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 - 우리 몸 안내서
빌 브라이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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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이 이번에 택한 주제는 바로 우리의 “몸”이다. 그는 과학사(‘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영어의 역사(‘발칙한 영어 산책’), 사회사(‘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에 이어서 신체에 대한 백과전서를 만들어 냈다. 빌 브라이슨의 저서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위의 백과사전 류의 박학다식을 뽐내는 책들과 여행기(‘발칙한 유럽산책’, ‘나를 부르는 숲’ 등) 류가 그것이다. 어찌됐든 두 종류의 책 모두 대단히 재미있고 또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가볍게 술술 읽을 수 있다는 건 이 두꺼운 책이 지닌 큰 미덕이다. 어차피 이런 류의 책에서 심오한 진리를 얻으려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살짝 자극하고 순간의 놀라움을 주는 지식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지금 나열하는 종류의 지식들 - 뇌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 없이 일정한 속도로 하루에 400 칼로리를 소모한다, 코코넛 기름은 건강에 좋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액체 형태의 포화지방에 불과하다, 겨울잠과 잠은 다른 것이며 곰은 사실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 뉴욕의 30세 흑인 남성은 방글라데시의 30세 남성보다 사망할 확률이 높은데 이는 마약이나 폭력 때문이 아니라 뇌졸중, 심장병, 암, 당뇨병 때문이다 등등 - 이 가득 차 있는 이 매력적인 책을 그냥 지나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인체를 다루는 이 책은 필연적으로 의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류의 평균 수명을 극적으로 늘린 수많은 선각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취제를 개발하고, 항생제를 발명하고, 각종 위생 수칙을 수립하고, 다양한 수술 기법들을 고안한 사람들. 인류에 대한 그들의 공헌에 걸맞은 영광을 얻은 이들도 있지만 얄궂은 운명으로 비극적인 말년을 맞은 이들도 많았다. C’est la vie!

거대한 화학 기계인 동시에 전자 장치인 인간의 신체는 아직도 탐험할 것이 무수히 남은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역설한다. 우리의 존재는 경이 그 자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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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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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에드워드 윌슨이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저서 <사회생물학>을 출간했을 때 그가 학계에서 받은 비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동물을 비롯한 인간의 제반 행동이 환경보다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이 68세대의 영향이 아직 가시기 전인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생물학이 감수해야 했던 무수한 공격들이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 의거하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동료 학자들에게서! 고생물학계의 슈퍼스타인 스티븐 제이 굴드(리처드 도킨스의 맞수로도 유명하다)와 리처드 르원틴은 윌슨의 이론이 우생학과 파시즘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하버드에서는 연일 윌슨의 퇴진 운동이 벌어졌고, 윌슨은 강연 도중 물세례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 사태의 문제는 과학 이론을 학문적 허점을 가지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마녀사냥을 했다는 데 있다. 과학은 그 자체로 가치 중립적이다. 자연과학에 이념과 윤리의 문제를 갖다 붙이는 것은 종교적 신념으로 지동설을 부정하는 중세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짓이다. 핵폭탄이 문제가 된다고 원자물리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가? 물론 연구 방법의 윤리적 문제는 - 731 부대의 생체 실험 같은 - 당연히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과학 그 자체는 이념과 윤리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충분히 좋은 책이다. 김승섭이 전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보여줬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구조적 불합리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선 조금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과학적 연구를 이념의 색안경을 통해 검증하려 든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우리 사회와 우리 몸에 스며든 사회적 차별과 소외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비판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에 너무 경도되어 모든 것을 하나의 단일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다른 위험을 낳는다.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심장병 증상을 호소할 때, 의사가 여성보다 남성을 관상동맥질환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는 논문을 가지고 의사가 성별에 따른 편견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선 할말을 잃었다.

에드워드 윌슨이 비난받던 시대에는 인종과 성별로 인한 차별을 타파하자는 진보적 색채가 미국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때문에 인간은 유전적 요인 보다 후천적 환경과 교육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다. 그렇지 않다면 인종과 성별로 인한 계급적 차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테니까. 이런 풍조가 심해지다 보니, 연쇄살인범도 환경의 영향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으며 적절한 교육을 통해 교화할 수 있다고 심리학자들이 확신할 지경이었다.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연쇄살인범이 옥중에서 자서전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형이 경감되어 풀려나자마자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황당한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모든 문제를 하나의 이념과 시선으로만 재단하려 하면 종국엔 극단적 교조주의에 이르게 됨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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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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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의 이야기.

김연수의 예전 작품 <꾿빠이, 이상>이 시인 이상을 소재로 했다면, 최신작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인 백석의 삶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일곱 해의 마지막>은 잘 알려진 일제 시대 백석의 행적을 다루지 않는다. 백석은 북에서 시 창작이 아닌 번역가로 살았는데 (백석은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를 능숙하게 썼으며, 그 중 가장 못하는 게 일본어였다고 한다. 참고로 백석은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불어 온 우상화 비판과 해빙의 바람을 타고 다시 시를 쓰게 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이렇게 백석이 다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1957년부터, 그의 ‘시에는 문학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북한 문단에서 숙청되어 멀고 먼 삼수로 떠나 생활하는 1963년까지의 7년 간을 다룬다.

