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짬뽕 같은 날

 

아직 가을 인거 같은데 갑자기 아침저녁 쌀쌀하다. 아내는 팔이 아픈 나를 위해 장에

 

가서 도와준다고 했다. 이른 밥을 먹고 설거지도 하지 못하고, 양치도 안한 채 따라

 

나섰다. 김장 마늘과 씨 마늘 수요가 최고점에 다를 때라 일찍 가기 위해서다.

 

생리하느라 힘든데도 나를 도와준다고 바로 따라 나선 아내가 고마웠다.

 

진천 장으로 가는 길엔 오래된 부처님이 계신다. 오늘도 모자를 들어 올리며 무사히 잘 팔고 오게 해달라고 맘속으로 기도한다. 아내는 옆에서 뭐하는 거냐고 물어본다.

 

무형 문화제처럼 형체도 부실한 부처님 인데 그냥 기도 하는 거라고 말했다.

 

아내는 오~~~ 여보야가 맨날 기도 하고 지나가서 진천 장이 잘되는구나 하며, 같이

 

기도를 한다 . 나는 운전하느라 몰랐는데 옆에서 아내가 종알거린다.

 

허니 나도 기도 했어. 우리 대박 나게 해달라고.

 

몸 약한 아내지만 옆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8시도 안돼서 도착했는데,

 

벌써 마늘을 사러 온 사람이 있었다.

 

나는 웃어가며 “이거 더 일찍 나와야 되는 거 아니여?” 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러게 이야 참 이렇게 일찍 사러오다니 신기할 새.” 라며 맞장구 쳤다.

 

장비를 풀르는 동안 아내는 양치하고 꽃단장 하러 화장실에 갔다.

 

마늘을 내리며 바로 도매를 몇 군데 넘겼다. 앞에 항상 따뜻한 커피를 나눠주는

 

맘 따뜻한 옷 장사 아줌마한테 차를 얻어먹었다. 궁둥이 부칠 사이 없이 마늘 장사가

 

시작된다.

 

아내는 춥다며 왔다 갔다 한다. 나는 차에 있으라고 말하지만, 손님 있으면 나와서 봉

 

지라도 잡으며 하나라도 도와 주려한다. 점점 손님이 더 많아 진다.

 

나는 이쪽에서 팔고, 아내는 저쪽에서 팔고 양쪽에서 작두질 하느라 정신이 없다.

 

호떡집에 불이 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내에게 돈 잘 버는 신랑 만나 얼

 

마나 좋으냐고 떠들어 댄다. 그리고 이렇게 이쁜 색시 누가 훔쳐 갈까봐 어떻게 데리고

 

나왔냐며 호들갑이다. 속 모르는 소리 365일 오늘 같으면 누가 걱정을 하겠나.

 

하긴 365일 매일 이러면 아마 쓰러져 죽을 거다. 하느님은 참 그런 면에서 공평 하신

 

거 같다. 올핸 배추 값도 비싸고, 작년 혹한으로 마늘 작황이 안 좋아 금값이 따로 없

 

다 . 거기에 불경기 까지 겹쳐 장사가 생각만큼 작년 갖지 않다.

 

재래시장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 속타는 심정을 누가 알꼬... ...

 

긍정의 아이콘인 아내는 걱정 없다는 듯 나를 위로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마늘 안 먹는 사람 없고, 모든 양념엔 다 들어가며 40대 이후 김치 안

 

담아 먹는 사람 없다고 신문에서 봤단다. 100세 시대에 중장년층 오래 살고,

 

당신은 40대 후반이니, 당신 죽을 때 까지 그 사람들 안 죽고 사먹으니, 걱정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공부하며 당신 자신에게 투자하는데 뭔 걱정이냐고 한다.

 

욕심 부리지 말고 매일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면 돼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공부해서 취업을 할 것도 아니고, 돈 버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아내에게 말한다. 그러면 아내는 “당신 아직 공부가 덜 됐네. 조금만 더 하면 사람 돼.”

 

라며 농담을 날린다. 아내는 삶은 계란과 초콜릿을 가져와서 내 입에 넣어준다.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손님이 끊어지지 않는다.

 

장사하기 정신없어 점심때가 됐는지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

 

아내는 계란과 초콜릿을 먹고도 배고프다며 밥 먹고 온다고 사라졌다.

 

그리고 여럿이 시킨 밥이 나왔고, 밥을 먹는 건지 장사를 하는 건지 혼자 헐떡이며 ,

 

점심을 먹었다. 아내는 사라지고 남은 바빠 죽겠는데 그렇게 한참을 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 아내가 나타났다.

 

나는 힘들고 션찮은 밥을 먹은 내 생각만 하고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나 밥이나 먹으면 갔다 오지 그랬냐고 말이다. 아내는 생리하고 어지러워서 갈비탕

 

찾아 돌아다니고, 생리대 갈고 이것저것 하느라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당신이 아무 말 없어서 그랬다고 그럼 진작 자기 먹음 가지 그랬냐고 말했다.

 

또다시 손님과의 씨름, 깎고 또 깎고 마늘이 굵다 작다 쪽이 많다 적다 말한다.

 

이 지역 마늘이 아니네 밭 마늘 이네 논 마늘 이네 하며 씨름을 한다.

 

한 아저씨가 한 접에 얼마냐고 묻는다. 2만 7천원 이라 했는데 두 개 자르라 한다.

 

두 개 잘랐는데 5만 4천원을 주지 않고 2만 5천원 만 준다.

 

아저씨 두 접이니깐 5만 4천원 주셔야지요. 한 접 묶은 게 반접 인줄 알았단다.

