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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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온갖 작가들의 찬사를 받는 것인지. 전업 소설가도 아닌 인도 사회운동가의 데뷔작이자 현재로서는 유일한 소설이 어떻게 빛나는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라헬과 에스타, 일곱 살 난 두 쌍둥이 남매. 그들의 엄마 암무. 외삼촌 차코. 외할머니 맘마치. 외고모할머니 베이비 코참마. 아예메넴에 사는 이들 일가족의 이야기.
이 책은 40페이지 남짓한 첫 챕터에서 주요 사건을 모두 보여준다. 쌍둥이들의 영국인 사촌, 아홉 살 짜리 소피 몰이 영국에서 아예메넴으로 놀러왔다 물에 빠져죽는다. 차코의 공장에서 일하는 불가촉천민 벨루타는 암무와 사랑을 나누다 들켜서 죽는다. 에스타는 억지로 아빠인 바바에게 보내지고, 쌍둥이들은 23년이 지나서야 재회한다. 암무는 그 사이 젊은 나이에 타지에서 천식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나머지 400페이지에선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놀라운 작가적 역량이 발휘된다. 이미 벌어진 사건을 향해 사건이 일어나기 까지의 경과를 종이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설명하고 묘사하며 교묘하게 과거와 현재 시점을 넘나든다. 소피 몰과 벨루타의 죽음을 제일 앞에 드러내 놓고도 작가는 끌과 정으로 주변부를 공들여 조각해 나간다.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살아온 삶과 그들의 시선, 그들의 생각, 그들의 행위를 ‘작은 것‘까지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무심코 읽었던 단어 하나도 나중에 다시 등장해 제 뜻을 드러내기 때문에, 이 책을 읽다보면 앞 장을 다시 들춰보아야 할 일이 잦다.
사회운동가이지만 인도의 사회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쓴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소설 곳곳에서 인도에 내재된 불합리와 문화의 충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례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연인이었던 암무와 벨루타는 말도 안 되는 카스트 제도 때문에 비극을 맞게 된다. 그들은 ‘누가 사랑받아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사랑의 법칙‘을 어겼기에.
이 소설의 또 다른 뛰어난 점은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비유와 시적인 묘사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문장이 밀림처럼 빽빽하게 뇌리에 박힌다. 이런 문장들. ˝ 유난히 등에 털이 빽빽한 차가운 나방 한 마리가 가볍게 라헬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나방의 얼음 같은 다리가 닿자 소름이 돋았다. 라헬의 부주의한 마음에 여섯 개의 소름이 돋아났다.˝
궁금증이 들었다. 이토록 먹먹하고 가슴아린 이야기 속의 ‘작은 것들의 신‘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작가는 대답하지 않지만, 암무와 벨루타의 이야기가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을 시작할 때부터 파멸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던 두 연인은 본능적으로 ˝작은 것˝에 집착한다. ‘잎사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어설픈 애벌레에,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뒤집어진 딱정벌레에, 강에서 늘 벨루타를 찾아내어 물곤 하는 작은 물고기 한 쌍에‘ 그들은 집착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미래도 없는 그들이기에.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그런 작은 것들이기에.

이제 온화한 반달 같은 주름이 눈 아래 자리잡았고 그들은 암무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나이가 들었다. 서른 하나.
늙지도 않은.
젊지도 않은.
하지만 살아도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

유난히 등에 털이 빽빽한 차가운 나방 한 마리가 가볍게 라헬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나방의 얼음 같은 다리가 닿자 소름이 돋았다. 라헬의 부주의한 마음에 여섯 개의 소름이 돋아났다.

천천히 돌아가는 천장의 선풍기가 겁에 질린 탁한 공기를 가르자, 바람은 끝없이 벗겨지는 감자 껍질처럼 바닥으로 천천히 둥글게 떨어졌다.

소각로의 철문이 올라가자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의 낮은 웅웅거림이 붉은 포효가 되었다. 열기가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뒤 라헬의 암무는 먹이가 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그녀의 피부,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키플링을 인용해서 애정을 표현하던 방식, 우리는 한 핏줄이다, 너와 나. 그녀의 굿나이트 키스. 한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단단히 잡고(뺨은 눌리고 입은 물고기 같아진) 다른 손으로 머리 가르마를 타고 빗질을 해주던 방식. 라헬이 다리를 넣을 수 있도록 속바지를 들고 있던 방식. 왼다리, 오른 다리. 이 모든 것이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졌고 짐승은 흡족해했다.

마거릿 코참마의 작고 질서있는 생활은, 따뜻한 몸이 차가운 바다에 들어갈 때처럼 헉 소리조차 못 낸 채, 참으로 기괴한 이 난장판에 자리를 내주었다.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밤비. 밴드의 다른 동료들이 모두 자러 간 후 연습하는 외로운 드러머.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거미를 선택했다.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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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7-10-2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사 두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독서가님 리뷰를 읽고 나니 당장 읽고 싶어 졌어요. :-)

