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마음속 108마리 코끼리 이야기
아잔 브라흐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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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매섭다. 하루 아침에 이리 차갑게 돌아설 수 있다니. 자연의 냉정함을 조금은 배웠으면 좋겠다.

몇해전에 이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많이 약했고 힘들었던 시기였다. 여러 불교 서적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생각도 했고, 그래서 도움도 얻었더랬다. 갖은 고통에 대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며 잦아 들 때까지 내 마음 속을 관조하며 기다리라는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고 실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사흘 전 화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후 마음의 동요가 진정되지 않기에 책장을 뒤지다,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이제는 환경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임을 안다. 특히 책의 첫 부분에 나온 2개의 잘못된 벽돌과 998개의 바른 벽돌에 관한 이야기에서, 저자와 정반대로 이해하고 그래서 마음이 조금 더 아파졌다. 남들은 자신 내면의 좋은 998개의 벽돌을 찾아 2개의 비뚤어진 벽돌을 만회할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2개의 예쁜 벽돌 조차 찾기 버거웠고, 오히려 몇일간 계속 998개의 못난 벽돌만 목록에 추가되고 있었다. 내가 왜 힘든지 이젠 알 것 같다. 그 두개로 나머지 벽돌을 받칠려고 했으니 얼마나 초조하고 버거웠겠나.

벽돌론으로 인간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도 눈길이 갔다. 사람 관계가 틀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은 상대방과의 셀 수 없는 아름다웠던 기억보다 당장의 사소한 실수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부실한 두 개의 벽돌로 버텨왔던 사람은 가벼운 바람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을까? 그래서 상대방의 사소한 언행에도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요컨대, 지금의 나의 문제는 그러한 나의 부족함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생각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계속 이런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데,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 상태가 나의 정상적인 본 모습인 것 같다. 바뀔려고 많이 노력하면서 잊어버린듯 했는데, 요 며칠 곰곰이 돌이켜보니 그 노력 이전까지 삶이 재미없고 행복하지도 않았고 어두웠다고 스스로 많이 느꼈던 것 같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좌절의 시기가 아니라 정상으로의 회귀과정인 셈이다. 한참 잊고 있었지만 내게 충분히 익숙한 느낌들이기에 이를 맞아들이는 것도 크게 두렵지 않다. 아무리 아늑해도 본인이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감옥이라고, 그래서 마음가짐을 바꾸라고 써있던데, 그게 쉬었으면 진작 그리 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TV 채널 돌리듯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이 세상 누가 좌절하겠는가.

책과 저자와 번역에는 전혀 불만이 없다. 글이 재미있고 수려하며 진심도 느껴진다. 단지 내 생각, 심리가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번뇌의 나날이 이어지고, 그때마다 얼마나 상처를 입게될지 모르겠다. 나의 문제를 특정 몇사람에 대한 분노의 감정으로 균형 맞추려 하지 말아야 할텐데, 사실 아침에도 그런 감정으로 깼으니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이런 모든 고뇌에 가슴을 열고 흘러가도록 지켜보는 것 외에 별 도리가 없을 성싶다.