 

자른 거반만 달라고 손님은 말한다. 나는 아니 이거 자른 거를 어떻게 파냐고 말하다

 

결국 손님이 밀려들어 실랑이하다 원가에 넘기고 말았다.

 

사가고 한 달 있다 갖고 와서 썩었다고 교환해 달라질 않나 , 이렇게 두 접 잘라 놓고

 

한 접 인줄 알았다는 사람이 있질 않나 마늘 장수 15년에 별일이 다 있다.

 

천원을 더 벌겠다고 내가 이러고 있나,

 

먼지 뒤집어쓰고 아픈 몸에 서글픈 자괴감이 든다.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마늘 장사 때려 쳐야지 하며 골백번 외치고 나를 담금질 한다.

 

힘내라 정상용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어. 라고 말이다.

 

마늘은 점점 줄어가고 한차를 거의 팔고 있었다.

 

허리는 끈어지게 아프고 엘보로 아픈 팔이 또 아파왔다.

 

아내도 점점 얼굴이 폭탄 맞은 얼굴이 되 가고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다.

 

지쳐 앉아있는 아내에게 가서 붕어빵 사와서 먹자고 말했다.

 

5천원의 행복이랄까? 주변 상인 10명이 넘게 붕어빵 하나씩 먹으며,

 

맛있다고 고맙다며 즐거워했다. 작지만 , 아내에게 배운 나누는 행복은 즐거운 거 같다.

 

나는 남에게 도움도 주지 않고 도움도 안 받고 피해 안주는 사람으로 살면 되지 하며,

 

살았다. 그런데 아내는 뭐든 있으면 사람과 나누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깎는 손님에게 깎는 건 이발소에서나 깎는거유 하며 유머를 날리는 아내,

손님이 안사가도 인사를 하는 아내 , 구경하는 사람 , 나이든 어르신을 위해 의자를

 

한 개만 놓고 장사해도 되는데 , 서너 개 씩 갖다놓고 대민 서비스를 하고 있다.

 

내가 아팠을 때 1년 반을 같이 장사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내의 나눔에 물들어갔다.

 

목마른 사람위해 물과 컵을 준비해가고 추우면 끓는 물에 차를 준비해갔다.

 

나눠 먹을게 있으면 많은 사람을 위해 싸간다. 작지만 큰 기쁨이다.

 

붕어빵을 먹으며 아내는 말한다.

 

“이 상 중노동을 하고 안 아프면 정상이 아니여,

아픈게 정상이여, 우린 둘다 정상이야.” 하며 허허 웃는다.

 

마늘이 얼마 남지 않고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간다. 아내는 외친다.

 

“우리 이거 다 떨이 해보까나 영차 영차.”

 

아내의 전대와 내 전대는 점점 무거워 지고 그 힘겨움에 내 빤스 끈도 내려간다.

 

아내는 서비스 차원에서 보여주는 거냐며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자꾸 구부렷다 폈다를 반복하니 옷이 내려갈 수밖에....

 

떨이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고깃배를 가득 싫은 만선의 기쁨을 가득히 안은

 

어부의 마음과 수확 거하게 한 농부의 마음으로 차에 오른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꼬오옥 잡는다 .

 

몸도 안좋은데 애썼다고, 당신 덕분에 많이 팔수있었다고 .

 

아내는 아니라도 당신 정말 애썼다고 힘들어서 어떻하냐고 연신 나를 위로 해 주었다.

 

지친 아내를 위해 몸보신 해주기로 하고 새로 생긴 짬뽕 집에 갔다.

 

기존 짬뽕 개념을 확 뒤집는 황제 짬뽕이다. 그 집에서 젤 비싼 황제짬뽕을 시켰다.

 

꽃게, 싱싱한 소라 ,조개, 전복, 낙지, 각종 희안한 버섯등 전복이 살아 꿈틀거린다.

 

아내는 재미난 듯 신기한 듯 쳐다본다.

 

아내는 꿈들 거리는 전복을 보며 불쌍하고 징그럽다고 말한다.

 

아파서 몸부림치는 거 아니냐며 , 나는 그런 아내에게 유머를 날렷다.

 

“남자들이 젤 좋아하는 해물이 뭔줄 알어?”

 

“ 음 ... ... 글쎄.”

 

“전복 이래. 여자 생식기를 닮아서.”

 

“오우 그래? 정말 그리 보니 그렇네. 하하하.”

 

나는 아내의 입에 해물을 넣어준다. 오물오물 예쁜 아기 새 같다.

 

둘은 맛있는 음식에 황제가 된 듯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녹아내리며 ,

 

저녁 만찬을 즐겼다. 철없는 아내는 한 낮의 힘듬도 언제 잃어 버렸냐는 듯 ,

 

아이처럼 좋아 라 하며

 

“음~~~ 완전 맛있어. 다음에 도와주면 또 이렇게 맛난 거 사주는 거야” 하고 묻는다.

 

하하하 짬뽕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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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인심-4회

 

겨울이 봄에게 쉽사리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 아침에는 제법 찬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나는 마늘이 실린 차를 몰고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로 향했다.

 

작년 초겨울 김장철이 한 참 지나 비수기로 접어든지 오래 돼서 마늘은 몇 접 팔리지 않는

 

다. 오고가는 차량 운영비에 점심값을 제하고 또 추위를 막기 위해서 피운 석유난로 난방비

 

까지 따지다 보면 남는 게 거의 없다.

