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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평점 :
이 책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즉 남성적 기질이 강하고 자기 이해가 필요한 남자들이나, 혹은 그런 남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여성을 위한 책인 듯하다. 하지만 나는 마초적 성향이 강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남자들이나 그들의 변명, 자기 합리화를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들을 이해하는 척 하며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는 여자들 또한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좀더 자라서 한국 사회의 조직 문화를 많이 접한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렇기에, 저자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솔직히 정말 읽고싶지 않은 책이었다.
여자가 달콤한 허니문을 꿈꿀 때 남자는 이제부터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가정의 미래를 어깨에 올려놓고 평생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평생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생존경쟁 현장에서 숨 돌림 틈 없이 뛸 각오를 해야 한다. 결혼하면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생활의 안정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남자로서 누렸던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가족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심지어 남자들은 '가족'이 된 아내에게 더이상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27쪽)
책장을 조금 넘기다 보면 이런 기가 차는 내용도 나온다. 마치 남성만이 불합리적으로 고통받는다는 듯한 이런 사고방식이 한국에서는 보편적이라는 사실은 여성으로서의 내 삶에 회의감을 불러일으킨다. 인생과 미래를 혼자 책임지나? 혼자만 자유를 포기하고 생존을 경쟁하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여성은 온갖 자유를 누리면서 여유롭게 살면서 가정에 대한 책임감은 없어도 되는 속편한 존재들이겠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참 대단하고 잘나셨다.
그는 아내의 시간을 자신보다 아내의 상사가 더 많이 사용하는 것에 화가 났다. 남자 직언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내의 엠티 사진을 볼 대면 슬그머니 고개 돌렸다. 아내가 승진하면서 지방으로 발령 나자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중략) 아내의 근무지를 따라 이사한다면 그것은 집안의 기둥이 자신이 아니라 아내라는 증거 같았다. (59쪽)
이 말대로라면 남자들은 도대체 역지사지라는 말은 모르는 걸까? 본인이 직장 여성 동료들과 일하는 것은 비즈니스고, 본인의 이직으로 인해 거적을 옮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짧은 기간에 급속히 변화한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더욱 복잡해 보인다. 일본 여성이 요구하는 편안하고 잘 소통되는 남자, 유럽 여자들이 원하는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남자, 미국 여자들이 원하는 동등하게 존중해주는 남자를 모두 원하는 것 같다. 어떤 여자는 '나를 재미있게 해주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고, 어떤 여자는 명품 가방을 원한다. 그러니 한국 남자들의 입장은 더욱 서글퍼 보인다. (180쪽)
마치 한국 여성만이 바라는 게 많다는 듯한 밑도 끝도 없는 자국 여성 혐오증은 여자들의 관용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하다. 최근 논란이 되는 특정 온라인 집단과 겹쳐 보여서 더 기분이 나쁘다. 한국 여성을 김치년 따위로 부르면서 성적 객체로서 비하하고 조롱하는 그들 집단에서도 종종 한국과 다른 국가(주로 일본이나 서양이 되겠다)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떠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여성을 몇 번이나 만나보고 얘기하는 건지, 동영상 속에서만 만나본 사람을 표본삼아 떠벌리는 같잖은 족속들에 대해서는 별로 길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거리에 여성 운전자들이 늘어날 때 남자들은 여자들의 운전 미숙을 비난하고 비웃었다. 실제로는 남자들이 더 많은 교통사고를 내고 그 피해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은 채. 남자들은 그냥 여자들과 같은 도로 위를 달리는 일이 싫었던 것이다.
여자가 경쟁자가 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여자를 상사로 모시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여자 상사와 함께 일하게 된 남자들은 온갖 고약한 방법을 동원해 여자 상사의 업무 수행에 걸림돌을 놓기도 한다. (60쪽)
남자들이 폭력과 범죄의 구분에 대해 얼마나 헛갈려할지는 짐작 된다. 예전에는 늘상 했던 농담들이 까딱 잘못하면 성희롱이 되고,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성추행이 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자기 집에 들어가서만큼은 왕처럼 대접받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 왕처럼 군림하다는 말 속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시종처럼 대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모두 폭력이라고 하니, 남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152쪽)
'그냥 같은 도로를 달리기가 싫다', '왕처럼 군림', '아내와 아이들을 시종처럼 대한다'라는 말이 조선 시대도 아닌 2013년에 와서까지 공공연하게 떠벌려지면서, 심지어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런 생각에 공감하며 유지해가는 족속이 존재한다니. 물론 모든 남성에게 이런 분석이 통용되리라는 일반화는 하지 않겠다. 기실 나는 내 가까이에서 이런 사람을 본 일이 없다. 내 앞에서, 아니 여성이라는 잠재적 성적 파트너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점잖은 체 하는 남성이 분명 내 곁에도 존재할 거라는 절망스러운 추측은 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렇게까지 했다가는 정말로 독신주의자라도 되어버릴 것 같으니까.
책을 정독하다 보면 저자가 남성의 사고방식을 옹호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인용해 온 구절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는 바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가치관의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이 전반적으로 단호한 어조라기보다는 어머니가 아이를 어르듯 시종일관 지나치게 유하게 다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화내고 다그친다고 해서 수십 년간을 그렇게 살아왔고 수백 년을 이어온 인습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테다. 저자 또한 남자들의 태도를 그리 곱게 보지는 않는 듯한데도 차분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연륜과 경험의 산물로 보인다. 분명 존경스러운 일인데도, 속이 시원하지 않고 답답하다.
나처럼 현대 사회의 남녀 평등에 냉소적인 사람이나, 요즘 여성들이 드세서 남성이 오히려 역차별받는다는 푸념에 신물이 난 사람, 혹은 결혼을 준비중인데 남성에 대한 환상을 깨기 싫은 여성이라면 이 책을 읽고 기분이 몹시 나빠질테니 그들에게는 강력하게 이 책을 비추한다.
솔직히 내가 이 책에서 좋은 느낌을 받지 못해서 어떤 사람에게 추천해줘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리뷰를 보고도 어떤 책인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책 전반에 걸친 서술에서는 남자라는 존재가 여기에 적은 것만큼 막무가내는 아니니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마지막으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정확히는 저자나 이 책 자체가 아닌, 이 책에서 서술된 현재 한국 사회 실태라는 걸 말하고 싶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