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커다란 이변이 일어난다. 좌파와 우파가 번갈아 집권하던 정치적 전통을 깨고 극우파 마린 르 펜의 국민전선과 무슬림 이민자 층을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박애당이 결선에 진출한 것이었다. 프랑스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높은 출산율을 유지했고, 이때문에 무슬림 유권자가 크게 늘어나 이슬람박애당의 세력이 확장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극우는 정체성 운동, 이슬람은 지하디스트라는 강한 폭력성을 띤 집단과 가까웠기에 결선 투표 직전의 프랑스는 그야말로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맴돈다. 파리 시내 주택가에서 정체성 운동 단원들이 기관단총을 난사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발생할 정도로 대립은 격화된다. 내전에 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박애당의 당수 모하메드 벤 아베스는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는 극단주의로 치닫지 않고 노련하게도 극우에 맞서는 대화와 중용의 정치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의 정치적 스탠스는 좌파인 사회당, 그리고 우파인 대중운동연합으로 하여금 연정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결정적으로 ‘하나의 유럽’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던 사회당과 대중운동연합은 반유럽 노선을 표방하는 국민전선과 절대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이슬람박애당은 대연정을 구성하여 결선투표에서 승리한다. 프랑스 최초의 무슬림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벤 아베스는 당선되고 나서도 유연한 기조를 유지했다. 단 두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첫째는 교육 정책의 이슬람화, 둘째는 일부다처제였다.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은 교수나 교사가 될 수 없었고, 여학생들은 모두 부르카를 입어야 했다. 교육 또한 이슬람 교리에 맞는 과목만 개설되었다. 하지만 여성 취업이 제한되면서 실업률이 개선되고, 거대한 중동 석유 자본이 투입되면서 죽어가던 프랑스 경제는 활력을 띠게 된다. 벤 아베스는 천천히 노련하게 서구 민주주의의 첨병 국가 프랑스를 이슬람화 해나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프랑수아라는 이름의 40대 불문학 교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부모와는 거의 연을 끊고 매 학기 여학생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삶을 사는 그는 자신의 인생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는 미리암이라는 유태인 여학생을 사랑하지만, 미리암은 이슬람박애당이 집권할 분위기가 되자 부모와 함께 프랑스를 떠나 이스라엘에 정착한다. 프랑수아는 정치적 격변이 자신의 발치까지 다가왔음을 느낀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라는 19세기 프랑스 소설가를 연구한 그는 잠시 몸을 피해 위스망스가 카톨릭에 귀의하기 위해 지냈던 수도원에서 지내기도 하고 로카마두르라는 작은 마을의 성물인 검은 성모상을 매일 찾아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결국 종교는 그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할 기회를 놓쳐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미리암을 그리워하며 방황한다. 그의 사회적 삶이 끝장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소르본 이슬람 대학의 신임 총장이 된 르디제가 프랑수아에게 교수직 복귀를 제안한다. 별 볼일 없던 동료 교수가 어린 새 아내를 얻고 연봉이 세 배나 오르는 걸 본 프랑수아는 이 제안에 흔들린다. 르디제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얻은 대가 - 거대한 저택과 열 다섯 살의 둘째 부인 - 을 은근히 자랑한다. 허무주의적인 무신론자 프랑수아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
“혐오스러운 붕괴의 단계에 다다른 서유럽은 5세기에 고대 로마가 그러했듯 더는 몰락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의 복종과 선조에 대한 존경 등 여전히 자연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지배되는 전통문화를 고수하는 이민자의 대량 유입은 유럽이 가족적, 도덕적으로 재무장하기 위한 역사적인 기회였으며, 구대륙의 새로운 황금시대에 대한 전망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 백성들 중엔 간혹 기독교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슬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터였다.”
요컨대 진보와 이성, 무신론이 판치는 현대 유럽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적 가치관에 기반한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이 프랑수아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프랑수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복종>은 대단히 도발적이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의 실명이 거리낌없이 등장하고, 유럽인들이 근심해온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을 발산한다. 미국 내 히스패닉의 다출산 때문에 백인이 소수인종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떠는 MAGA처럼 대놓고 반이민 정서를 노출하진 않지만, 그리고 작가 미셸 우엘벡이 <복종>은 반이슬람적 소설이 아니라고 표명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 굉장히 찝찝하다. 소설이 이슬람 문화에 대한 평면적 클리셰로 가득 차 있어 작가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무슬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든 것도 하나의 이유이나, 지식인 주인공이 끝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슬람교에 ‘복종’하는 뒷맛이 무척 씁쓸하다는 게 더 큰 이유이다. 홍상수 영화를 볼때 마다 느끼는 불쾌함이랄까. 허무와 냉소로 무장하고 정치적 담론과 문학적 표현으로 자신을 포장하던 주인공이 결국 복종하게 된 계기는 “대우는 어떤 수준인가? 부인은 몇 명이나 얻을 수 있나?”라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해타산이었다. 주인공이 거기서 더 나아가 여자들이 이슬람 복장으로 몸을 너무 가리고 있는데 부인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냐고 르디제에게 묻는 대목은 노골적이고 천박한 육체적 욕망이 드러나서 읽기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프랑스라는 국가의 메타포인 주인공 프랑수아가 이슬람이 제공하는 속물적 욕망에 굴복한 것이다. 자, 이래도 <복종>이 반이슬람적 소설이 아닌가? 우엘벡에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