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고독한 엄마가 아이를 잘 키운다 - 옆집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는 소신육아법
다케나가 노부유키 지음, 김경은 옮김 / 다산에듀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독의 힘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에서 반발짝 벗어나

자기 자신과 그내면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고독의 힘을 키우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 - 문화유산 해설사 따라 사찰 여행
박상용 지음, 호연 그림 / 낮은산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에게 겉치레로 대답하는것은 입으로 짓는 죄라고 합니다.

 

좋은것을 깨달으면 다른 사람과 나누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 어쩐지 의기양양 도대체 씨의 띄엄띄엄 인생 기술
도대체 지음 / 예담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때론 웃프고 , 때론 웃기고, 진지하고

삶의 지혜를 엿볼수 있습니다.

 

술술 넘어가는 재밌고 유쾌한 책 이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은이

 

정상용

2018.2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졸업(전 학년 성적우수 장학생)

전)역술인(10년)

현)마늘장수(20년)

KBS 퀴즈대한민국 1등 MBC 라디오 두시의 데이트 퀴즈코너 1등

KBS 다큐 스페셜 ‘선물’출연 KBS 1:100출연, KBS 세상의 아침 출연

KBS 도전 골든벨 출연 KBS 국민패널 스토리 여름호(나는 5일장 마늘장수 정상용입니다)

 

이연화

2016.8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전)직업 상담사

현)자유기고가, 수필가

SBS 솔로몬의 지혜출연 KBS 다큐 스페셜 ‘선물’출연 KBS 1:100출연

KBS 세상의 아침 출연 KBS 도전 골든벨 출연 MBN 퀴즈선수권대회 증평군대표 출전

MBC 지금은 라디오 시대 출연, 기고 KBS 아침마당 , KBS 저널,

좋은생각 등 다수 대중매체 기고

일자리창출 기여 충북도지사 상 수상, 충북 여백문학회 입선.

 

 

 

 

 

 

 

 

 

 

 

 

 

 

 

 

 

 

 

 

서문

 

2016년 가을 둘이 마늘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린 참 남다르게 살았어.”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내보면 어떨까.?” 라고 이야기를 하다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누구나 나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기에 모두가 남다른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평범에서 조금 벗어난 삶을 살은 우리로써 방송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며,

 

삶에 적용시키며 성숙, 성장해 나간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긍정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교육을 통해 그것을 더 깨달음에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과 나누기 위해 작지만 큰 공부를

 

하고 있는 삶을 쓴다. 남편의 바람처럼 인문학과 마늘장수의 삶을 접목시켜 썼고,

 

아내의 매일 몇 시간씩 신문을 보는 신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속의 이야기를 교육학

 

공부과정과 함께 일기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스토리 구성상 1%의 조미료가 들어가지만

 

99%가 사실에 기반 한 글이다. 평상시에도 대화를 많이 하는 우리 부부지만

 

이글을 쓰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

 

다. 어느 책에서 책 한권을 쓰면 박사논문 하나 쓴 거와 맞먹는 거라고 하더니 정말 어려움

 

도 많았다. 두 달 동안 절반이상을 쓰면서 눈에 사리가 두 개 나오고 다래끼가 세 번이나

 

났다. 하지만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다. 요즘 금 수저 흙 수저 논하는데 어떤 수저에 먹든

 

맛있게 행복하게 먹으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 들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가지며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본문

2015년 12월

 

장돌뱅이 마늘장수의 A학점 취득수기

 

교육학과에 입학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학년 1학기 기말시험을 치렀다.

 

전 과목 A학점을 받고나서 지난날을 반추(反芻)해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 직업은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마늘을 파는 일명 장돌뱅이다.

 

불혹(不惑)이라는 46세의 나이에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모든 게 아내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5월부터 11월까지만 마늘 장사를 하고 겨울엔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마늘 장사를 쉬었다. 겨울엔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

 

도 마늘 장수인데 겨울에 일을 안 하셨다. 무언의 그 영향을 받아 나도 한철 메뚜기 마냥

 

바짝 일하고 겨울엔 안식년을 갖듯이 가졌다. 내 유일한 안식처인 게임을 하며 취미로 돈도

 

벌고 , 휴식도 하고 사업하는 친구일도 도와주고 편의점 야간알바 , 고기 집 서빙, 가스배달

 

등 온갖 막일을 하며 그렇게 살았다. 나의 그 버릇은 결혼을 해서도 변하지 않았다 .

