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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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치하의 가장 큰 비극이자 사법 정의가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렸던 무참한 굴욕, 인혁당 사건. 1974년 당시 유신 정국 하에서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 갖은 고문을 자행하여 피고들로부터 자백을 끌어내고 이를 근거로 대법 판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피고와 변호인, 피고 가족들과 종교인, 사회운동가, 심지어 앰네스티의 항의까지 철저히 묵살했다. 대법 판결 하루 만에 사형을 집행하는, 희대의 사법 살인을 저지른 박정희의 만행은 국제적으로도 거센 역풍을 맞아 정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단초가 된다.

이 책의 주인공, 강순희 여사는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인 우홍선 씨의 부인이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유시민 선생을 통해 인터뷰 구술집을 내게 된 건 뜻밖에도 남편의 명예를 되살리고자 함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를 몸소 살아낸 본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함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북에서 학교를 다니다 남으로 넘어와 한국전쟁을 겪은 후, 피난 온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다 남편을 만나 짧은 연애 후 결혼하기까지. 그리고 구속된 남편을 옥바라지 하면서 구속자 가족들과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구명운동을 펼치고, 끝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의 여사님의 인생 여정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인혁당 사건이 아니다. 강순희 여사의 강인하고 당당한 삶의 태도다. 어렸을 적부터 부당한 것은 참지 못하고 똑똑히 따지는 성격이었던 강순희 여사는 인혁당 사건을 맞아 남편의 구명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당당했다. 형사들이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깔보지 못하도록 멋진 원피스를 입고 선글래스를 끼고 경찰서로, 중정으로 출두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못 현대적이다. 서슬퍼렇던 모진 시절, 형사들이 윽박질러도 전혀 기죽지 않고 되레 큰소리로 받아치던 그녀는 가히 걸크러시의 원조라 할 만하다.

국가 폭력에 의해 남편이 속절없이 떠난 후에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딸 셋과 아들 하나를 잘 키워낸 여사의 남다른 정신력에 감탄한다. 마흔 둘에 남편을 여의고 예순 여섯 노인이 되어서도 남편이 그리워 남편 묘 근처에 살고 싶어 집을 옮긴 로맨티스트. 보통 사람이라면 제정신으로 살아내기 어려울 법한 그녀의 삶을 지탱한 건 자식도 아니고 종교도 아닌,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무 여한 없는 삶을 살았다는 그녀. ‘신랑도 잘 만났고, 사랑도 잘 했고, 남편 일로 싸울 때도 잘 싸웠’다는 그녀. 남편과 첫 데이트한 그날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그녀. 그래서 강순희 여사는 말한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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