 

내 주위에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주위에 장꾼도 자리를 가끔씩 비우기도 하고 물론 나

 

도 그렇다. 하지만 난로에 불을 지펴 물이 끓으면 주변 사람들과 커피 한잔을 나눠 마시며

 

오늘은 장사가 좀 되려나 오늘은 누가 장에 안 나오는 날인가 푸념 섞인 농담을 건내기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내 앞에는 예전에 쓰던 키나 소쿠리를 비롯해 멍석, 체, 빗자루,

 

맷돌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파시는 환갑이 한참지난 만물상 장씨 아저씨가 계시고 옆으로는

 

나이는 만물상 장씨 아저씨보다 두어 살 아래인 뻥튀기 김씨 아저씨가 추억을 튀겨내려 자

 

리를 펴고 대각선 쪽에는 음악 CD나 USB를 파시는 50대 중반 최씨 형님이 커다란 스피커

 

로 유행하는 트롯트음악을 틀어놓고 장터에 흥을 돋우려 나온다.

 

오늘은 뻥튀기 김씨 아저씨가 자리를 비웠는데 그 자리에 suv차량을 몰고온 나이 지긋한

 

낮선 남자가 내게로 와서 옆에서 딸기를 좀 팔아도 되냐고 물어왔다.

 

마침 뻥튀기 튀기시는 분이 자리를 비웠으니 팔고 가셔도 된다고 하고 따뜻한 커피한잔을

 

건내 주었다. 딸기를 내리는 것도 도와드리고 장사꾼처럼 같아 보이지 않아서 딸기를 팔러

 

나온 까닭을 물어보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인근에서 하우스 딸기 농사를 짓는데 출

 

하가격이 너무 형편없어서 욱하는 마음에 직접 팔아 1KG 한 팩에 오천원이라도 받아 보겠

 

다고 나선 걸음이라는 거였다. 끝물이기도 하고 설날이 지나 매매율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

 

이기는 하지만 애써 자식처럼 키운 딸기를 헐값에 팔고 싶지 않은 마음이 와닿아 내 마음

 

까지 편하지는 않았다.

 

장터에 처음 나와 숫기도 없고 장사수완도 없어 보이는 터라 딸기는 잘 팔리지 않았다.

 

그때 음악CD 파는 최씨 형님이 나섰다. 일단 딸기 주인에게 오천원을 쥐어주고는 그 딸기

 

를 가져다가 음반 사러온 손님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싸고 맛있는 딸기가 단돈 오천원 한다며

 

홍보에 나서는 것 이었다. 단골음악 손님에게 강매하다시피 딸기를 떠안기는 거였다. 나도

 

질새라 박스를 구해가 안쪽 면에 딸기가 반값이라는 홍보문구를 대문짝만하게 써서 딸기 앞

 

에 놓아두고 내 물건 인양 팔아 주려 하였고 만물상 장씨 아저씨도 판매를 거들어 주었다.

 

농부는 네팩 이상을 사면 한 팩을 덤으로 주기도 했다. 가지고 나온 딸기를 모두 팔지는 못

 

했지만 주위에서 도와주어 2/3정도 소진한 것으로 보였다. 그 농부는 이렇게 도와줄지는 꿈

 

에도 생각하지 않았다며 받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고마움에 표시로 딸기를 한 팩씩을 나누어

 

주고는 돌아갔다. 뭐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아직 장터에 인심이라는 것이 살아있고 나도

 

작지만 한 몫 했구나 싶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편리한 대형마트에 기계적인 쇼핑문화와는 달리 거기에는 없는 정(情)이나 덤이 우리네 전

 

통시장에는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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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한 나의 삶의 변화 -3회

 

정보화와 세계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으로 먼저 생활권의 확대를 꼽

 

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사는 사업가 홍길동은 서울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 도쿄에서

 

점심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베이징에서 만찬에 참가한다. 과장되게 보여도 현재 가능한 일

 

로 느껴진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즘은

 

해외여행한번쯤 안다녀온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가 되 버렸다. 물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의 각지에 필요한 물품을 빠르게 찾고 주문해서 받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해 외국 사이트에서 직접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이나 대행해주는 사이트도 있다.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다가온 것이다. 문화나 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

 

고 있다. 지구반대편의 스포츠나 문화 예술 공연을 거의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

 

다. 국내외 유명 스포츠 선수의 경기를 실시간이나 다운로드를 통에 감상한다.

 

소셜 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독려하기도 한다.

 

인기를 끌었던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란 노래는 유튜브라고 하는 인터넷 매체를 타고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걸 보면 정보화나 세계화로 문화도 얼마

 

나 빨리 전달되고 공유하는지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자본의 흐름도 활발해지고 있다. 본인이 직접 외국의 기업에 주식을 살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증권사 펀드메니저를 통해서 먼 나라의 기업에 투자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해외 각국의 경제 상황이 빠르게 전달되고 분석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이나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국경을 넘어서 원하는 지식이나 정보도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 전문적이거나 개인적인 다양한 정보를 검색하고,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잘못된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개인정보의 유출로 말미암아 큰 피해를 보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공식적 국제기구나 민간단체들의 다른 나라에 정치적 경제적 움직임에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니세프를 통해 기부했다고 한다면, 지원 받는 국가에 작지만 영향을 미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해 일상생활도 개인이 소

 

속한 국민국가를 넘어 지구촌 시민이라고 하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5일장을 돌며 재래시장에서 마늘을 파는 마늘장수다. 정보화화 세계화란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직업으로 생각 되지만 정보화와 세계화로 인한 변화는 실감하고 있다.

 

지금은 취급하고 있지 않지만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중국산 마늘을 판매한 적이 있었다.

