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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 오늘날의 세상을 만든 6가지 혁신
스티븐 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프런티어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시간을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년 전 우리에겐 스마트폰이 없었다. 50년 전엔 PC가 존재하지 않았고, 80년 전엔 원자력 발전을 알지 못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손끝을 스치는 조그만 상처에도 감염으로 죽을 수 있었다.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니까. 150년 전에는 밤을 밝히는 전구가 없어서 인류의 생활패턴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치면 불과 다섯 세대 만에, 그러니까 나의 5대조 할아버지만 해도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대로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How we got to now?
인류의 문명을, 지금의 세상을 만든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은 불, 전기, 반도체, 인터넷 등을 꼽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이 책을 쓴 스티브 존슨은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여섯 가지 기술 혁신에 주목한다. 유리, 냉기, 소리, 청결, 시간, 빛이 그것이다.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든, 미시사의 관점에서든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여섯 가지를 소재로 저자는 이른바 ‘롱 줌 역사‘를 기술한다. ‘롱 줌‘ 역사를 스티브 존슨은 ‘고막을 때리는 음파의 진동부터 대중의 정치적 운동까지 어떤 사건을 다각도로 한꺼번에 조사함으로써 역사의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럼 이 책의 첫번째 주제, 유리를 보자. 2천 6백만년 전의 뜨겁기 그지 없는 리비아 사막에서 이산화규소 알갱이들이 녹아서 뭉쳐져 커다란 유리조각이 만들어졌다. 1만년 전 쯤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들은 이 유리를 가져다 서아시아 지역에서 유통시켰고, 로마제국 시대엔 이미 유리 제품이 일상을 장식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 메흐메트2세에게 함락당한 후, 그곳의 유리 장인들은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극히 투명한 현대적인 유리를 발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맑은 유리는 렌즈의 탄생을 가능케 했고 이 렌즈는 곧 안경이 되었다. 그 시절엔 원시(遠視)인 사람이 많았지만, 보통 사람은 글자를 읽을 일이 드물었으므로 불편없이 살았다.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고 출판물이 쏟아지면서 안경의 수요가 폭증했다. 렌즈는 또한 망원경으로 진화한다. 망원경이 있어 갈릴레오가 목성을 관찰하고 태양계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지동설을 주장할 수 있었다. 유리에서 비롯한 망원경이 중세적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어낸 것이다.
20세기 들어 유리는 섬유로 진화한다. 유리를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유리 섬유로 단열재, 옷, 항공기 등 온갖 곳에 적용된다. 그러나 유리 섬유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용도는 바로 광섬유(fiber optics)다. 가느다란 유리 섬유로 빛을, 즉 데이터를 전달하게 되면서 인류의 지식 전파 속도는 비길 데 없이 빨라졌다.
유리의 또다른 용도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유리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인류에게 자의식이 싹트게 된다. 그러면서 비로소 개인은 집단에서 해방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거울이 르네상스의 발화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르네상스를 탄생시킨 한 가지 요소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보잘것없는 이산화규소 덩어리가 인류의 자의식을 깨우고, 거대한 세계관의 전복을 이뤄내고, 엄청난 지식의 축적과 전달의 매개체가 되었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의 관점에서는 쓸 가치가 없었던 유리를 스티브 존슨의 ‘롱 줌‘ 역사 관점에서 비추어 보면 인류 문명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된다. 스티브 존슨이 이 책에서 다루는 나머지 다섯 개의 주제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나, 기술의 혁신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를 이 책만큼 독특한 통찰력으로 설명하는 책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