<수타니파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때묻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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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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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비극은 농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한 순진한 여자 친구의 호감을 얻고 싶은 마음에 보낸 엽서에 적은 몇마디의 우스갯소리. 이로 인해 루드비크는 자신이 믿어 왔던 공산당과 대학에서 제적되었고, 친구 제마네크로부터 배신을 당했으며, 군에 징집되어 오랜 기간 광산에서의 노역을 짊어져야 했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이 모든 불행을 선량한 루치에로부터 위로 받고자 했으며, 헬레나를 능욕함으로써 제마네크로 대표되는 시대의 불합리에 복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루치에에게 과거의 아픈 상처를 되살리는 것으로, 제마네크에게는 정부와의 연애행각에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귀결되고 말았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대체로 유사한 색깔이 있다. 몇몇 주인공들의 입장을 오가며 대립된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이며, 쌀쌀한 문체며, 그러나 중간 중간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단락하며, 큼직하게 던지는 철학들. 이 책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다소 유사한 글귀들이 눈에 띄었지만 어차피 작가가 동일인이니 그럴만도 하다, 스타일이 유사해서 그렇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의 핵심 소재이니 농담과 관련해 몇마디를 해보자면, 사람 사이의 대화, 그중 농담은 화자와 청자간의 공감이 특히 중요한 것 같다. 말하는 이는 상대방과의 서먹함을 줄이고자,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도하지만, 정작 듣는 당사자가 불편해지거나 심지어는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농담 또는 진솔된 대화는 최대한 지양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와 유사한 이유에서 개인적으로 몇일 동안 가슴앓이를 하는 중이다. 심한 농담 또는 기분나쁜 대화를 해서가 아니라 그간 열어두었던 마음에 너무 많은 생채기를 입었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냉담하게 돌아오는 타인의 언행에서 그동안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엔 내가 그렇지 않았는데,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들인데, 다 부질없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다 되돌리고, 주어 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몹시 아프다.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분노, 짜증들, 심지어 몇일간 잠에서도 벌떡 깨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나는 왜이리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지, 왜이리 이해타산적이 되지 못했던지,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타인도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대할 수 있었는지, 장말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다만 항변하자면 난 진실로 따뜻한 말을 많이 해주고 싶었고, 그만큼 마음을 열어둘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젠 닫을 때가 되었다. 너무 늦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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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드의 책을 읽다가 마음이 심란하여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불면증이 다시 돌아왔나보다. 슬프고 분해서 였을까? 잘 모르겠다. 예전에 힘들 때 이 책을 보고 마음을 가다듬었었는데, 다시 그 상태라니. 새벽에 읽은 2개의 벽돌과 998개의 벽돌 이야기가 하루 종일 뇌리에 남았다. 난 저자와 달리 그 숫자를 반대로 생각한다. 즉, 나는 998개의 비뚤어진 벽돌과 2개의 아름다운 벽돌로 쌓여진 인간이다. 그래서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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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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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영단어 compassion은 ‘연민’과 ‘공감’ 두 가지 뜻의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글과 서양글 모두에서 비슷한 용례로 흔히 쓰여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두 뜻을 혼동하기는 그들이나 우리 모두 피차 일반인 듯 싶다.

연민은 물적, 심적으로 주체와 대상간의 우열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공감은 그런 전제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엄밀하게 따져보면 큰 차이가 있다. 또한 공감하면 연민이 생길 수 있지만, 연민이 있다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아니므로 상호의존적인 개념으로 볼 수도 없다.

타인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우월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연민은 가급적 배제해야 하는 열등한 가치로 본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 만일 누군가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처한 상황을 공감해주는 것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나는 결국 사랑이라고 하는 것, 또는 사람간의 관계를 따뜻하게 하고 돈독하게 해주는 세상의 좋은 모든 개념들은 결국 서로 서로가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되며, 이런 존중의 시작은 바로 공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지어주는 결정적인 가치중 하나라고도 주장하고 싶다.

서론이 이렇게 길었던 것은 최근의 나의 경험과 <나를 보내지마>에서 공통적으로 길어올린 핵심적 결론이 그렇기 때문이다. 개인적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대목은 장기의 재고품 용도로 길러지는 복제 인간과 그 장기를 죄의식 없이,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 인간간에 부재한 공감이었다. 두 부류 모두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은 완전히 배제하여야만 했다. 복제 인간에 대해 연민을 갖는 일반 인간도 소수 존재하였지만 그들 마저도 공감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베개를 껴안고 “Never let me go”을 따라부르던 캐시를 바라보는 마담(마리클로드) 본인의 생각과 캐시가 추측한 마담 생각간의 커다란 간격이지 않나 싶다(371~372쪽). 그 장면에 대하여 복제인간인 캐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슬픈 숙명을 마담이 공감해주길 바랬다면, 마담은 장기 재고품으로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잊지 말아달라는 복제인간들의 호소로 해석했던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재능에 탄복하게 된다.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설정에서도 이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담담하게, 심지어는 밝은 성장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적 설정은 조지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비슷하지만 이 두 작품에 비해 감정이 절제되었기에 먹먹함도 더 오래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세 작품의 작가 모두 영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에 이시구로는 일본계로서 동양의 정서를 품고 있을 것이니 내가 그러한 인상을 받은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리라. 끝으로 이처럼 좋은 책, 좋은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너무 아쉽지만, 이제라도 알았고 개인적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기에 한편으로 다행이며 다른 한편으로 고맙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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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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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꾸었다. 나를 앞서 걷던 하얀 개 두 마리가 갑자기 나를 덮치는 꿈이었다. 프로이트가 꿈은 소원 성취라 했는데, 과연 내가 무엇을, 아니 어떤 상황을 바란 것일까. 짐작 가는 점이 있지만 내 스스로 굳이 꺼내 생각하기에는 민망하고 슬프다.

