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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예약 구매로 미리 결제해두었던 기욤 뮈소의 신작 <종이 여자>가 도착한 것은 12월이 허리춤에 걸려있던 어느날이었던 것 같다. 예약 구매자에게만 준다는 주간 플래너도 탐이 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책 표지에 그려진 아가씨의 모습이 묘하게 몽환적이고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아 '기욤 뮈소의 신작인데 뭐, 구매해도 나쁠 건 없지.'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만나게 된 <종이 여자>는 2주 가까운 시간이 흐르도록 거실 한편에서 인내심 있게 나를 기다려주었다. 생각보다 두툼했던 존재감 때문인지 아니면 연말의 들뜬 분위기 때문인지 나는 그렇게 <종이 여자>를 외면해왔던 것이다. 2011년의 새아침이 밝던 날 드디어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읽자!' 춥다는 핑계로 잠들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책의 첫 장을 펼쳐들었다. 이런, 난 도대체 지금까지 무얼 한 걸까? 왜! 도대체! 어째서 이 책을 방치했단 말인가.
베스트셀러 작가인 주인공 톰은 천사 같은 외모를 가진 천재 피아니스트 오로르와 사랑에 빠진다. 헌데 영원하리라 믿었던 톰의 그 사랑은 마치 시한부 인생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톰의 잘못이 아닌 오로르의 이별 통보로 이어진 이 준비되지 않은 상실은 잘 나가던 작가였던 톰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고 그 후 톰은 작품을 쓸 생각도, 용기도 없이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친구인 밀로를 통해 자신이 파산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날, 그가 쓰고 있던 책 <천사 3부작>의 한 인물 빌리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톰 앞에 나타나게 된다. 책 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믿을 리 없던 톰은 빌리를 미친 여자라 생각하고 옥신각신 싸우며 본의 아니게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된다. 오로르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함께 멕시코로 떠나는 톰과 빌리. 그들 앞에 펼쳐진 이야기들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찬 사랑이라는 기적이었다.
기욤 뮈소의 전작들은 대부분 상처를 가진 영혼들과 정신 분석학자 등 뭔가 상처받은 강아지 같은 영혼들의 집합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신간 <종이 여자>에서는 작가와 허구의 세계에서 왔다는 여인으로 새로운 변신을 도모했다. 책의 장수를 거듭해 갈수록 이것은 기욤 뮈소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작가인 톰은 기욤 뮈소 자신을, 톰이 사랑하게 된 빌리는 독자를 상징한다. 기욤 뮈소는 작가가 쓴 책이 서점에 풀리는 순간부터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닌 독자의 것임을 언지하고 그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각자 머릿속에 상상한 공간 속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 빌리라고 표현했다. 즉, 이는 톰이 빌리에 대한 애정을 키워간 것처럼 기욤 뮈소도 그의 책을 사랑해주는 독자들을 기억하고 고마워하고 있음을 고백한 수즙은 러브레터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목구멍부터 몸 속 깊은 곳까지 간지러운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따스함과 잔잔함에 몸이 반응했던 것 같다. 점점 깊은 사랑에 빠져가는 톰과 빌리를 보면서 자꾸만 꺼져가는 내 심장의 고동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빌리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톰을 만났다. 손끝을 따라 전해졌던 그 공허함과 쓸쓸함이 그리고 톰이 빌리를 사랑했던 커다란 마음이 파르르 떨리며 결국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기욤 뮈소만이 쓸 수 있는 사랑이야기. 아픔까지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진심어린 고백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단한 작가였던가? 일랑일랑 피어오르는 견딜 수 없는 감동에 내 자신이 그의 책 <종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정말 나쁘다. 이런 대단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다니. 정말 밉다. 또 이렇게 울려버리다니.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무리 견고한 자물쇠로 닫아놓은 마음도 이 소설 앞에서는 눈 녹듯 녹아 버릴 것을 알기에 벌써부터 멀지 않은 미래에 만나게 될 그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가 어떤 때보다도 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