 

평소 아내와 같이 좋은 프로가 있으면 봤다. KBS 에 퀴즈 대한민국 이라는 프로가 나왔는

 

데 나는 문제를 제법 잘 맞췄다. 가방끈이 짧아서 그렇지 평소 시사에 밝았다.

 

나름 박학다식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선 별명이 도사였다.

 

그렇게 아내와 같이 퀴즈를 풀다가 아내가 말했다.

 

“ 당신 내 소원이니 저기 한번 나가 보는게 어때?

 

당신 실력이 넘 좋아 아까워서 그래 돈도 벌고 좋잖어. ”

 

그래 심심풀이로 한번 나가보지 뭐 하고 청주 방송국에 예심을 보러갔다.

 

청주예심 이라지만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명의 사람을 뒤로 하고 본선에 오르게 되었다 .

 

그리고 서울 방송국에 첨으로 가게 되었다. 결혼할 때 메이크업 첨 받아보고 두 번째 받아

 

보는 메이크업 이었다. 여기저기서 불이 번쩍 번쩍 들어오고 촬영 중간 잠시 쉬는 동안 긴

 

장했는지 손이 차가왔다. 손이 차가운 줄도 몰랐는데 아내는 손을 잡으며 손이 차갑다고

 

따뜻이 잡아 주었다. 그에 힘을 얻었는지 첨 나간 퀴즈 프로에서 1등을 하게 된 것이다 .

 

여행 상품권 문제도 맞추고 일반인 한 달 월급은 번 것 같다. 이야 내가 이런 일을 해내다

 

니 파이널 라운드에서 달인이 못됨을 아쉬움으로 남긴 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봄이 되어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아내는 자랑스러운 남편 대단한 남편이라며 시장

 

에서 떡과 음료를 돌리고 잔치를 해주었다. 일 이 좀 한가해진 여름날 공부하고 싶단 생각

 

이 들었다. 아내가 검정고시 보는 건 어떠냐고 말해주었다. 아내가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

 

에 갔다. 졸업장을 떼고 선생님께 문제집을 얻었다. 인터넷으로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뽑

 

아 공부를 했다. 수학은 아내가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한 달 만에 검정고시 패스를 했다.

 

그리고 이참에 대학도 가 수능한번 봐야지 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하지만 또 장사를 해야

 

했고, 수능의 꿈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결혼 후 3년 만에 너무나 다른 아내를 만났다.

 

나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고추 단 안 들어주고 일 안도와 준다는 말에,

 

내가 이러려고 시집왔냐며 아내는 급기야 자살 기도 까지 했다.

 

내가 얼마나 아내가 그런 극단 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나쁜 놈인가 생각하며 참고 살았다 .

 

근데 그게 화병이 됐는지, 중학교 때 생긴 병이 다시 생겼다.

 

잠을 못자고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등 말 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장사도 때려 치고 다시 절을 찾았다. 아내는 내가 병 치료를 하는 동안 심리상담 공부를 했

 

다. 컴퓨터 학원도 다니며 취업 공부를 하고 있었다. 1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고 다시 먹

 

고 살아야 했기에 운전대를 잡았다. 혼자는 용기가 나질 않아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기꺼이 같이 하겠다고 했다. 한 장 가고 한 장 쉬고 한 장가고 한 장 쉬고 이렇게

 

장사를 해나갔다. 아내는 장사를 하면서도 계속 책을 봤다. 공부는 잘했지만 장사하는 집이

 

라 책 한권 안 봤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아내 옆에서 아내가 보는 책을 보

 

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내는 상담사 자격증도 따고 워드 자격증도 따서 취업을 했다.

 

그리고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대학 간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우리 형편에 대학 갈 때냐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아내는 원서를 넣고 합격을 했다. 자기 힘으로 벌어서 가는 거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장터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컴퓨터 앞에서 강의를 듣고 있

 

었다. 어깨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전문대 졸업자로 방송대 교육학과 2학년에 편입해서 영상강의를 듣고 있었다.

 

자꾸 눈이 화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아내처럼 공부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재래시장에 마늘장수가 공부해서 뭐에다 쓸까’ 하다가도 ‘나도 대학한번 가봐야지’ 하며,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번민에 빠지게 되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건강상의 이유로 고등학

 

교를 마치지 못한게 한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가끔 꿈속에서 학교를 다니는 꿈

 

을 꾼 적도 있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일 하면서도 대학공부 할 수 있다잖아’

 

나의 내면세계의 갈등은 지킬박사의 승리로 끝났다. 작년 봄 꿈에도 그리던 대학 생활이 시

 

작되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처음 출석 수업을 받고 시험을 치르던 때가 생각난다. 서술형 시험을 처음 접하게 됐다.