지하철 독서가 2017-10-21 18:09   좋아요 0 | URL
이야기 자체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어보이지만, 이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는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 같아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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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해변의 카프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하루키 작품이니 7~8년 쯤 된 듯. 오랜만에 본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였다. 내면의 어두운 심연을 응시하기, 관계의 급작스러운 단절과 상실, 현실과 초현실의 모호한 경계. 하루키 소설의 표면적 특징들은 다 갖고 있으나 중후반부부터 급격히 지루해지는 소설이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똑같은 말을 계속 정리, 반복하니 그럴 수 밖에. 또한 많은 분량을 할애한 하이다, 그리고 시로의 에피소드가 결국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에 느끼는 허탈함도 이 작품에 대한 실망에 일조한다. 하루키가 의도한 맥거핀이라 해도 대체 무슨 의도인지 잘 짐작되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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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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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시를 연구하는 양 교수가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진다. 그의 제자, 대학원생이자 예비 사위인 주인공 완지안은 대학의 당서기인 펭잉의 명령으로 매일 오후 입원한 양 교수를 간병하게 된다. 존경받는 학자였던 양 교수는 의식을 회복한 후 부터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평소의 그답지 않은 난폭한 언행을 일삼고, 문혁 때 홍위병들이 부르던 혁명가를 불러제끼고, 누군지 모를 여자와 야한 이야기를 시시덕거리다가도, 가끔은 지식인다운 통찰과 반성의 소리를 내뱉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양 교수의 맥락없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인공 완지안이 짜깁기해가는, 추리소설 같은 일상이 진행된다.
때는 1989년. 중국의 1989년이라면 누구나 천안문 사태를 연상하겠지만, 이 소설의 중반부까지 천안문사태는 그저 틀어놓은 라디오 마냥 흐릿한 배경으로만 등장한다. 작가 하 진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계기가 천안문 사태임을 고려하면 참으로 놀라운 절제가 아닐 수 없다. 추리소설 같던 전개는 교수와 주인공을 둘러싼 학내의 음모가 명확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천안문 사태를 다루게 된다. 단편적인 뉴스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천안문 사태가 사실 5.18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학살이었다는 걸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작가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담론으로 다루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사소한 동기 하나하나가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라고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광인˝인 양 교수의 말을 통해 주인공이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달아가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추리소설이자 성장소설, 동시에 역사소설이기도 한데, 루쉰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날카로운 품격도 함께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속에 난해한 문장이 단 한 개도 없다는 건 작가의 문학적 천재성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자신이 내가 받는 고난만 한 가치가 없는 존재는 아닌지 두려울 뿐일세."

우리 스승의 정신 상태는 이제 부서진 금고와 같았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귀중품은 모두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버렸다.

내 눈에는 중국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식들을 잡아먹는 노쇠한 미치광이 노파로 보였다. 만족할 줄 모르는 노파는 전에도 많은 아이들을 잡아먹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살과 피를 먹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잡아먹을 게 분명했다. 이 끔찍한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하루 종일 혼잣말을 했다. "중국은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캐야!"

나는 개인적인 동기들이 정치 행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메이메이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베이징으로 돌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이유에 근거해 혁명에 가담한 것이었다.(...) 개인을 움직이고 따라서 역사의 동력을 일으키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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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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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짧은 하룻밤의 이야기를, 당사자가 아닌 누구에게도 놀랍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이 이야기를 한 권의 가슴 아린 소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이언 매큐언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는 늘 그렇듯 메스로 사람의 마음을 헤집는 듯한 예리한 심리 묘사를 통해, 등장 인물들의 오해와 갈등을 집요하고 섬세하게 끄집어낸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익히 알기 때문에,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이 소설을 읽을 때에도 잔뜩 긴장하게 된다. 정신적 로맨스에서 에로스로의 전환, 그 경계에서 두 연인이 각자 마주치는 불안과 내적 갈등을 그만의 탁월한 문체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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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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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이전 작들은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이 책은 참 심드렁하다. 여행기 장르의 고전들(열하일기, 서유기, 돈키호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스인 조르바, 걸리버여행기)을 리뷰하여 ‘길‘을 탐구해 보겠다는 발상은 좋았으나, 그런 주제를 감당하기엔 저자의 역량이 모자라다는 느낌이었다. 극단적이고 제멋대로 튀는 논리 전개 때문이기도 했고, 고전 여행기들에 대한 잘 공감되지 않는 해석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데나 역학과 한의학을 끼워 넣는 것도 못마땅하고. 어떤 대목에선 사이비의 냄새마저 나는 것 같았다. 또한 평생 글을 써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글의 리듬이 방정맞고 조악하다. 자기 딴에는 신선한 글쓰기라 생각할지 모르겠으나(물론 처음 고미숙의 책을 접했을 땐 신선했었다), 50대 아저씨가 억지로 스키니진을 입은 것 마냥 낯뜨겁다. 틈만 나면 대책없이 ˝유목민˝과 ˝자유˝를 찬양하는 것도 사유의 깊이가 얕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그리고 제발 글 쓸때 이모티콘은 뺐으면 한다. 젊게 보이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민망하다.

저것이 바로 중생의 실상이 아닌가. 이런 중생도 구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승이라 할 수 있을터, 저팔계도 갈 수 있다면 대체 누군들 가지 못하겠는가.(...) 온갖 추태를 저지르고 갖은 망신을 다 겪으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라. 탐욕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구도 또한 ‘원초적 본능‘이다! 그런 점에서 저팔계야말로 ‘민중의 영웅‘이 아닐지.

길이란 장애와 번뇌를 마주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힘을 길어 올려 다시 한걸음을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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