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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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잖이 실망을 했다. 일단 브람스 음악을 좋아하고, 오래전부터 책이름에 호감을 가졌었던 데다, 두께도 상당히 얇기에 머리도 식힐겸 몇일전 구입을 했었는데 내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책 뒷표지에는 작가를 일컬어 ‘섬세한 심리 묘사의 대가‘로 적어 놓았던데,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뭐랄까, 무기력과 주저함 또는 갈팡질팡함이랄까? 책 내용을 요약하자면 말이다.

동년배 여주인공이라 도입부에서는 나름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좀 이상하다 싶었고, 그래서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싶었는데 결국 기대에 어긋나게 끝이 나고 말았다. 여성의 이야기라 남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다른 정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려다가, 작가가 24살 때 쓴 작품이라는 해설을 보고서야 이 모든게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했다. 그 나이 때에 만 39세의 심리를 잘 읽어낼 수 있었을리 만무하지 않는가. 하기야 나 역시도 20대 때에는 과연 40대가 되면 숨은 잘 쉬어질까, 무슨 재미로 살까하고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그 나이가 되니 별 감흥이 없다는 것, 스스로 큰 변화 없이 생활이 되더라는 것, 다만 책임에서 오는 제약이 좀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20대에 40대 이야기를 썼으니 당연히 무기력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심지어 사디스트처럼 묘사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상대방에 대한 책임의식도 없는 남자에게 그래도 내가 이제까지 기울인 노력이 있으니 계속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가 현 시대에 가당키나 한말인가?

˝그녀는 로제를 가리켜 그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139쪽)

그리고 같은 남자로서도 이해되지 않은 시덥잖은 그 마초적 인물을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서 접하게 되다니 이건 뭐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는 모든 게 그런 식이었다. 그는 그 아파트의 신이자 주인이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고, 애정으로 가득했고, 조용했다. 그럼에도 그는 밤중에 그곳에서 나올 때면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144쪽)

거기에 본 책과는 상관없는 작가 찬양일색의 해설은 또 무엇인가. 동병상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해 심히 아쉽다. 뭔가 사춘기 소녀의 잡문에 속아 넘어간 느낌이랄까. 다행이 소비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했기에, 물리적 손실은 크지 않았던 데 스스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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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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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루를 정리하며 반복해온 저녁 산책길이 지난주부터 확연히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조용히 익어가는 초목의 내음과 살곁에 와닿는 선선한 바람에, 작별의 말 없이 떠나보낸 계절에 대한 아쉬움과 어느새 성큼 다가온 새로운 계절에 황망함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곧 있으면 이 잎들도 모두 지상에 내려 앉고, 따라서 나도 또 한번의 상실감에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며, 아울러 쌀쌀한 대기가 마치 사회가 내품는 무관심의 은유인냥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그녀와 내가 떠올랐다. 손이 유독 차가웠던 그녀, 반대로 내부에서 끓어 오른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나. 그랬기에 써늘한 계절에 그녀는 항상 내 손을 꼭 잡으려 했었고, 또 그 손을 찾아 내 호주머니 속을 더듬어 댔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른 나이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 생활, 그 냉혹함에 스스로 얼어 붙고 있었고, 그래서 부족한 온기를 나에게서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반대로 그때 나는 가진 것 없는자의 태생적 분노와 열기로 스스로 전소되지 않기 위하여 직감적으로 그녀의 냉기를 더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337쪽)

그때의 그녀와 나는 지금 어떻게 변했는가. 아마도 당시 우리의 삶의 모습은 테레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각자에게 지나치게 버거운 무게의 삶. 인생이 영원토록 회귀하는가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는 무관하게, 단 한 번뿐이라도 삶이란 그리 만만치 않음을 어린 나이에 이미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 나는 어떻게 바뀌어 있는가. 삶의 경중에 대한 생각은 그때와 변함없으되, 변한 것은 그 인식이 직감이 아니라 현실로서 실감하고 있다는 것, 토마시의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의 무게와 냉기가 그때의 온기를 모조리 덮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그녀만이 중요했다. 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모든 ˝es muss sein!˝의 피안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 (353쪽)