 

당혹감을 멈출 수 가 없었다. 선다형 문제나 단답형 문제만 보던 내가, 그 것도 30년 전 이

 

야기가 아닌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출석수업 7주일 후 시험을 치렀다.

 

강의실을 나오는데 내가 쓴 글이 문맥이 맞는지도 가물거릴 정도였다.

 

출석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써보기를 20회 정도 한 것으로 기억 한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막상 시험을 치러보니 그리 녹녹치는 않았다.

 

한편 그만큼 쓸 수 있었던 내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 다음은 과제물 제출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글타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내가 레포트 제출이라니,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독수리도 아닌 병아리 타법으로 문서작성 했다.

 

그때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쓰기를 반복했다.

 

힘겹게 과제물을 작성해서 기안 안에 올렸다. 말하자면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었다.

 

학기에 마지막 관문인 기말고사는 또 왜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을까?

 

튜터가 일러준 일정에 맞춰서 학습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처음엔 저녁 시간에 한두 시

 

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재래시장에서 무거운 마늘과 사람과의 흥정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이내 녹초가 되어 영상강의도 듣기 힘들 정도였다. 교수님 말씀이 자장가로 들려

 

꼬박꼬박 졸기도 했다. 교과서는 제쳐두고 강의나 다보고 기말 시험을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한 학기라도 마쳐봐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방법을

 

모색했다. 새벽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강의를

 

듣기로 마음먹었다. 장터에 나가서는 하루 30페이지 이상 교재를 읽기로 정했다.

 

새벽에 눈을 부비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저녁시간 보다는 휠씬 능률

 

적 이었다. 새벽시간을 활용하고자 한 내 생각은 적중했다. 오일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집과

 

거리가 먼 장의 경우 5시전에 일어나 강의를 듣고 새벽밥을 먹고 장터에 나갔다.

 

기말 시험일 내에 강의를 한 번씩 시청하는 것은 가능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교과서를 기말고사 전까지 읽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로 다가왔다.

 

교과서는 수필이나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학자들이나 이론도 생소했지만, 교수님들이 쓰시는 원어나 단어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터라

 

인터넷을 뒤지며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 해야만 했다. 읽는데 그치지 않고 그 것을 내

 

면화 하는데는 더욱 더 힘이 들었다. 그 것도 시끌벅적한 오일장 환경에서 책을 읽는다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재래시장 이다보니 마늘을 여러 접 살테니, 가격을 에누리 해달

 

다 하시는 분도 계셨다. 어디 마늘이냐 쪽은 어떠냐 등등 흥정이 길어질 때도 있다.

 

그러면 읽고 있던 부분을 표시해 놓고 마늘을 팔았다. 책을 다시 읽고 그렇게 교과서를 봤

 

다. 어떤 분이 교과서 표지를 보고 “어려운 책을 다 읽으시네. 열심히 하세요” 하며

 

격려해 주셨다. 학습하는데 많은 힘이 되었다. 때로는

 

“마늘장수 많은데, 책 읽는 자네 마늘 팔아 주려고 가까운 곳에

마늘장수 제쳐두고 여기 까지 왔네” 하시는

 

어르신의 말씀에, 내색 하지는 않았지만 감동의 눈물이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무한 신뢰와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아내는

 

“당신은 할 수 있어 검정고시도 단번에 통과 했잖아” 하며

 

1학기라도 잘 마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질 거라면서 지친 나를 독려 해 주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아내는 교육학과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군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아내는, 상사 눈치를 보면서 기출 문제를 과목별로 뽑아주었

 

다.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문제지를 훑어보는데 모르는 것이

 

반이 넘었다. 책도 제대로 정독 하지 못한 상태였다. 강의에서 보고 들은 내용도 가물가물

 

했다. 기출문제를 모두 풀고 나서 채점을 하고나니 틀린 문제가 절반 정도 나왔다.

 

과락이 예상되는 결과였지만 실망할 시간이 없었다. 우선 틀린 문제를 교과서에서 찾아 공부했다. 다시 기출문제를 풀어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교과서에 중요한 내용이 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2주에 시간이 지나고 기말고사를 치르고 고사장을 나섰다.

