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일런트 머신, 길자 - 환상 스토리
김창완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반짝 반짝 빛나는 조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열기가 모여 뭉게구름처럼 두루뭉술 떠오른 뜨거운 공기.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까딱 거리게 되는 리듬. 지금쯤 어느 누구는 "동방신기?" 혹은 "슈퍼주니어?"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2pm이구나!"라고 말할지도... 미안해서 어쩌나. 그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산울림으로 유명한 김창완 씨의 무대였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 그 머리칼만큼이나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타를 잡은 손, 때론 살짝 점프도 뛰어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하는 중년의 사내! 어린왕자가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면 딱 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의 무대를 함께하는 모든 관중들은 놀랄 만큼 흥에 겨워했고 나이와 성별을 떠나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것 같아 보였다. "우와~ 저 아저씨 정말 대단하네."라고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에 아빠는 빙그레 웃으시며 김창완 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과 전설적인 락밴드라 말할 수 있는 산울림은 모두 형제들로 이루어진 그룹이라는 것, 그리고 라디오DJ와 연기자, MC까지 못하는 일 없이 다재다능한 분이라는 사실까지 알면 알수록 신기하다 느껴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어이쿠! 이번엔 책을 쓰셨단다.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이 순간만큼 거짓으로 느껴지는 때가 또 있을까? 궁금증 반 기대감 반으로 읽어간 그의 책은 얇은 두께와는 달리 신비롭고 무게감 느껴지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총 여섯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책은 135페이지의 날씬한 몸매를 뽐내고 있다. 헌데 얇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 그 내용이 상당히 특별하고 새로워서 그 무게감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전제하에 읽는다면 글쓴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쉽사리 알 수 없는 중성적 매력과 우리가 일상에서 쉽사리 지나칠 수 있는 소소한 사건이나 사물에서 시작하는 사건의 전개는 어린 도둑고양이, 편의점의 점원까지도 인생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으로 읽고 있는 독자마저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저 글 쓰는 게 재미있어서 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 글들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리 오래지 않아 원고를 채웠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글들의 모임은 결코 쉽다거나 가볍다고 말할 수 없기에 글을 읽을수록 더 신기하고 때론 이해가 잘 되지 않아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던 것 같다.
잔소리를 조잘거리는 부인과 시끄러운 세상에게서 잠시라도 말을 빼앗고 싶었던 한 남자, 그가 개발한 침묵 기계의 이름은 바로 사일런트 머신, 길자이다. 작은 실험을 거듭해 이제는 지구 전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기계의 계발을 눈앞에 둔 과학자, 누구도 반기지 않는 도둑고양이 가족의 한 자리를 꿰차고 태어나 불의의 사고로 가족과 헤어지고 환상의 숲을 거닐게 된 아기 고양이 죠죠의 이야기, 매일 담배를 사러오는 아가씨를 상상하며 소설을 써내려간 점원의 비밀, 사고 후 차츰 기억을 되찾아가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사실까지 기억해낸 한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 그리고 공허함이 느껴지는 한 판사의 사소한 일상까지, 우리는 <사일런트 머신 길자>라는 책 속에서 그간 소소하다 느끼고 아무런 의미 없이 스쳐가던 일상의 부속품들에서 환상을 느끼게 된다. 사물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이리도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될 수 있음을 그리고 결국 글은 머리 좋은 사람이 쓰는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읽으면 읽을수록 애매모호했던 감정의 기복들이 서평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어져 읽기 쉬운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 나를 힘들게 한다. 가볍지 않은 환상동화를 읽고 나니 서평도 왠지 구불구불 알 수 없는 길로 꼬여만 가는 것 같은 이 기분. 마치 잘 타지도 못하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온 세상을 어지러움 속에서 토해내는 듯 한 그런 기분이었다.
분명 얇은 책이건만 이야기 하나하나를 음미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용이 좀 새롭고 미묘해 쉽사리 읽지 못했던 것인지 며칠 동안 읽어야만 했다. 다 읽고 나서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음음, 이거 뭐지?"라고 되뇌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띠지에서 활짝 웃고 있는 김창완 아저씨의 밝은 미소. "이궁. 그렇게 웃지만 말고 설명 좀 해주세요."라 말하며 나도 모르게 뿌루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내 혼자서 허탈하게 웃어버리고만 내 모습, 지금 생각해도 시원섭섭, 허탈하다. 결코 가볍지 않았던 환상동화. 다음에 또 읽을 땐 부디 좀 더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