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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잔혹사 - 약탈, 살인, 고문으로 얼룩진 과학과 의학의 역사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4월
평점 :
과학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예전에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에서 최재천 교수의 스승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에게 벌어진 일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1970년대, 윌슨은 ‘생물의 사회적 행동은 좀 더 많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내용의 사회생물학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를 출간한 후 큰 곤욕을 치렀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며 그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고 생각했던 좌파 지식인들은 일제히 그를 공격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나치가 우생학의 토대로 진화론을 차용했던 것과 진배없다고 말이다.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오롯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목적에서만 비롯된다면, 지금의 불평등 - 성차별, 인종차별, 빈부격차 등 - 이 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학문에 대해 비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윌슨에게 가해진 건 사회적 테러였다. 재직하던 하버드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협박이 빗발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로부터 물리적인 위협을 받고, 저명한 진화생물학자들(스티븐 J. 굴드, 리처드 르윈턴)에게 공개적인 조롱을 당했다. 그의 이론이 우생학처럼 오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그러나 결국엔 윌슨의 이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졌고, 오히려 지금은 스티븐 J 굴드의 이론은 사장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나치가 진화론으로 우생학을 정당화했다고 해서 진화론이 잘못된 이론인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고 해서 핵물리학을 발전시키지 말았어야 하나? 과학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인 수단일 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느냐가 문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전히 과학에 대한 내 판단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 책 <과학 잔혹사>에 등장하는, 그릇된 방법으로 과학을 연구하고 사용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황우석의 예를 봐도 그렇듯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연구는 과학적으로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비윤리적으로 난자를 채취하여 생명 복제를 연구한 황우석은 자기 이론에 결과를 끼워 맞추려고 논문을 조작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 또한 비록 그 의도가 선했을 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서서히 도덕의식이 마비되어 마침내 파멸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생물 탐사를 위해 해적질을 한 사람도 있고, 해부학을 연구하기 위해 도굴된 시신을 사들인 의사도 있었다. 미국 흑인들이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유라고 일컬어지는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 마을에서의 매독 연구는 비윤리적 실험의 교과서를 보는 듯 하다. 이 책의 원제 ‘Icepick Surgeon’은 전두엽절제술을 발명한 신경학자 월터 프리먼을 일컫는데, 그는 얼음송곳을 정신질환자의 안와에 찔러넣어 전두엽을 휘젓는 수술 방식을 개발하여 난폭한 환자들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라는 명석하지만 예민한 학생을 그 유명한 테러리스트 유나바머로 만들어 버린 심리적 고문도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에 의해 연구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이 책에서 소개한 아인슈타인의 말이 인상깊다. “많은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이 지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인성이다.” 이에 대해 저자 샘 킨은 이렇게 해석한다. ‘… 과학은 세계에 대해 추론하는 사고 방식이자 과정이자 방법으로, 우리의 희망 사항과 편견을 드러내고 그것을 더 심오하고 신뢰할 만한 진실로 대체하도록 도와준다.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감안할 때, 보고되는 모든 실험을 직접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사람들이 명예롭고 신뢰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과학이 얼마나 긴밀한 사회적 과정인지를 감안하면, 인권을 유린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함으로써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거의 항상 결국에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 …’
과학적 사실을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연구하는 행위도 우리 공동체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 전자는 과학을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전락시키고, 후자는 인간을 과학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둘 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의 명성 - 객관적, 절대적 진리라는 대중의 인식 - 을 남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익히 보아 온 디스토피아를 맞지 않으려면 이 두 가지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