분노와 열정은 의무와 냉정으로 완전히 탈바꿈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난날, 없는 자가 가지기 마련인 선량함, 올바름(correctness)의 느낌은 착각이었음을, 결핍의 억울함을 더욱 선량한 그녀, 타인으로부터 보상받고 싶어했던 것임을, 그래서 나라는 인간은 착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며 단지 이기적이었을 뿐임을, 그런 자성의 목소리에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항상 그를 비난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에는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단순한 자만심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 그녀는 얼마나 교활했던가! 그녀는 그를 시련에 빠트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따라오라고 불렀고 결국 그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셈이다. (...) 테레자의 약함은 그가 더 이상 강하지 않아 그녀 품에서 토끼로 변할 때까지 매번 그에게 타협을 강요했던 공격적인 약함이었다.˝ (501~502쪽)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482쪽)

아마도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 사이였을 것이다. 그땐 일독을 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해하기에는 삶의 경험이 미천했을테니까. 몇년전 2회독을, 금년초에 다시 일독을 했고, 지난주 일요일 문득 생각이나서 다시 펼쳐 들었다.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읽다보니 이전에는 매우 얕게 이해했었고 놓친 부분도 꽤 많았음을 깨달았다. 어제 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참 책을 끌어 안고 있었다. 무거움에 눌려 가벼움을 희구했던 테레자, 가벼움의 삶을 누리다 테레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 점차 무거움을 짊어지는 토마시, 배반을 연속한 자신의 삶이 결국 참을 수 없도록 덧없던 것이었음을 깨닫는 사비나, 무거움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사비나를 선택한 프란츠, 그리고 토마시와 테레자에게 사랑과 행복의 참의미를 깨닫게 해준 애완견 카레닌까지. 극중 모든 사람이 실은 인생의 중력에 버거워했음을 이해했고 그래서 사랑스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밀란 쿤데라의 고백도 이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에 매혹을 느낀다. (...)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355~356쪽)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인생은 한 번 뿐인가, 영원히 반복되느냐와는 무관하게,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버거운 것임을, 그래서 내가 전혀 잘 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님을 확인하고 위로 아닌 위로까지 받을 수 있었음에 고맙게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57~358쪽)

끝으로 번역과 관련해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한 문장씩 대조해 본 것은 아니고 그럴 능력도 안되지만 전체적으로 번역이 매우 매끄럽고 수려했던 점은 역자에게 감사드린다. 그러나 첫번째 페이지(9쪽)의 문제는 꼭 지적하고 싶다. 내 생각으로는 이 책의 핵심 단락인데,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원문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문맥으로만 보더라도 분명 어색하다. 영원회귀를 뒤집어 생각하는 부분인데, 쿤데라의 생각은 번역문처럼 단정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부분에서 말하고 싶은 점은 단지 영원회귀와 한 번 뿐인 삶과의 대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래와 같이 조금 수정을 했으면 좋겠다.

(원번역문)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후략)

(수정번역)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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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티브 -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
일자 샌드 지음, 김유미 옮김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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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은 최근 회사가 무궁한 아량으로 미천한 나에게 쥐어준 도서상품권을 이용해 몇일전 구입했던 까뮈 전집을 읽기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두꺼운 책 부피에 어느 정도 잠시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 이 책을 먼저 읽는다. 오늘 평할 이 책도 회사 연수중 받은 것으로 책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책중 하나였다.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한지 비참해 하던 차에 호기심이 동해서 휴일 아침에 빠르게 읽어 나갔다.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목요일 밤에 좀 많이 훌쩍였다. 갑자기 비애감이 폭우처럼 가슴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근래 마음이 많이 불안정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목요일 밤은 좀 심했다. 스스로 인정을 좀 했던 것 같다. 의식적으로는 무시했었지만 내 깊은 무의식중에는 분명 압박감이 있었던 것이다. 수면장애며, 두근거리는 심장하며, 손떨림하며. 그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갑자기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왜 나는 남들과 이리 다를까? 왜 이리 예민하고 상처도 쉽게 받을까? 열심히 최선을 다한 일에도 조마조마하고 후회할 부분을 굳이 찾아내려 할까? 책에서 말하듯 자존감이 낮아서 일까?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행동 판단 기준을 매우 높게 설정한다. (...)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친절해야 한다. 사려 깊어야 한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깊이 배려 해야 한다. 책임감과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관심을 가져여 한다‘ (...) 높은 기준은 낮은 자존감과 연결된 경우가 많다. 높은 기준은 낮은 자존감을 보상하기 위한 방편이다. 자기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당신은 그것을 보상할 전략을 찾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깊은 내면은 당신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지 않고서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용감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64~78쪽)

