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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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국 고대 시를 연구하는 양 교수가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진다. 그의 제자, 대학원생이자 예비 사위인 주인공 완지안은 대학의 당서기인 펭잉의 명령으로 매일 오후 입원한 양 교수를 간병하게 된다. 존경받는 학자였던 양 교수는 의식을 회복한 후 부터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평소의 그답지 않은 난폭한 언행을 일삼고, 문혁 때 홍위병들이 부르던 혁명가를 불러제끼고, 누군지 모를 여자와 야한 이야기를 시시덕거리다가도, 가끔은 지식인다운 통찰과 반성의 소리를 내뱉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양 교수의 맥락없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인공 완지안이 짜깁기해가는, 추리소설 같은 일상이 진행된다.
때는 1989년. 중국의 1989년이라면 누구나 천안문 사태를 연상하겠지만, 이 소설의 중반부까지 천안문사태는 그저 틀어놓은 라디오 마냥 흐릿한 배경으로만 등장한다. 작가 하 진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계기가 천안문 사태임을 고려하면 참으로 놀라운 절제가 아닐 수 없다. 추리소설 같던 전개는 교수와 주인공을 둘러싼 학내의 음모가 명확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천안문 사태를 다루게 된다. 단편적인 뉴스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천안문 사태가 사실 5.18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학살이었다는 걸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작가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담론으로 다루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사소한 동기 하나하나가 역사를 추동하는 힘이라고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광인˝인 양 교수의 말을 통해 주인공이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달아가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추리소설이자 성장소설, 동시에 역사소설이기도 한데, 루쉰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날카로운 품격도 함께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속에 난해한 문장이 단 한 개도 없다는 건 작가의 문학적 천재성을 증명해주는 또다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나는 내 자신이 내가 받는 고난만 한 가치가 없는 존재는 아닌지 두려울 뿐일세."

우리 스승의 정신 상태는 이제 부서진 금고와 같았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귀중품은 모두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버렸다.

내 눈에는 중국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식들을 잡아먹는 노쇠한 미치광이 노파로 보였다. 만족할 줄 모르는 노파는 전에도 많은 아이들을 잡아먹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살과 피를 먹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잡아먹을 게 분명했다. 이 끔찍한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하루 종일 혼잣말을 했다. "중국은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캐야!"

나는 개인적인 동기들이 정치 행위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메이메이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베이징으로 돌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이유에 근거해 혁명에 가담한 것이었다.(...) 개인을 움직이고 따라서 역사의 동력을 일으키는 것은 개인적인 관심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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