 

가깝지만 이념의 장벽으로 멀게만 느껴지던, 공산권인 중국산 마늘을 일반인인 내가 판매

 

할 수 있었다. 마늘을 사러오는 소비자들도 마늘가격에 대해 사전 정보를 나보다 더 잘 알

 

고 있는 분도 있었다. 장터를 둘러보면 거래되는 농수산물이나 생활용품에서 국외에서 생산

 

된 제품의 비중이 적지 않다. 글로벌 마켓인 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터는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아침에 신문이나 TV뉴스를 통

 

에 날씨 정보를 얻고 움직였다. 하지만 종종 예상과 달리 맞지 않은 날씨로 인해 때 아닌

 

비바람을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스마트폰을 통에 실시간 위성 구름사진을 보며

 

‘저기 비구름 몰려오네.’ 빨리 짐 싸서 집에가 서 쉬는 게 낫겠다. 하고 빠르게 바뀌는

 

날씨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의 전달이 얼마나 빨리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고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다른 한 예로, 장터에서도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류 현진 선수의 야구경기 장면을 실시간으로 즐기고 있다.

 

그리고 여행을 가더라도 길을 헤매거나 맛 집을 수소문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사전에 그곳까지 이동시간이나 관광정보를 검색하고 차량에 설치된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따

 

라 목적지까지 이동한다. 관광지에서도 영상자료를 통해 거침없이 찾아 관광을 한다.

 

식사 때가 되면, 미리 휴대전화를 통해 유명한 식당을 검색한다. 예약한 곳으로 찾아가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극장이나 공연도 직접 가지 않아도 예매를 하거나 표를

 

살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참 편리하다. 금융 업무도 참 편해졌다.

 

예전에는 마늘 매입대금을 직접 챙겨가서 지불하곤 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그 자리에서

 

계좌이체를 시키면서 돈다발을 소유하고 다니는 부담감을 덜 수 있다.

장터란 곳이 휴일이 거의 없는 개념이어서, 공과금을 내려면 장터에 좀 늦게 나가거나 일찍

 

퇴근해야만 했다. 지금은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은행을 직접 방문 하지 않고 자동이체나

 

폰뱅킹을 자주 이용한다. 또한 펀드를 통해 해외 주식에 투자 보기도 한다.

 

쇼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대중화 되면서, 가족 친구는 물론이고 직장이나 관심 있는 영역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자유롭게 주고받으며 정보도 공유 한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뉴스를 빠르게 접 하고 있다.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각종 원하는 정보나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하게 열려 있다.

 

그런데 세계화와 정보화가 되면서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다. 언젠가 물건을 사려고 대형마

 

트에 들렀다가 무심코 이벤트에 응모한 적이 있다. 며칠 후 보험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마케팅 상담원으로부터 받기 싫은 전화가 걸려왔다. 딱히 이벤트 응모과정에 개인정보 동의

 

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개인정보를 알아냈는지, 하루에 몇 번씩 걸려오는 마케팅이나

 

보이스 피싱을 유도하는 전화를 받은 경험이 있다. 뉴스에서도 접한바 와같이 국민

 

대부분의 정보가 노출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하다. 그렇다면 보이스 피싱, 스미싱,

 

파밍이니 하는 신종 사기 수법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뉴스나 주위에서 크고 작은 신종 보이스 피싱과 스미싱이나 파밍으로 인한 피해를 당한

 

경우를 접하면서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막강한 자본력과 정보력을 갖춘 기업형

 

마트들이 속속 생겨나는 것이 재래시장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이다.

 

과장된 기우일지는 모르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재래시장의 마늘장수는 자취를 감출지도

 

모르는 사실이다. 최근에 국내 한 청소년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수사결과 이슬람 무장단체에 포섭당해, 자발적으로 먼 이국땅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됐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세계화와 정보화이면에 폐해도 적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남아

 

경험 할 수 있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정보화와 세계화시대에 사는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우선 세계를 바라보는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계 전체의 흐름을 보는 눈을

 

먼저 기르고 거기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넘어선 다각화된 시각으로, 급변하는 세계를 직관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충실히 수행하면서, 작게는 지역사회에서 세계화에

 

기여할 부분이 없는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정치와 경제를 접하고 공부하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국가의 정치나 사회경제를 대하는 태도나 의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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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치유여행과 미래의 꿈 여행

 

여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감정이 목적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설렘이나

 

기대감이 아닐까? 그런 감정과 함께 나는 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여행에 대한 한 가지

 

기억이 있다. 그것은 치료를 목적으로 한 치유여행 이었다. 30년전 중학교 3학년 사춘기 시절,

 

나는 고등학교 진학과정의 학업 스트레스와 부모님의 잦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 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환영(幻影)에 시달렸다. 잠을 이루지 못

 

해서 강제로 부모님 손에 이끌려 신경과 상담과 함께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주사 맞고 약

 

을 먹어야만 겨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잠들 수 있었다. 며칠 입원해서 호전되면 퇴원해서 지내

 

다 같은 증세가 반복되면 입원 하곤 했다.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부모님께

 

서는 입원 치료를 포기하시고 주위분의 권유로 한적한 사찰에 나를 의탁하게 되었다.

 

그 절에서 요양하면서 건강을 찾은 사람도 적지 않고, 중요한 것은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다.

 

신경과에서는 약을 처방받고 심리치료는 사찰에서 병행하기로 선택 하셨다고 한다.

 

부모님은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셨지만, 정월이나 사월초파일(부처님 오신 날)에 어린 나를

 

절에 데려가곤 하셨다. 그곳에 인자한 주지스님이, 예불이 끝난 후에 부처님께 공양했던 음식

 

중에서, 과자를 나눠 주셨다. 절 많이 하고 소원을 빌면, 부처님이 그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신 걸 철썩 같이 믿은 적도 있었다. 나 또한 절에 따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사상

 

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기에, 사찰에 머무르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사찰로

 

이동하면서도, 거기 가서 지낸다고 불면증이 치료가 되겠어? 아니야 거기서 건강해진 사람도

 

있다잖아! 하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갈등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어느새 부모님과 함께 어딘지도 모르는 곳까지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이동했다.

