 유통시켰고, 로마제국 시대엔 이미 유리 제품이 일상을 장식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 메흐메트2세에게 함락당한 후, 그곳의 유리 장인들은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극히 투명한 현대적인 유리를 발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맑은 유리는 렌즈의 탄생을 가능케 했고 이 렌즈는 곧 안경이 되었다. 그 시절엔 원시(遠視)인 사람이 많았지만, 보통 사람은 글자를 읽을 일이 드물었으므로 불편없이 살았다.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고 출판물이 쏟아지면서 안경의 수요가 폭증했다. 렌즈는 또한 망원경으로 진화한다. 망원경이 있어 갈릴레오가 목성을 관찰하고 태양계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지동설을 주장할 수 있었다. 유리에서 비롯한 망원경이 중세적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낸 것이다.

20세기 들어 유리는 섬유로 진화한다. 유리를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유리 섬유로 단열재, 옷, 항공기 등 온갖 곳에 적용된다. 그러나 유리 섬유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용도는 바로 광섬유(fiber optics)다. 가느다란 유리 섬유로 빛을, 즉 데이터를 전달하게 되면서 인류의 지식 전파 속도는 비길 데 없이 빨라졌다.

유리의 또다른 용도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유리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인류에게 자의식이 싹트게 된다. 그러면서 비로소 개인은 집단에서 해방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거울이 르네상스의 발화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르네상스를 탄생시킨 한 가지 요소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보잘것없는 이산화규소 덩어리가 인류의 자의식을 깨우고, 거대한 세계관의 전복을 이뤄내고, 엄청난 지식의 축적과 전달의 매개체가 되었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의 관점에서는 쓸 가치가 없었던 유리를 스티브 존슨의 ‘롱 줌‘ 역사 관점에서 비추어 보면 인류 문명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된다. 스티브 존슨이 이 책에서 다루는 나머지 다섯 개의 주제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나, 기술의 혁신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를 이 책만큼 독특한 통찰력으로 설명하는 책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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