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영단어 compassion은 ‘연민’과 ‘공감’ 두 가지 뜻의 어원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글과 서양글 모두에서 비슷한 용례로 흔히 쓰여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두 뜻을 혼동하기는 그들이나 우리 모두 피차 일반인 듯 싶다.

연민은 물적, 심적으로 주체와 대상간의 우열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공감은 그런 전제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엄밀하게 따져보면 큰 차이가 있다. 또한 공감하면 연민이 생길 수 있지만, 연민이 있다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아니므로 상호의존적인 개념으로 볼 수도 없다.

타인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우월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연민은 가급적 배제해야 하는 열등한 가치로 본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 만일 누군가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처한 상황을 공감해주는 것중에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나는 결국 사랑이라고 하는 것, 또는 사람간의 관계를 따뜻하게 하고 돈독하게 해주는 세상의 좋은 모든 개념들은 결국 서로 서로가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되며, 이런 존중의 시작은 바로 공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별지어주는 결정적인 가치중 하나라고도 주장하고 싶다.

서론이 이렇게 길었던 것은 최근의 나의 경험과 <나를 보내지마>에서 공통적으로 길어올린 핵심적 결론이 그렇기 때문이다. 개인적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대목은 장기의 재고품 용도로 길러지는 복제 인간과 그 장기를 죄의식 없이,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 인간간에 부재한 공감이었다. 두 부류 모두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은 완전히 배제하여야만 했다. 복제 인간에 대해 연민을 갖는 일반 인간도 소수 존재하였지만 그들 마저도 공감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베개를 껴안고 “Never let me go”을 따라부르던 캐시를 바라보는 마담(마리클로드) 본인의 생각과 캐시가 추측한 마담 생각간의 커다란 간격이지 않나 싶다(371~372쪽). 그 장면에 대하여 복제인간인 캐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슬픈 숙명을 마담이 공감해주길 바랬다면, 마담은 장기 재고품으로서 자신들의 유용성을 잊지 말아달라는 복제인간들의 호소로 해석했던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재능에 탄복하게 된다. 자칫 우울해질 수 있는 설정에서도 이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담담하게, 심지어는 밝은 성장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적 설정은 조지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비슷하지만 이 두 작품에 비해 감정이 절제되었기에 먹먹함도 더 오래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세 작품의 작가 모두 영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에 이시구로는 일본계로서 동양의 정서를 품고 있을 것이니 내가 그러한 인상을 받은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리라. 끝으로 이처럼 좋은 책, 좋은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너무 아쉽지만, 이제라도 알았고 개인적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기에 한편으로 다행이며 다른 한편으로 고맙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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