여하튼 한밤중 잠에서 깨어, 몇일전부터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독서록을 마저 적어본다. 요즘에는 부쩍 삶에서 균형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되었다. 올해 들어 많이 초조함을 느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상황이 그런 것도 아닌데, 삶의 무게 추가 한 쪽으로 치우쳐졌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치우쳐있는 지점에서의 성과가 일상에서의 모든 기분을 좌우하는 결과가 초래되었고, 이에 삶도 피폐해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작년까지 잘 버텨내고 중심도 잘 잡고 있었기에, 올들어 취한 몇가지 선택들이 내심 매우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지나간일 어쩔수 없는 것이기에, 지금부터라도 예전의 자리를 찾아 조금씩 옆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삶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에 나는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슨에 연민과 공감을 동시에 느꼈다. 스티븐슨은 다른 것들보다 직업적 소명의식, 전문적 직업인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우선 순위에 둔 사람이다. 켄턴에 대한 애틋함, 부친의 임종에 따른 황망함 등은 직업적 품위를 위해서 필요시 억누를 수 있는 감정들이어야 했다. 서두의 비유대로라면, 그의 삶은 일에 일방적으로 치우쳐져 있었던 셈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모든 행동이 옳은 방향이라 믿었고 주인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으로 귀착될 것으로 알았다. 이처럼 그의 성품은 너무도 순수했고 우직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의 말미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커다란, 쓰린 회한 뿐이었다.

“(집사의)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57쪽)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 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않을 수 없어요.” (299쪽)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근래 들어 이처럼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체나 구성의 책도 없었기에, 나의 독서의 폭이 얼마나 좁은지를 비로소 깨달은 셈이다. 아마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성 싶다. 그리고 감수성도 더욱 풍부해졌으리라.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절제된 언어, 정황의 서술로 표현해내는 작가의 필력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책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읽는 도중에 몇번의 가슴 저림과 흥분,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불면증도 경험할 정도였다. 어떤 상이 그 책의 우수성을 반드시 공증하는 것은 아니나, 노벨상 수상자의 대표작으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제가 이 집에서 일해 온 지 여러 해가 되었건만, 떠난다는 소식 을 듣고도 겨우 축하한다는 얘기밖에 못하시나요?˝
“켄턴 양, 나는 진심으로 축하했을 뿐이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위층에서 중차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속히 내 자리로 돌아가 봐야 하오.”
“스티븐스 씨, 당신이 제 지인과 저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271쪽)

(부친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누가 내 팔꿈치를 건드리기에 돌아보니 달링턴 나리님이셨다.
“스티븐스, 괜찮은가?˝
“그럼요, 나리 완벽합니다.˝
“자네 지금 울고 있는 사람 같네”
나는 웃으면서 손수건을 꺼내 얼른 얼굴을 훔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라 힘든 하루였던 모양입니다.
“맞아, 정말 힘든 일이었어.˝
(137쪽)

˝스티븐스 씨. 당신은 지금 제게 남편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를 묻고 있는 것 같군요.˝
“그럴 리가요, 벤 부인, 내가 어떻게 감히.......˝
“어쨌든 꼭 답변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스티븐스 씨, 당신도 말 씀하셨듯이 이제 우린 오래도록 다시 못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요, 저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처음에는 아니었어요. 처음 오랫동안은 아니었어요. 그 옛날 달링턴 홀을 떠나올 때만 해도 제가 정말 영원히 떠나게 될거라곤 생각지 못했답니다. 그저 스티븐스 씨 당신을 약 올리기 위한 또 하나의 책략쯤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막상 여기로 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 했을 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후 오랫동안 저는 무척이나 불행했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고 전쟁이 지나가고 캐서린이 장성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남편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누구하고든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그 사람한테 익숙해지게 마련이죠. 남편은 자상하고 착실한 사람이에요. 그래요, 스티븐스 씨, 이제 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293쪽)

책의 매력에 빠져나오지 못해 그후 영화도 보았지만 책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 영화라는 매체는 사실상 역부족이었다. 끝으로 책 말미의 작품해설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누가 이런 식의 괴변적인 확대 해석을 했나 싶었더니, 얼마전 내가 비슷한 관점으로 가치절하했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의 해설자였다. 스티븐슨을 아렌트의 “아이하만”과 비교한다는 것, 그의 잘못을 “철저한 무사유”에서 끌어낸다는 것은 너무 과한 면이 있다. 그런식으로 집사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범죄자가 먹을줄 모르고, 또는 입을줄 모르고 양식과 의복을 만들어낸 당시의 모든 사람이 범죄 조력자인 셈이지 않겠는가. 작품 해설에도 사유를 좀더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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