 

어느 한적한 산골 마을 초입에 도착해 있었다. “내려야지 여기부터는 걸어 가야해”

 

어머님의 목소리에 며칠 잠 못 이룬 초췌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 암자로 올라가는 좁

 

다란 길 좌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꽃은 복사꽃

 

이었다. 복숭아 재배 농가들이 심어놓은 과수나무였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만개한 꽃들이 주위

 

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아름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오솔길 옆을 따라 계곡에서 시냇물

 

도 흘러 내려가고, 어디선가 간간히 새 소리도 들려 왔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한 시간이 조금

 

못 올라가서 조그만 건물 몇 채가 시아에 들어왔다. 내가 머무를 암자에 도착한 것이다.

 

아담한 분위기가 나는 절에서 인자하신 중년의 남자 스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목이 말라서 스님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샘에서 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을 축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꾀나 오래된 절인 듯 보였다.

 

부모님은 주지스님의 인도로 예불을 드렸다. 스님과 몇 마디 말씀을 나누시고는 걱정스런 눈

 

빛으로 산을 내려가셨다. 스님은 “마음 편하게 먹어요. 학생은 낳아 질거에요.” 하시며

 

내가 기거할 곳으로 안내 하셨다. 넓지는 않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된 방에 짐을 풀고 암자생활

 

이 시작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 켜고 불 때서 밥해먹는 그런 곳 이었다.

 

짐 정리 다 되면 당부할 말씀이 있다고, 스님께서 거처하시는 방으로 건너오라고 하셨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도자기 그릇에 차(茶)를 내리고 계셨다. “자 천천히 마셔 봐요.”

 

하시며 차를 건네셨다. 처음 접해서 그렇기도 하고, 맛도 생소했다. 마지못해 입에 댔다가 떼

 

 

는 정도였다.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니까 약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요.”

“그리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고, 예불은 본인이 마음 내키면 하도록 해요.”

 

그밖에 절에서 지킬 예절 몇 가지를 일러 주셨다. 엄격하지 않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속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은 해 나갔다. 불면증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다.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밤새 이름 모를 새소리와 벌레소리에 시달렸다. 온갖 망상에 사로잡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신경과 약을 복용 했지만 숙면에 들기는 어려웠다.

 

절에서는 새벽4시경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데 나는 거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학생 지낼만 해요? 마음을 편히 가져야 몸도 편해져서 숙면에 들어갈 수 있을텐데,

내 말에 따라 보는건 어떨지.....” 말씀하셔서

 

“스님 말씀대로 하면 잠 못 자는거 고치고 헛것 보는거 고칠 수 있나요?” 고 되물었을 때

 

“믿으세요! 언젠가 학생같이 잠못이루던 사람이 좋아져서 돌아간 적이 있으니까”

 

그말에 나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제발 헛것 안보고 잠 좀 실컷 자게 해주세요. 뭐든지 다 할

 

께요.”했더니 스님은 내가 하라는 대로 일단 한 달만 해보겠냐고 하셨다.

 

그 말씀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스님이

 

시키신 일은 다름 아닌 행자(불가에 입문해서 수행에 길을 걷는 사람)생활 체험 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불 올리고, 나무로 불 때서 밥 짓기를 했다. 허드렛일 돕기, 하루

 

에 부처님께 3번 108번 절하기, 경전 외우기 등 몸을 쉴새없이 움직였다. 허튼 생각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잠도 못 자는데 이걸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기왕 잠 못

 

자는 거 한번 해보자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달려들었다. 어렴풋이 보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스님이 오늘은 부처님께 108배(절)를 세 번 올리는 대신, 법당에 기다란 천(1000)알 염주가 있

 

는데, 그것을 한 알 돌리고 절 한 번씩 해서 그 염주가 다하면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성공하면 앞으로 백팔 배는 안 해도 된다고 하셨다. 하루에 세 번 절하는 것도 힘들고 번거로

 

워서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시키는 대로 절을 하기 시작했는데 생각

 

보다 염주에 길이가 길었다. 하는데 까지 해보기로 마음먹고, 염주 한 알 돌리고 절 한번 하기

 

를 반복했다. 염주 알이 절반정도 지날 무렵 다리가 후들 거리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법당에

 

쓰러져 버렸던 것 이다.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었고 눈을 떠보니 법당에 그대로 누워 있었

 

다. 예전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법당에서 내려와 시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10시경 염주를 돌리며 절하기 시작했다. 쓰러진 후 깨어난 시간이 오후 4시가 넘어서였던

 

것이다. 쓰러져 잠들었던 것이다. 내가 잠을자다니! 이럴수가 있을까? 너무 너무 신기했다.

 

그 날 이후로 불면증 증세는 차차로 사라져 가기 시작 했다. 신경과에서 지어준 약 없이 숙면

 

에 이르는데 3개월 정도 걸렸다. 물론 헛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주 가끔은 불면증세가 나

 

타나기도 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죽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다시 제발 할지도 모르고해서, 부모님과 스님의 권유로 학교는 다음해에 복학하기로 했다.

