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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속삭여줄게 - 언젠가 떠날 너에게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께> - 이 책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온갖 컬러풀한 사진과 쇼핑 정보 그리고 런던을 지극히 실용적으로 즐기다 올 수 있는 방법들이 가득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을 때 블루 톤의 배경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여러 흑백 사진들에 한 번 당황하고 각 장마다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깨알 같은 글씨들에 놀라 다시 한 번 앞표지를 보게 되었다. 정혜윤이라. 나는 우선 그녀의 이름을 검색창에 쳐보았다. 책 표지에서 읽은 그녀의 범상치 않은 이력들 외에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었고 왠지 이 사람이라면 내 독서 인생의 롤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조금은 건방지고도 염치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라디오 PD이자 지독한 독서가인 그녀는 2007년부터 일 년에 한 권씩 책을 낸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인물이었다. 헌데 그 모든 배경들 속에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며 만난 수많은 책들에 대한 추억들과 지독히도 매력적이고 감성적인 글 솜씨였다. 한 번이라도 그녀의 글을 읽는다면 그녀를 온전히 잊을 수 있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글과 여러 생각들은 치명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매력 그 자체였다. 자, 그럼 내가 읽은 그녀가 떠난 런던 여행의 발자취 속으로 슬그머니 한 발 비집고 들어가 보자.
오래 전부터 "이거 여행기야? 이야기책이야?" 헷갈리는 책을 쓰고 싶었다던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꿈을 이뤄낸 것 같다. 책의 첫 장에서부터 내가 뱉어낸 첫마디가 "아니 이거 여행 책 아니었어?"이니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 폴 대성당, 대영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트라팔가르 광장,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런던탑, 그리니치 천문대 그리고 그녀가 여행 중 꼼꼼히 기록해준 여러 메모들이 마치 원래부터 우리는 한 몸이었다는 듯 온전하게 제 자리를 찾고 있었다. 헌데 이것은 단순한 여행의 기록이 아닌 , 그녀가 인생 속에서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기억들을 런던의 여러 장소와 인물들에게 영감을 받아 새롭게 써내려간 이야기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쩜 이렇게 아는 게 많은지 도대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권의 책을 읽어온 건지 나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정혜윤이라는 사람에게 점점 빠져들어 갔다. 그녀가 놓아준 꽃길을 따라 때로는 시체가 즐비한 전쟁터를 따라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박물관을 따라 나는 또각 소리가 나는 하이힐을 신고 가끔은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는 튼튼한 운동화를 신고서 쉼 없이 걷고 달렸다. 세상 어느 누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내가 런던 한 복판에 있더라도 그녀처럼 느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보게 될 런던이 이토록 아름답고 눈부시며 또 깊고 깊은 우물처럼 끝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듣게 해줄지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봐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한 마디로 정리해보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아.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드래곤볼>.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에게서도 기운을 모으던 손오공, 그의 두 팔 위로 물줄기처럼 꿈틀거리던 심줄들, 등을 타고 흘러내려 결국은 온 몸을 적신 땀방울들, 그 속에서 겨우겨우 만들어낸 커다란 크기의 원기옥. 사실 이 장면은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명장면이라 꼽을 그런 명장면이다. 손오공이 지구를 구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진 것 같아 급하게 돌아와 마무리 하자면 그녀의 책은 한 마디로 "손오공이 들고 있던 원기옥을 전통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맞아보진 못했지만 "아! 이런 느낌이겠구나!"라 생각되는 온 몸에 퍼지는 전율, 손끝까지 찌릿한 짜릿함, 앞으로 나아갈 길의 갈피를 잡은듯한 속 시원함. 이런 기분 좋은 감정들이 어우러져 그 커다랗고도 위대한 폭탄을 맞았음에도 입을 베실베실 웃으며 행복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녀의 이야기를 이제 만나게 된 것이란 말인가. 사실 그녀의 전작들 <침대와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서점에 갈 때마다 들었다 놓곤 했던 책들이었다. 한 권을 온전히 완독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나는 어쩌면 이미 정혜윤이라는 작가가 내 인생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런던이 아니면서도 런던인 이야기, 지극히 고리타분하지만 읽다보면 재미있는 그녀의 독서 기록들, 런던이라는 도시를 그냥 마음속에 접어두기엔 너무나 아쉬워 자꾸만 가방을 싸고 싶어지게 하는 그녀의 속삭임, 마지막으로 세상 모든 이들이 런던에 갈 수는 없지만 그녀가 본 런던은 아무나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자그마한 책에서 느낀 감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아, 물론 책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개인에 따라 지독히 다르게 다가올 수 있으니, 책을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는 분들이나 런던 여행의 정보를 얻고 싶으신 분들에겐 지독히 재미없는 책이 될 수도 있음을 꼭 알려드리고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헛헛함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어제 한 번의 클릭으로 결제한 그녀의 첫 작품 <침대와 책>이 나를 향해 열심히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다 읽으면 그녀에게 이런 무시무시한 영감과 이야기들을 전수해준 그녀가 읽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 볼 생각이다. 언젠가 나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정혜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내일이면 도착할 그녀의 또 다른 책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