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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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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도 그랬는데 이번에 읽게 된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어딘가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책인 듯하다. 정원이라는 소재부터가 그렇다. 물론 처음엔 퍽 의아했다. 아름답고 멋진 글을 여럿 써낸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정원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다니!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 모두 어릴 때 읽은 탓에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유리알 유희』를 즐겁게 읽었던 만큼 이번 책에도 기대가 컸다. 



사실 지난 학기부터 캠퍼스 내에서 텃밭을 가꾸는 동아리에 몸담고 있기에 이 책이 더 인상깊게 다가온 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참, 나도 지금보다 어릴 때는 전원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붉은 지붕의 하얀 벽돌집을 짓고 텃밭과 정원을 가꾸며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는 소망을 가졌던 적이 있었더랬다. 그렇지만 동아리에서 크게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귀농에 대한 낭만과 환상이 금세 깨져버렸다. 도시에서의 삶이 익숙한 내게 무리지은 벌레 떼라거나 무거운 삽이며 흙더미 따위는 버텨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데 작가 헤르만 헤세는 포도 농사까지 지었다니. 책을 읽어 보니 과연 나무며 꽃을 가꾸는 일을 한두 해 해본 것이 아닌 듯하다. 취미라고 하기엔 상당히 전문적이고 섬세한 손길. 그의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나타나는 정원 생활과, 그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 마음의 안정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 이 모든 것이 적절하게 녹아들어 엮인 책이라니. 



이런 류의, 그러니까 아름답고 서정적인 책을 읽자면 원서로 접하지 못하는 현실이 마음아프다. 번역을 아무리 정교하게 잘 한다고 해도 본래의 느낌이 완벽하게 재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헤세의 묘사와 사색을 넘칠 만치 많이 엿볼 수 있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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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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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물로 건넬 때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예전에는 무슨 책을 어떻게 주면 좋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최근에 와서는 책 선물 자체에 대한 망설임이나 회의감으로 그 성질이 바뀐 듯하다. 첨단 과학과 시각 매체의 발전이 책 자체를 소실시키지는 못했지만, 활자 투성이의 종이 묶음이 푸대접에 퇴물 취급을 받는 일이 점차 빈번해져가고 있음은 누구라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구시대의 유물을 오히려 낭만으로 여기고 아끼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소유자들도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 사실이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그런 사람들에게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을 법하지만, 헌책방에 들어온 책들에 적힌 정겨운 손글씨를 모아 사진으로 찍고 글을 덧붙인 책이다. 게중에 몇몇은 낡고 빛이 바랜 데다, 몇몇은 손때가 묻고 읽은 흔적이 남아 있고, 또 몇몇은 누군가에게는 없어서 못 구하는 귀한 책이다. 적혀 있는 글씨도 정갈한 서체가 있는가 하면 유행을 탄 귀염성 있는 서체까지, 책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생각하게끔 만든다. 한마디로 참 제각각이다. 그런 만큼 글귀 하나하나를 읽고 있자면 때로 가볍게 실소가 터져나오다가도 어느 순간 스스로 깊이 침잠하여 고민에 잠기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84~87쪽, 「철학이 나의 밥이 될 수 있는가」였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고뇌가 상식과도 같이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라는 책의 여백에 적혀 있었다던 어느 청년의 글만 봐도 알 수 있다.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한때 찬밥 취급을 받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는데, 정작 사람들이 인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지금은 인격적인 성숙마저 취업을 비롯한 경제적 지위 상승에 필요한 요건으로서 이해되고는 한다. 이러한 가치관의 형성은 열악한 사회적 여건에 내몰린 것에서도 어느 정도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어찌되었든 물리적인 생존만을 고민하는 현재가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고뇌가 상식과도 같이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굳이 이 책 전체를 복잡하게 비판적으로 읽기를 권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손을 움직여 즉각적으로 답을 보내게 되는 어느 스마트폰 메신저 어플이 생기고, 당연했던 것들은 점차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변모해가고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긍정하거나는 모두 당신의 몫. 분명 유쾌하고 가벼운 이야기도 이 책에는 담겨 있다. 모든 것이 누군가의 삶의 궤적의 일부이며, 어쩌면 당신의 편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어도 좋을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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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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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한 우리의 삶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인간의 조건』





지금 당장 당신이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더위를 날려 줄 오이냉채? 간편히 훌훌 넘길 수 있는 컵라면? 조금 사치를 부리자면 자가용을 타고 멀리 나가서 꽃게탕과 같은 별미를 맛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다면 질문 한 가지 더. 당신은 이러한 음식 재료의 생산 과정과 유통, 판매 구조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하거나, 밥맛 떨어지게 그런 얘기를 왜 꺼내느냐며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흔히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깔끔하게 포장된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만을 볼 뿐, 그 이면에서 처절하게 혹사되는 인간과 가축의 노동과 고초에 대해서는 눈을 가리고 입을 닫는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이런 경향이 당연한 것처럼 팽배해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한 청년이 있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닥치는 대로” 1차, 2차, 그리고 3차에 이르는 각 산업 분야에서 몸소 일하고서, 경험담을 “누구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법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유를 들어 책으로 엮어냈다. 한승태의 르포르타주, 『인간의 조건』의 이야기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삼겹살, 컵라면 등은 사실 저자가 일했던 장소들과 제각각 밀접한 관련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접해봤을 법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부터, 얘기만 들어도 역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은 '돼지 우리', 웬만큼 힘센 성인 남자들도 투덜거릴 만큼 힘겹고 궂은 일인 '뱃일'까지. 열악하고 처절한 삶의 현장을 저자는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재치있는 표현과 유쾌한 어투로 책 속에 녹여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던 독자는, 바야흐로 신자유주의 시대, 빈곤이 일상적인 것으로 자리잡아 심지어는 워킹푸어(working poor), 일을 하면서도 그 굴레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사회의 모순을 그 안에서 발견하고는 웃으면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사태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적극적인 무지와 무관심으로 이 문제에 일관하던 우리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왜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다고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답하려고 한다.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중이나 대접은커녕 멸시를 받고 여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가 생겨나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알고, 그 실상을 접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자신의 저서 『노동의 배신』에서 그런 그들을 빗대어 박애주의자라는 표현을 쓴다. “그들은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방치하고, 남의 집을 쾌적하고 광이 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은 수준 이하의 집에서 산다”는 그녀의 표현은 저임금 노동자의 실상을 명료하게 포착해냈다. 우리의 삶이 윤택하게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깨끗하게 손질된 식재료나 상품만을 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 사람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성실함을 다해서 이 비정상적이고 불균형적인 사회를 떠받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이 상황의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머잖아 사회는 무너질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사회의 밑바닥에서 저마다 가장 힘들게 일하는 그들에게 당장 부와 명예를 끼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급받고, 이로부터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악한 여건에서 문자 그대로 무시無視당하면서, 노동을 제 값에 보상받기보다는 고용주에게 갈취당하고, 그러면서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기를 요구받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문제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회자되어 사회적 담론으로 자리잡을 때야,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의 여건 개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만 비로소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저 그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가 이 책을 통해 기대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 여러분께 권한다. 이 책을 읽고 때로는 실소를 터트리고, 때로는 분노를 터트리고, 그러다가 종래에는 『인간의 조건』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을 느끼기를. 그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작은 씨앗을 가슴속에 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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