 

좀 더 암자에 머무르면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간간히 부모님도 다녀가시고 내가 집으로 부모님

 

을 찾아뵙기도 하면서 지냈다. 불면증 치료 후 암자 생활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꽃이나 풀벌레를 찾아다녔다. 하루 종일 바위에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마음 놓고 발가벗고 계곡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며, 세상에 큰 인물이 될 거라며 호연지기를 품어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님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중학교 때까지 삶의 과정을 털어 놓고, 어떻게 진로를 결정해야 하

 

는지 여쭙기도 했다. 그때마다 부모님처럼 아니 부모님 이상으로, 자상하고 인자한 말씀으로 이

 

야기를 공감해주셨다. 앞날에 대해 같이 이야기 하고 격려해 주시곤 하셨다.

암자에 머무르던 그 시절,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때, 자연과 종교를 접하면서 스스로에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성년이 되어서도 부모님과 친구와도 애인과도 나눌 수 없는 비밀스런 이야기도 꺼내놓았다.

 

자문을 구할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게 나에게는 커다란 행운 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내 인생에 카운슬링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스님은 현재 안 계시지

 

만, 스님이 입적하신 이후에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그 암자를 방

 

문한다. 부처님께 절하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마음을 추스르고 오곤 한다. 내 나름의 힐링 법인

 

셈이고 장소이다. 내 나이 마흔 여섯. 불혹이라고 불리우는 나이다. 인생 백세시대로 본다면, 이

 

제 반환점을 지나가고 있는 시기이다. 백세를 사는 것이 아니라 백년을 여행 한다고 생각해 보

 

면 어떨까? 여행할 목적지를 먼저 정하고, 50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60세에는 또 다른 곳

 

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나름에 성취하고 싶은 일이나 지위 꿈이 있다면, 진정가고 싶던

 

그곳으로 가기위해, 지금부터라도 계획을 세운다. 설렘에 잠 못 이루며, 성취에 그 날을 상상한

 

다. 기대감에 마음껏 부풀어 오른 가슴으로, 미래의 내가 있을 곳을 향해 가방을 꾸려야 하지

 

않을까? 내 인생에서 지금은 꿈을 쫒는 여행자다. 필수 항목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침반과 지도

 

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고 꿈꾸는 곳에, 반드시 데려다

 

줄, 지도가 맞는지 인생의 로드맵을 다시 한 번 펼쳐놓자.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성찰 해봐야

 

할 것 같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 하거나 아예 다시 그리자. 정확한 내 위치를 파악

 

하는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다음 시간과 비용이 얼마인지를 계산해야 한다.

 

내가 투자 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과 건강 및 재화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곳이 맞다고 확신이 섰다면, 방향을 잡아줄 신념의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모든 점검이 끝났다면 떠나자. 한 걸음 한걸음 차근차근히

 

지금 보다 더 나은 미래의 내 모습으로 여행을 떠나자. 가끔은 지치고 힘들지도 모르지만

 

흔들리지 않은 마음의 방향타를 바로잡고, 스스로 생각한 이상적인 그곳에 도착해서

 

인생의 희열과 자아실현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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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뱅이 마늘장수의 A학점 취득수기

 

교육학과에 입학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학년 1학기 기말시험을 치렀다.

 

전 과목 A학점을 받고나서 지난날을 반추(反芻)해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 직업은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마늘을 파는 일명 장돌뱅이다.

 

불혹(不惑)이라는 46세의 나이에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모든 게 아내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5월부터 11월까지만 마늘 장사를 하고 겨울엔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마늘 장사를 쉬었다. 겨울엔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

 

도 마늘 장수인데 겨울에 일을 안 하셨다. 무언의 그 영향을 받아 나도 한철 메뚜기 마냥

 

바짝 일하고 겨울엔 안식년을 갖듯이 쉬었다. 내 유일한 안식처인 게임을 하며 취미로 돈도

 

벌고 , 휴식도 하고 사업하는 친구일도 도와주고 편의점 야간알바 , 고기 집 서빙, 가스배달

 

등 온갖 막일을 하며 그렇게 살았다. 나의 그 버릇은 결혼을 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

 

평소 아내와 같이 좋은 프로가 있으면 봤다. KBS 에 퀴즈 대한민국 이라는 프로가 나왔는

 

데 나는 문제를 제법 잘 맞췄다. 가방끈이 짧아서 그렇지 평소 시사에 밝았다.

 

나름 박학다식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선 별명이 도사였다.

 

그렇게 아내와 같이 퀴즈를 풀다가 아내가 말했다.

 

“ 당신 내 소원이니 저기 한번 나가 보는게 어때?

 

당신 실력이 넘 좋아 아까워서 그래 돈도 벌고 좋잖어. ”

 

그래 심심풀이로 한번 나가보지 뭐 하고 청주 방송국에 예심을 보러갔다.

 

청주예심 이라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명의 사람을 뒤로 하고 본선에 오르게 되었다 .

 

그리고 서울 방송국에 첨으로 가게 되었다. 결혼할 때 메이크업 첨 받아보고 두 번째 받아

 

보는 메이크업 이었다. 여기저기서 불이 번쩍 번쩍 들어오고 촬영 중간 잠시 쉬는 동안 긴

 

장했는지 손이 차가왔다. 손이 차가운 줄도 몰랐는데 아내는 손을 잡으며 손이 차갑다고

 

따뜻이 잡아 주었다. 그에 힘을 얻었는지 첨 나간 퀴즈 프로에서 1등을 하게 된 것이다 .

 

여행 상품권 문제도 맞추고 일반인 한 달 월급은 번 것 같다. 이야 내가 이런 일을 해내다

 

니 파이널 라운드에서 달인이 못됨을 아쉬움으로 남긴 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봄이 되어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아내는 자랑스러운 남편 대단한 남편이라며 시장

 

에서 떡과 음료를 돌리고 잔치를 해주었다. 일 이 좀 한가해진 여름날 문득 못다 한 공부

 

를 더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검정고시 보는 건 어떠냐고 말해주었다. 이내 아

 

내가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에 가서, 졸업장을 떼고 선생님께 문제집을 얻어왔다.

