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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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을 다루는 책들은 각자 고유한 서술 방법이 있다. 독소전 전반을 주욱 따라가는 책(<독소전쟁사>). 스탈린과 히틀러 두 독재자에 초첨을 맞추는 책(<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특정한 전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 군인이나 민간인들의 증언에 의지하는 책(<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등.

그 중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었다. 상상하기 조차 힘든 거대한 규모로 사람을 갈아넣은 비정한 전쟁의 수레바퀴를 처절하게 묘사한 명저인데, 책을 읽는 내내 복잡미묘한 다양한 감정을 느꼈었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꽤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동프로이센 나머지 지역은 소련군의 복수에 무방비 상태였다. 독일 주민에게 가해진 대접을 숨길 수 없다. 전쟁 초기에 자행된 일련의 야만 행위들이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1944년 10월에 점령한 첫 마을들에서 병사들이 젊은 여자든 늙은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강간하고 고문하면서 주민들을 살육했다. 피난민들은 포격과 폭격을 당하고 진격하는 탱크 궤도 밑에 깔렸다.˝

전쟁 말기, 불리했던 전세를 극적으로 뒤집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며 마침내 나치 독일의 영토까지 밀고 들어간 ‘대조국전쟁‘의 붉은 군대 병사들은 숭고하기만한 영웅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불타고 전리품을 탐하며 색욕에 눈이 뒤집힌 악귀가 그네들의 일면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 대목을 짧게 묘사하고 넘어갔지만, 그전까지 보여준 붉은 군대의 영웅 서사에 흠집을 내기 충분했다. 이 대목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러고서 10년 넘게 지나서야 <베를린 함락 1945>를 찾아냈다. 이 책은 붉은 군대가 독소전 종반에 독일 영토로 진입하여 베를린으로 신속히 진격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 앤터니 비버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출간한 이후 주영 러시아 대사에게 받은 당혹스러운 대접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그만큼 이 책은 소련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직까지도 러시아는 붉은 군대가 독일 땅에서 행했던 갖은 만행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중상모략으로만 치부하고 있다. 고결하고 숭고한 붉은 군대가 200만명 이상을 강간하고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걸 러시아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테니까.

위에서 언급한 여러 책을 통해 나치가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저지른 끔찍한 악행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군이 복수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학살과 강간, 약탈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복수의 겉껍질을 쓰고 있었을 뿐, 소련군이 독일 점령지에서 벌인 행태는 인간의 원초적인 추악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였다. 최전선에서 싸운 선봉 부대보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2선 부대의 전쟁 범죄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 독일에 강제로 끌려간 러시아 여성들이나 해방된 유태인들도 강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 책은 또한 히틀러의 오만한 어리석음이 수많은 국민들을 어떻게 사지로 몰아넣는지를 잘 보여준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도 베를린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피난시킬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벙커에 들어앉아 극적인 역전을 꿈꾸었다. 연합군이 자기들과 손잡고 소련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실 이건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는데, 의심이 지독하게 많았던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이 소련을 견제하는 도구로 독일을 이용할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독일의 패망이 확실해진 시점에도 괴링과 힘러, 보어만 등은 히틀러의 뒤를 이어 제국의 지도자가 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범 재판을 받고 자살하거나 도피 과정에서 살해되는 최후를 맞는, 비참한 죽음의 운명이었는데도 말이다.

판데모니움이라고 해도 좋을 이 가공할 만한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삼 대단해 보인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고 또 한없이 고결해질 수 있는가를 실증하는 무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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