엄혹하기 그지 없는 체제 하에서 시인으로서의 영혼을 숨기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조선작가동맹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한 소련 시인 벨라에게 자신이 그 동안 몰래 써온 시 묶음을 건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싶었던 걸까. 그 시들은 기막힌 우연으로 인해 백석이 나중에 삼수로 추방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백석은 북에서 제대로 숨이나 쉴 수 있었을까?

백석의 시를 읽어보면 거개가 평화로운 고향의 정경을 배경으로 토속적인 것들, 순하고 여린 것들에 대한 애정을 담뿍 느낄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삭막하고 냉랭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언제 어떤 이유로 숙청당할지 모르는 숨막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는 서툴지만 삼수에서 양을 치고 농사짓는 게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비록 거기서도 시인의 영혼은 어두운 골짜기에 버려야 했지만.

지금까지의 김연수 소설은 대체로 근대를 배경으로 할 때 찬란히 빛을 발했다는 느낌이다. 내가 김연수 소설 중 최고로 치는 <밤은 노래한다>가 그랬고,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그랬다. 그런데 이 <일곱 해의 마지막>은 조금 결을 달리한다. 소설적 재미는 위 두 작품에 미치지 못하나, 시인으로서의 삶이 죽어버린 백석이 느꼈을 법한 절대적인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먹먹한 체념의 감정을 눈에 보이듯 그려낸다.

다음의 대목이 이 작품의 백미가 아닐까 한다. 숙청당한 백석이 삼수로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던 혜산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만난 서희가 백석의 시를 읊을 때, 백석은 지금의 세상과 자신이 평화로이 공존할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제 시는 자신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불행과 시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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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더클래식 한국문학 컬렉션 1
김승옥 지음 / 더클래식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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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읽어야 할텐데‘ 하고 괜히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드는 책들이 있다.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그러한데, <무진기행>도 예전부터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불편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 중 하나였다. 한국 단편문학의 최고봉,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 칭송이 자자한 작품이 바로 <무진기행>이니까.

그래서 읽어 보았다. 역시 문장 만큼은 정말 빼어나다. 마치 60년대 한국영화 대사 톤 같은 이질감이 들지만, 근 6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문장들이 넘쳐난다. <무진기행> 뿐만 아니라 같이 수록된 <생명연습(生命演習)>, <확인해본 열다섯개의 고정관념> 같은 단편들을 읽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염소는 힘이 세다>는 마치 김소진의 단편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유일하게 계급과 가난의 폭력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리라. 60년대에 쓰여진 김승옥의 소설 속 하층민들의 삶이 90년대 김소진 단편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건, 그동안의 개발우선주의 경제가 소외 계층의 삶의 질에는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것만 놓고 보면 김승옥이 사회의식 있는 작가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염소는 힘이 세다>가 꽤 이질적인 작품인 것일 뿐,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런 시대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수록된 단편을 전부 읽고 나서는 ‘김승옥은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마구 뒤섞여 있는 작가‘라는 감상이 떠올랐다. 문체와 시대 배경은 근대적이고, 개인의 상실과 일탈을 다루는 주제의식은 탈근대적이나, 여성을 바라보는 작가 김승옥의 시선은 지극히 전근대적이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 <서울의 달빛 0장>에서 드러나는 그의 여성관은 경악할 만한 수준이어서, 요즘 같았으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매장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돋보기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본 것일 뿐, 그가 처음 등장했던 60년대 초반엔 현저한 탈근대성으로 동시대인들을 무장해제 시켰을 법하다.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을 들었던 김승옥은 당시 문학의 미래 그 자체였을 테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읽기엔 조금 진부하고 어색하며, 고전 특유의 고졸한 맛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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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 3 (반양장) - 쇠퇴와 멸망 비잔티움 연대기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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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1세 이후 700년, 제국은 시들어가기 시작한다. 몇몇 뛰어난 황제들의 뛰어난 기재와 수완으로 그 수명을 이어갔으나, 잇달아 등장하는 호적수들을 이겨내기는 벅찼다. 노르만, 시칠리아, 베네치아,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까지. 거기에 4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국에 큰 상처를 남겼다. 오스만 투르크에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어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제국은 400여년을 더 지속하였으나 그 나날들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수십 년간 제국이 갈기갈기 찢기는가 하면, 황제가 직접 서유럽 국가들에 병력과 자금을 구걸하러 다니고, 국고가 텅 비어 베네치아에 제관을 저당잡히기도 하고, 오스만 술탄의 가신이 되어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제국의 마지막은 처연하고 장엄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젊고 야심찬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로 마음먹고 10만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온 1453년. 천년 넘게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1만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원군도 없이 외롭게 싸워 겨우 45일을 버틴다. 제국 최후의 날, 당대 최고의 화포장이 만든 초대형 대포를 앞세워 성벽을 허물고 오스만 투르크의 최정예부대 예니체리가 밀고 들어온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는 잠시 몸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신하들의 간언을 뒤로 한 채, 홀로 칼을 들고 싸움터로 몸을 날려 장렬히 전사한다. 잔인하고 난폭한 메흐메트 2세의 성격상, 항복하더라도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을테니 팔라이올로구스는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것일테다.

서유럽 제국들이 비잔티움을 도와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냈다면, 지금의 유럽과 서아시아의 정치적·지리적 지형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터키가 지금의 위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발칸반도의 갈등도 그토록 참담한 지경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전 유럽이 홍역을 앓고 있는 이슬람 난민 문제도 그렇고. 과거의 대가를 유럽은 두고두고 치르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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