 

인터넷으로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뽑아 공부를 했다. 수학은 아내가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한 달 만에 검정고시 패스를 했다.

 

그리고 “이참에 대학도 가? 수능한번 봐야지.!” 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하지만 또 장사를 해야 했고, 수능의 꿈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다른 아내를 만났다.

 

결혼 1년 후 아내는 나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남편 하는 일 안 도와 준 다는 말싸움 끝에

 

내가 이러려고 시집왔냐며 아내는 급기야 자살 기도 까지 했다.

 

내가 얼마나 모질게 굴었기에 아내가 그런 극단 적인 생각을 했는지 고민하며 참고 살다가

 

그게 화병이 됐는지, 중학교 때 생긴 병이 결혼 3년 만에 다시 생겼다.

 

잠을 못자고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등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조현병이었

 

다. 장사도 그만 두고 절을 다시 찾았다. 아내는 내가 병 치료를 하는 동안 심리상담 공부

 

를 했다. 컴퓨터 학원도 다니며 생계유지를 위해 취업 공부를 하고 있었다.

 

1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고, 몸이 좀 나아져서 운전대를 잡았다. 혼자장터에 나갈 만큼 몸

 

과 마음이 회복되지 않았고, 용기가 나질 않아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기꺼이 같이 하겠다고 했다. 한 장 가고 한 장 쉬고 한 장가고 한 장 쉬고 이렇게

 

장사를 해나갔다. 아내는 장사를 하면서도 계속 책을 봤다. 공부는 잘했지만 장사하는 집이

 

라 책 한권 안 봤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아내 옆에서 아내가 보는 책을 보

 

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내는 상담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워드 자격증도 따서 취업을 했다.

 

그리고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대학 간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우리 형편에 대학 갈 때냐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아내는 원서를 넣고 합격을 했다. 자기 힘으로 벌어서 가는 거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장터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컴퓨터 앞에서 강의를 듣고 있

 

었다. 어깨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전문대 졸업자로 방송대 교육학과 2학년에 편입해서 영상강의를 듣고 있었다.

 

자꾸 눈이 화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아내처럼 공부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재래시장에 마늘장수가 공부해서 뭐에다 쓸까’ 하다가도 ‘나도 대학한번 가봐야지’ 하며,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번민에 빠지게 되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건강상의 이유로 고등학

 

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게 한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가끔 꿈속에서 학교를 다

 

니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일 하면서도 대학공부 할 수 있다잖아’

 

나의 내면세계의 갈등은 지킬박사의 승리로 끝났다. 작년 봄 꿈에도 그리던 대학 생활이 시

 

작되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 출석 수업을 받고 시험을 치르던 때가 생각난다. 서술형 시험을 처음 접하게 됐다.

 

당혹감을 감출 수 가 없었다. 선다형 문제나 단답형 문제만 보던 내가, 그 것도 30년 전 이

 

야기가 아닌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출석수업 7주일 후 시험을 치렀다.

 

강의실을 나오는데 내가 쓴 글이 문맥이 맞는지도 가물거릴 정도였다.

 

출석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써보기를 20회 정도 한 것으로 기억 한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막상 시험을 치러보니 그리 녹녹치는 않았다.

 

한편 그만큼 쓸 수 있었던 내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 다음은 과제물 제출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글타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내가 컴퓨터로 리포트 제출이라니, 제대

 

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독수리도 아닌 병아리 타법으로 문

 

서 작성 했다.

 

그때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쓰기를 반복했다.

 

힘겹게 과제물을 작성해서 기안 안에 올렸다. 말하자면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학기에 마지막 관문인 기말고사는 또 왜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을까?

 

튜터가 일러준 일정에 맞춰서 학습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처음엔 저녁 시간에 한두 시

 

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재래시장에서 무거운 마늘과 사람과의 흥정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이내 녹초가 되어 영상강의도 듣기 힘들 정도였다. 교수님 말씀이 자장가로 들려

 

꼬박꼬박 졸기도 했다. 교과서는 제쳐두고 강의나 다보고 기말 시험을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한 학기라도 마쳐봐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방법을

 

모색했다. 새벽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강의를

 

듣기로 마음먹었다. 장터에 나가서는 하루 30페이지 이상 교재를 읽기로 정했다.

 

새벽에 눈을 부비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저녁시간 보다는 휠씬 능률

 

적 이었다. 새벽시간을 활용하고자 한 내 생각은 적중했다. 오일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집과

 

거리가 먼 장의 경우 5시전에 일어나 강의를 듣고 새벽밥을 먹고 장터에 나갔다.

 

기말 시험일 내에 강의를 한 번씩 시청하는 것은 가능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교과서를 기말고사 전까지 읽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로 다가왔다.

 

교과서는 수필이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학자들이나 이론도 생소했지만, 교수님들이 쓰시는 원어나 단어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터라

 

인터넷을 뒤지며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 해야만 했다. 읽는데 그치지 않고 그 것을 내

 

면화 하는데는 더욱 더 힘이 들었다. 그 것도 시끌벅적한 오일장 환경에서 책을 읽는다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래시장 이다보니 마늘을 여러 접 살테니, 가격을 에누리 해달

 

다 하시는 분도 계셨다. 어디 마늘이냐 쪽은 어떠냐 등등 흥정이 길어질 때도 있다.

