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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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들은 무슨 핑계를 대서든 술을 마신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기쁜 일이 있어서, 슬픈 일이 있어서. 그네들은 기어코 모여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그래서 이 에세이집의 제목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술꾼들의 그럴 듯한 핑계 같다. 하지만 정지아, 그녀의 삶을 가만 들여다 보면 꼭 핑계 만은 아닌 듯 하다.

학창 시절 부터 빨치산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아버지는 투철한 혁명 전사였지만 농사에는 젬병이었다. 당연히 생활이 넉넉했을 리 없다.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에 열심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빨치산 활동을 다룬 첫 책 때문에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국보법 위반으로 수배를 당한다. 3년을 그렇게 숨어 살다 자수해서 집행유예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모교에 출강을 하고, 아동소설을 쓰고... 그러다 예순 가까운 나이에 자전적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정지아. 평생의 친구인 술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 오랜 시간을, 그토록 힘들었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닥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원체 천성이 낙천적이어서인지, 술이 사람을 푸근하게 만들어서인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술에 얽힌 에피소드 만으로 삼 백 페이지가 넘는 에세이를 써내려면 그녀의 삶에 수많은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을 터.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을 그녀는 툭툭 가볍게 풀어낸다. 술 한 잔으로 털어내 버릴 수 있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 앞에서도, 칼에 베일 듯 날카로운 야쿠자 앞에서도 그녀는 기죽지 않는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좋은 술이니까. 입에 맞는 술만 있다면 그녀는 당당하다. 특히 그게 조니워커 블루라면!

이 책을 통해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발자취를 좇았던 그녀의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사회주의자의 이상을 따라 평생을 살려고 노력했던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전남 구례 시골 마을에서 조니워커 블루에 탐닉하는 딸에게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딸이 큰맘 먹고 선물한 시바스 리갈을 소주 한 짝과 맞바꿔 먹는 아버지답게 ‘양놈들 술은 금테두리라도 둘렀다냐?‘라고 지청구를 놓았을까? 아니면 고등학생 딸이 친구들과 밤새 매실주를 홀짝이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대범한 유물론자답게 ‘지 하고 자픈 대로 하게 냅두‘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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