나 스스로 나의 삶을 궁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든다. 비근한 예로 요즘 직장 후배들이나 동료들이 휴가 때 쉽게 떠나는 해외 여행을, 나는 출장이외의 목적으로, 사비로 떠나 본 적도 없다. 경제적 문제는 아니다. 적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고, 집도 있고, 가용할 돈도 넉넉히 있지만 그런 여행을 위해서 그렇게 목돈을 선뜻 한 번에 쓸려고 하면 내 깜냥으로는 수없이 많은 고민의 밤과 손떨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애시당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심지어 최근 갑자기 마음이 동한 쿤데라 양장 전집도 손이 떨려 결제하고 있지 못하는 나이니. 어찌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빈궁했던 생활습관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보다는 내가 남들과는 확실히 달라서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지만 그런 자각이 요즘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우리의 삶은 불가능한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바람을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일이다. 특히 실제의 삶이 바라는 삶과 큰 차이가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상처를 깊이 감춰둔 채 무감각하고 우울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슬픔을 직시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 (...)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분노는 슬픔으로 바뀐다. 슬픔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슬픔은 기다려야하는 과정이다. 슬픔의 감정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사랑과 배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애정과 친절을 베풀지 못한다. 당신이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슬픔은 사람들을 곁으로 불러들이지만 분노는 멀어지게 한다.˝ (147~149쪽)

오늘 아침도 이 책을 읽으며 갑자기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런 류의 책을 읽다가 감성적으로 흐를 가능성은 전무했겠지만, 그만큼 요즘에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그간 애써 외면해왔던 사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다. 그런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제넘게 보여왔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연민들도 하나 둘 씩 거둬들일 필요도 있겠다. ‘내가 대체 뭐라고‘....... 내가 많이 지쳤다. 결국 인생은 혼자만이 감당하게될 쓸쓸한 여행이 아니겠는가.


˝죄책감을 자신의 무력함과 슬픔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 자신의. 무기력함과 삶의 불확실성을 직시할 때, 지나친 죄책감으로 고통당하지 않을 수 있다. ˝(156~157쪽)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는 것은 때때로 내가 남들에게 성가신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일생 동안 자기 자신과 화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다. 어릴 때 우리는 삶을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기에 대해 온갖 아이디어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장 하면서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그리고 바라던 것들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정말 잘하고 싶었지만 꿈은 쉽게 좌절된다. 그럴 때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연민의 말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정말 더 잘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어. 그렇지만 이것도 괜찮아˝라고.˝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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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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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였는지 그러께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땐 아마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을 듣고, 그 곡이 일명 ˝Tempest˝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인 듯 싶다. 어제 책장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어 펼쳐본 것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고, 책제목이 템페스트에서 따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참 나는 지독한 망각의 동물이다. 신세계의 야만인이 읊조린 단락이 내 기억속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평을 계속 써나가는 것도 사실 그러한 자각과 무관치 않다.

