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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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 클래리사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조는 요즘 잘 나가는 과학 칼럼니스트로 몇 권의 베스트셀러 과학 도서의 저자이면서, 정기적으로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TV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클래리사는 영국의 요절한 천재 시인 존 키츠를 연구하는 아름답고 유능한 영문학 교수이다. 둘은 런던 북부의 고급 아파트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클래리사의 안식년이 끝나고 귀국하던 날, 조는 클래리사를 공항에서 맞아 교외로 함께 피크닉을 간다. 숲에 도착해 준비해온 와인과 음식을 꺼내는 순간, 조의 눈에 저 멀리서 집채만한 열기구가 서서히 추락하는 게 보인다. 열기구 쪽으로 본능적으로 뛰어간 건 조 혼자가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다섯 명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열기구로 뛰어갔으니까. 추락한 열기구 안에는 열 살 남짓한 소년이 타고 있었고 열기구 조종사- 소년의 할아버지였다 - 가 필사적으로 열기구의 공기를 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불운하게도 그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소년을 구하려던 사람들은 열기구의 밧줄을 단단히 붙잡아 다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지만,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모두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공중에 띄워지고 말았다.

누구였을까. 맨 먼저 손을 놓은 사람은. 훗날 조는 그게 자기가 아닐까 자책했지만, 조였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다. 이타적인 동기로 모인 여섯 명이었지만 자신의 목숨과 생판 모르는 소년의 목숨을 저울질하여 선택하는 건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이가 있었다. 의사이면서 산악구조 봉사 활동을 하는 건장하고 온화하며 정의로운 이, 존 로건. 그는 열기구가 100미터 상공에 올라갈 때까지 밧줄에 매달려 버텼지만 인간은 중력을 이길 수 없다. 끝내 추락하여 충격적인 죽음을 맞은 그를 보며 나머지 다섯 명은 큰 충격을 받는다. 운명은 얄궂은 것이다. 열기구에 타고 있던 소년은 정신을 차리고 열기구를 조종하여 무사히 착륙했으니까.

조의 인생은 이때부터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하지만 독자가 예상하는 바와 같이 사건의 비극성 때문만은 아니다. 현장의 여섯 명 중 하나, 제드 페리 때문이다. 로건의 시체를 살피러 간 조에게 페리는 끈질기게 함께 기도하자고 간청한다. 사실 조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조가 기도를 거절하면서 페리가 조를 스토킹하기 시작했으니까.

조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페리는 끊임없이 조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자동응답기로 돌려놓자, 이젠 조의 집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조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흡사 종교에 가까운 사랑을 말이다. 페리가 조에게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고, 흐느끼고, 급기야 화를 내는 장면은 섬찟하다. 페리는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온 거예요. 목적은 당신 안에 있는, 그리고 당신과 한몸인 그리스도께로 당신을 이끌기 위해서요. 그게 바로 사랑의 선물이예요. 아주 간단하죠?˝

페리가 단단히 미쳤다고 결론내린 조는 페리를 경찰에 신고하지만, 페리가 조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담당 경사의 말에 조는 좌절한다. 과학 칼럼니스트답게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뒤져 공부한 끝에 조가 내린 결론은 페리가 전형적인 ‘드클레랑보 증후군‘ 환자라는 것이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이런 것이다. 영국의 조지 5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은 53세의 프랑스 여성의 사례가 있다. 그녀는 버킹엄 궁전 앞에서 조지 5세를 기다렸다. 궁전 창문의 커튼이 움직이면 조지 5세가 자신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런던의 모든 이들이 그녀가 조지 5세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의 숙소 예약을 막고 짐을 훔쳐갔다고 주장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환자는 자기보다 훨씬 높은 지위의 사람과 애정어린 소통을 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믿으며, 그 사람이 먼저 사랑에 빠져 자기에게 접근했다고 주장한다.

조의 말을 믿지 않은 건 경찰 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 클래리사도 조가 지나치게 예민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페리가 전화를 한 것도 듣지 못했고, 페리가 아파트 앞에 잠복하고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애정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이다. 조는 페리 때문에 자기 신변을 위협받고 있는데, 자기의 연인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다. 사랑은 차갑게 식다 못해 갈라지고 있었다. 사랑과 믿음을 잃어가는 조는 급기야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읽고 있으면 과연 페리라는 인물이 실재하는지, 미친 건 페리가 아니라 조가 아닌지 독자도 클래리사처럼 의심의 늪에 빠지게 된다. 스릴러는 아니지만, 스릴러의 문법을 적절히 이용하는 특기를 여러 작품에서 발휘해온 이언 매큐언 답게 <견딜 수 없는 사랑>도 긴장의 끈을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 비극은 그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일상에 연쇄적인 상흔을 남긴다. 조는 ‘견딜 수 없는 사랑’에서 벗어나 클래리사와 함께 행복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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