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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책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검은 색 양복과 머리 위에 눌러쓴 흐릿한 회색빛의 모자, 그 사이에는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의 얼굴이 아닌 몇 권의 책이 쌓여있고 입이라 생각되는 부위에서 쓸쓸하게 타고 있는 담배 한 개비만이 이 물체가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위험한 책>이라는 제목이 표지의 그림과 한데 잘 어우러져 강렬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우리는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굉장한 호감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있으면 부모님이 착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학창시절 책을 읽는 학생들은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짓는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소녀라고 불렸으며 대학시절 책을 한 권씩 옆에 끼고 다니는 학생들을 문학도라 부르는 찬양 아닌 찬양이 이어졌다. 헌데 이 책은 그 반대이다. 책이 얼마나 위험한지, 시집을 읽다 차에 치어 죽은 블루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머리로 떨어진 백과사전 때문에 반신마비가 된 노교수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몽땅 삼켜버리고 죽은 개의 이야기까지 책이 이토록 사람의 인생에 위험할 수 있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로 읽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상하다. 책은 위험한 것이라 단정 짓고 시작한 이 이야기가 사실 책을 너무나 사랑한 한 사람의 러브스토리였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랑이 아닌 사람과 책 사이의 사랑.
<위험한 책>의 화자인 "나"는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부인인 블루마와 이별하게 되었다. 교수였던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해 수업을 준비하고 뒷정리를 하던 어느 날 블루마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한다. 우루과이 우표를 붙이고 있을 뿐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개봉한 봉투 속에는 시멘트 가루를 풀풀 날리는 조셉 콜래드의 <섀도 라인>이라는 책이 들어있었다. 책 첫 표지에서 블루마가 이전에 남긴 듯 한 메시지를 발견한 "나"는 이 책을 보낸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작은 단서들을 근거로 이 책의 발신인을 찾아 떠나기로 한 "나". 시멘트벽에서 막 떼어낸 것 같은 책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일까? 부인의 하룻밤 불같은 사랑의 상대였을지도 모를 책의 발신인을 찾아간 "나"는 책을 지독히도 사랑했던 카를로스라는 사내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카를로스라는 사람은 책에 미치도록 집착하는 독서편집광이었다. 그는 책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란 공간에는 모두 책을 쌓아놓고 더부살이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사랑하는 정도가 너무 지나쳐 내 눈에는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책을 좋아해 지속적으로 독서생활을 하며 책을 모으다 보면 어느 순간 버겁게 느껴지는 시점이 찾아오게 된다. 소화불량처럼 과식상태인 책장을 보다가 안쓰러워 다른 책장을 들이면 그 책장의 조금 남은 부분을 위안으로 삼으며 또 책을 사들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느껴봤을 이야기인지라 카를로스의 생활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역시나 이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책이라는 매체에 지독하게 중독된 이런 카를로스의 모습이 바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했던 "위험"의 한 부분일 것이라 생각하며 계속해서 책장을 넘겨보았다.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얇은 책이 이상하리만큼 집중이 되지 않고 조금 어렵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 읽기 쉽게 써진 글은 아니었기에 내 능력부족으로 작품 속에 담긴 깊은 뜻까지는 잡아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알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지독히도 사랑했던 한 사람과 그 사람이 어떠한 상실의 계기로 책들을 매몰해버린 사연,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었을지도 모를 그것을 부수었다는 것이다.
<위험한 책>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졌던 약간의 위화감과 호기심은 책을 다 읽을 즈음엔 피곤함과 복잡함 그리고 공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글의 서두에서 작가가 강조한 극단적인 책의 위험성은 후반부로 가면서 책이란 존재가 얼마나 사람의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고 변화하게 만들 수 있는 지로 그 초점을 바꾸어 조금은 쓸쓸하고 마음 한 구석이 시큰거리는 결말을 끌어내고 있었다. 작가가 책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띄우고 싶어 풍자적인 소설을 지어낸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다지 유쾌하거나 반짝반짝한 소설은 아니었다.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작가의 포인트만 보일 뿐 뭔가 멜랑콜리하면서도 매캐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맘에 들지 않았다는 책의 서평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있는 나는 뭘까? 하핫. 갑자기 밀려오는 당황스러운 허탈감과 쓸쓸함에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