˝미랜더: 오, 놀랍구나!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 많다니!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120쪽)

책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동생의 탐욕으로 대공의 자리를 빼앗기고 딸(미랜더)과 함께 추방된, 책을 사랑하고 마법을 아는 푸로스퍼러가 세월이 지난 후에 자신의 딸을 마법의 힘으로 자신의 섬에 표류하게 만든 나폴리 왕자와 결혼시키고 자신을 축출한 나폴리왕과 자신의 동생과도 화해한다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앞서의 미랜더의 대사를 역자인 이경식 교수는 이 극이 지닌 ˝생의 찬가˝적 성격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부분으로 설명했던데, 나는 그 해석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외에 인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온 미랜더가 단순히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접하고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터져나온 탄식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들과 달리 이야기가 밝아서 좋고 표지 사진도 예뻐서 긍정적인 맘이 들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예전부터 품어 왔던 한가지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신세계의 야만인도 그렇고, 여러 서양 고전에서도 그렇던데, 많은 사람들이 셰익스피어 극의 대사들은 자주 인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기억에 많이 남지 않은 단락을 그들은 그렇게 외우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영문으로, 운문의 형식으로 직접 느껴서 그럴까? 그래서 내 자신 예전에 영문으로 읽기를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고어가 많아 쉽지도 않았었던 기억이 조금 남아있다. 여건이 된다면 다시 시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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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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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허물어지는 데는 단 몇초면 충분하였다. 마음을 어느 정도 다잡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몇마디 말에 이리 쉽게 흔들리게 될지는 나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근래의 내 정신상태가 매우 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좌절감을 맛보게 되는 경우 중 하나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정작 본인 자신은 동의하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의 인식 또는 사회에 그어져 있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한계선들을 맞닥뜨리게 될 때 말이다. 젊을 때야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만용을 부릴수도 있다쳐도 차츰 나이가 들어가고 기력이 약해질 때가 가까이 오게되면 어쩔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도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때 느끼는 좌절감이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곰곰히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 현재의 나는 참 어중간한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아주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 중간 지점에서, 만용을 부리기에도 체념을 하기에도 선뜻내키지 않는 그런 나이 때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내 감정상태도 이리 불안정한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헉슬리가 바라본 미래 사회, 즉 ‘멋진 신세계‘에서는 최소한 내가 겪는 동일한 문제를 경험할 수가 없다. 인간은 사회적 기능에 따라 알파부터 엡실론까지 나누어 부화되고, 유아기에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한계를 끊임없는 최면학습을 통해 뇌에 각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 자신의 한계 인식에 따른 실존적 고민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므로 사회는 안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인간에게는 의식적으로 체험하고 감탄하며 자신의 실존적 분열을 해소하는 최적의 방법인 가치와 목표를 발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에 위대한 존재라고 보았다˝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알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틀림없이 불안정하고 비참해집니다. 알파들이 근무하는 공장을 상상해봐요, 그것은 훌륭한 자질을 물려받아,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어느 한도 내에서의) 책임을 지도록 훈련을 받아 길이 든 개인들이 저마다 분리되고 상관이 없는 집단을 이루는 셈이죠. 그런 사회를 상상해보라구요!˝ (336쪽)

그뿐인가. 신세계에서는 욕정, 두려움, 연민 등 감정을 자극할만한 모든 요소들도 제거된다. 책임져야할 가족도 없고, 완전 자유로운 성생활하며, 죽음도 삶의 일부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세뇌되는 사회.

˝사회적인 불안정이 없으면 비극을 생산할 길이 없으니까요.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333쪽)

이 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문체며, 구성이며, 철학이며, 번역 모두 우수하다. 세련되고 번뜩이는 재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러 방식으로 익히 들어온 책이므로 내용에 관해 굳이 더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많이 웃기도 했지만 요즘에 부쩍 많이 느꼈던 감정과 공명이 일어나 약간 힘들기도 했다. 최근 나는 유독 ‘왜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어쩌면 신세계 사람들이 먹고 있는 환각제(소마)를 나만 빼고 다 복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유치한 상상도 해봤다.

˝기독교 사상과 술의 모든 이점을 지녔지만 결점은 하나도 없어. 원한다면 언제라도 현실로부터 떠나 휴식을 취하고, 두통이나 헛된 관념에 시달라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어. 1세제곱센티미터의 양이면 열 가지 침울한 기분이 물러가요˝ (102쪽)

그러나 개인적으로 더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최근 들어 나 자신은 현세계 보통 인간의 삶, 신세계 야만인(존)이 소망하는 위험한 삶을 살고픈 욕구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짜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정말이지 살아가기 쉽지 않다.

˝위험하게 살아가는 삶이라면 무엇인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362~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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