 

대입도 치러보지 못 했지만 대입고사를 치른 학생들처럼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3일후인가 정답이 공시 되었다. 정답을 맞춰보는 손길이 약간 떨리고 손에 살짝 땀이 배었

 

다. 평균을 내 보니 80점이 넘는 점수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뒤에서 점수 매기는 걸 지켜보던 아내가

 

“와우! 국가 장학생 축하해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지” 하며

 

당사자인 나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내와 나는 38세와 34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했다. 철도공무원 이셨던 장인어른 아래 대학 교육을 받은, 나름 번

 

듯한 집안에 장녀가,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나에게 시집와 준 건 축복 이었다.

 

사람 하나 믿고 장인의 우려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나와 결혼 해준 아내였다.

 

이제 결혼 10년차 인데 아직도 가끔씩 아내를 업어주곤 한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아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것이 남편의 마음이다.

 

언제나 “당신은 할 수 있어 난 당신을 믿어” 그 말 한마디에,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나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아내에게, 작은 성적으로 나마 보답할 수가 있

 

어서 다행이었다. 2학기에는 대학영어라는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를 보이콧 시키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나는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성적은 과락을 겨우 면하는 정도였지만

 

공공시설의 영어로 된 안내문에, 관심을 가지고 해석 하려는 시도를 하는 걸보면,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다. 2학기에는 1학기때와는 좀 달라졌다. 나름 체계적인 계획을 짜고, 시간

 

을 안배하며 학습 진도를 맞춰 학습을 진행해 나갔다. 장터에 떠돌이 장사꾼의 차량에서 나

 

오는 확성기 목소리는 시끄러웠지만, 배우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마늘에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학습시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일찍 일어나야 했고 조금 더 늦게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기말고사를 한번

 

치러 본 터라 2학기는 조금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다. 노력에 보답 하듯이 목표한 평균 80

 

점을 넘길 수 있었다. 2학년에 올라가서는 한 과목이라도 100점 맞아 보리라는 야심찬 계

 

획도 세워 보게 되었다. 그런데 항상 문제가 되는 건 시간이었다. 마늘장사의 특성상 5~6

 

월 과 10~11월이 가장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 학습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한여름과 동절기는 비수기인데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선행학습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학과 선배님이시라 책은 구비되어 있으니 이보다 나은 여건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강의는 시청 할 수 없지만 교과는 미리 볼 수 있었다. 강의를 보면서 거기에 맞춰 교

 

과서를 학습하면 이상적이겠지만,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학습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름 열심히 학습하고, 기출문제로 마무리 점검을 했다.

 

80점정도 안팎의 점수가 나왔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당일,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심정

 

으로, 두 번에 걸쳐 시험답안을 점검하고 정답을 마킹했다. 시험장을 나서는 마음은 홀가분

 

했다. 며칠 후 정답확인을 해보고 나서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0점 이하의 과목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조금씩 발전하는 내 모습을 보며 더

 

나은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무엇이 나름 성공적으로 학습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몇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의

 

지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양 하겠지만 누구나 한번쯤 학업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찾아

 

온다. 그때 스스로 나는 극복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흔히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보다 바람직한 일임을 재확인 할 수 있는 계기와 함께,

 

의지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조력자의 지지를 얻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족의 사랑과 믿음은 학습장애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힘들 때 건네는 아내의 따뜻

 

한 말 한마디가 크나큰 힘이 되었다. 내 경우는 아니지만, 동아리나 선배, 튜터, 교수님들과

 

상의 하고, 지도를 받는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학업을 수행 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달라지고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달라진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폭과 깊이가 달라졌

 

고, 함께 사용하는 언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는 점이다. 나를 떠나 나를 바

 

라 보기는 어렵지만, 지금 학업을 포기 하고자 하는 학우님이 계신다면, 입학 전 나의 모

 

습과 현재의 내 모습을 한번쯤 관조((觀照)해 보시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작거나 큰 차이

 

에 상관없이 입학 전 보다 더 나은 모습의 나를 발견 했다면 ,분명 가치 있는 길을 걷고 있

 

는 것이다. 발전된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배움의 밑거름은 없다고 감히 생

 

각한다. 힘들 때면 떠올리는 금언 하나를 끝으로 적어본다.

 

Sapere aude! - 아는 데 용감하라.

Sapientia, quae sola libertas est! - 지혜, 그 유일한 자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