 

그러면 읽고 있던 부분을 표시해 놓고 마늘을 팔았다. 책을 다시 읽고 그렇게 교과서를 봤

 

다. 어떤 분이 교과서 표지를 보고 “어려운 책을 다 읽으시네. 열심히 하세요” 하며

 

격려해 주셨다. 학습하는데 많은 힘이 되었다. 때로는

 

“마늘장수 많은데, 책 읽는 자네 마늘 팔아 주려고 가까운 곳에

마늘장수 제쳐두고 여기 까지 왔네” 하시는

 

어르신의 말씀에, 내색 하지는 않았지만 감동의 눈물이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무한 신뢰와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아내는

 

“당신은 할 수 있어 검정고시도 단번에 통과 했잖아” 하며

 

1학기라도 잘 마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거라면서 지친 나를 독려 해 주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아내는 교육학과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군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아내는, 상사 눈치를 보면서 기출 문제를 과목별로 뽑아주었

 

다.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문제지를 훑어보는데 모르는 것이

 

반이 넘었다. 책도 제대로 정독 하지 못한 상태였다. 강의에서 보고 들은 내용도 가물가물

 

했다. 기출문제를 모두 풀고 나서 채점을 하고나니 틀린 문제가 절반 정도 나왔다.

 

과락이 예상되는 결과였지만 실망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 틀린 문제를 교과서에서 찾아 공부했다. 다시 기출문제를 풀어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교과서에 중요한 내용이 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2주에 시간이 지나고 기말고사를 치르고 고사장을 나섰다.

 

대입도 치러보지 못 했지만 대입고사를 치른 학생들처럼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3일후인가 정답이 공시 되었다. 정답을 맞춰보는 손길이 약간 떨리고 손에 살짝 땀이 배었

 

다. 평균을 내 보니 80점이 넘는 점수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뒤에서 점수 매기는 걸 지켜보던 아내가

 

“와우! 국가 장학생 축하해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지” 하며

 

당사자인 나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내와 나는 38세와 34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했다. 철도공무원 이셨던 장인어른 아래 대학 교육을 받은, 나름 번

 

듯한 집안에 장녀가,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나에게 시집와 준 건 축복 이었다.

 

사람 하나 믿고 장인의 우려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나와 결혼 해준 아내였다.

 

이제 결혼 10년차 인데 아직도 가끔씩 아내를 업어주곤 한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아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것이 남편의 마음이다.

 

언제나 “당신은 할 수 있어 난 당신을 믿어” 그 말 한마디에,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나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아내에게, 작은 성적으로 나마 보답할 수가 있

 

어서 다행이었다. 2학기에는 대학영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를 보이콧 시키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나는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성적은 과락을 겨우 면하는 정도였지만

 

공공시설의 영어로 된 안내문에, 관심을 가지고 해석 하려는 시도를 하는 걸보면,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다. 2학기에는 1학기때와는 좀 달라졌다. 나름 체계적인 계획을 짜고, 시간

 

을 안배하며 학습 진도를 맞춰 학습을 진행해 나갔다. 장터에 떠돌이 장사꾼의 차량에서 나

 

오는 확성기 목소리는 시끄러웠지만, 배우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마늘에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학습시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일찍 일어나야 했고 조금 더 늦게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기말고사를 한번

 

치러 본 터라 2학기는 조금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다. 노력에 보답 하듯이 목표한 평균 80

 

점을 넘길 수 있었다. 2학년에 올라가서는 한 과목이라도 100점 맞아 보리라는 야심찬 계

 

획도 세워 보게 되었다. 그런데 항상 문제가 되는 건 시간이었다. 마늘장사의 특성상 5~6

 

월 과 10~11월이 가장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 학습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과 동절기는 비수기인데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선행학습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학과 선배님이시라 책은 구비되어 있으니 이보다 나은 여건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강의는 시청 할 수 없지만 교과는 미리 볼 수 있었다. 강의를 보면서 거기에 맞춰 교

 

과서를 학습하면 이상적이겠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학습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름 열심히 학습하고, 기출문제로 마무리 점검을 했다.

 

80점정도 안팎의 점수가 나왔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당일,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심정

 

으로, 두 번에 걸쳐 시험답안을 점검하고 정답을 마킹했다. 시험장을 나서는 마음은 홀가분

 

했다. 며칠 후 정답확인을 해보고 나서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0점 이하의 과목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조금씩 발전하는 내 모습을 보며 더

 

나은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무엇이 나름 성공적으로 학습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몇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의

 

지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양 하겠지만 누구나 한번쯤 학업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찾아

 

온다. 그때 스스로 나는 극복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흔히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보다 바람직한 일임을 재확인 할 수 있는 계기와 함께,

 

의지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조력자의 지지를 얻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족의 사랑과 믿음은 학습장애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힘들 때 건네는 아내의 따뜻

 

한 말 한마디가 크나큰 힘이 되었다. 내 경우는 아니지만, 동아리나 선배, 튜터, 교수님들과

 

상의 하고, 지도를 받는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학업을 수행 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달라지고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달라진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폭과 깊이가 달라졌

 

고, 함께 사용하는 언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는 점이다. 나를 떠나 나를 바

 

라 보기는 어렵지만, 지금 학업을 포기 하고자 하는 학우님이 계신다면, 입학 전 나의 모

 

습과 현재의 내 모습을 한번쯤 관조((觀照)해 보시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작거나 큰 차이

 

에 상관없이 입학 전 보다 더 나은 모습의 나를 발견 했다면 ,분명 가치 있는 길을 걷고 있

 

는 것이다. 발전된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배움의 밑거름은 없다고 감히 생

 

각한다. 힘들 때면 떠올리는 금언 하나를 끝으로 적어본다.

 

Sapere aude! - 아는 데 용감하라.

Sapientia, quae sola libertas est! - 지혜, 그 유일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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