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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얼음공주는 나와 정말이지 친했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별명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어라? 친구 별명이 얼음공주였으면 차갑고 쌀쌀맞았겠는걸!"하고 생각하실 테지만 사실 내 친구는 타칭 얼음공주가 아닌 자칭 워너비 얼음공주였다. 그래서인지 도도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때론 너무나 어색해 큰 웃음을 불러일으켜 다 같이 눈물 나도록 배를 잡고 웃은 적도 여려 번이었다. 그녀가 얼음공주로 가는 길은 험난해 보이기만 했다. 오늘 나는 400페이지를 넘어 500페이지가 좀 모자란 두꺼운 책 앞에서 잠시 그 친구를 떠올렸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단지 얼음공주라는 네 글자만으로 친구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얼음송곳으로 스치기라도 한 듯 시려온다.
살해당한 알렉스의 친구이자 사건을 풀어가는 해결사 중 한 사람인 에리카도 친구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차디찬 욕실의 타일을 통해 얼어붙은 냉기가 뼈 속을 파고들고, 욕조 속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어있는 알렉스의 모습이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되어 가슴속으로 날아들었을까? 그녀의 감정은 다분히 절제되고 세속에 찌든 듯 보였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친한 친구였을 뿐이라지만 그 슬픔의 크기는 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부모님을 잃은 아픔과 동생과의 문제로 그녀에겐 더 이상 눈물이 남아있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건에서 미심쩍은 냄새를 맡고 조금씩 진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에리카의 움직임은 도전적이지도 재빠르지도 않았다. 게다가 집중력조차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아 어지러이 흩어지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나는 누가 알렉스를 살해한 범인인지 쉽사리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이게 다 작가가 깔아놓은 징검다리들 중 하나라는 걸 알겠다. 작가는 수많은 인물과 불특정한 사건들을 징검다리 돌 하나하나에 얹어 놓음으로써 마침내 하나의 멋진 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때로는 그 돌 위에서 휘청거려 물에 빠지기도, 얼어붙은 강물이 깨져버릴세라 조심스레 까치발을 들고 걷기도 하며 장장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사건에 매달리고 악몽을 꾸며 잠들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 뒤늦은 소개인 것 같지만 이 소설은 차세대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스웨덴의 작가 카밀라 레크베리의 소설이다. 2002년부터 여섯 개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이 작품은 그녀의 처녀작이라고 한다. 처녀작을 탄탄한 트릭과 짧지 않은 양의 완성도 놓은 소설로 선보였으니 사람들이 그녀에게 왜 이리 큰 기대를 가지는 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왜일까?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안했던 내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던 이야기의 흐름이 범인을 향해 하나씩 물꼬를 트는 순간 나는 지독히도 외롭고 씁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인의 이유,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비밀, 그리고 로맨스라 부를 수 없는 사랑. 어느 하나 밝고 아름답기보다는 안타깝고 마음 아픈 것이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느낀 헛헛함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의 인생사는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하고 때론 그 인물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도 했던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작가가 왜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는지를 조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솔직히 지금도 이 인물이 꼭 필요했던 걸까 생각되는 인물도 분명 있다.
사람이 한 사람의 목숨을 거둬간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일어나는 살인의 이유 대부분이 절대 공감가지 않을 정도로 타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뭐, 사람을 죽이는데 타당할 수 있는 이유 따위야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지만. 이번 사건 역시 사람의 무지와 잘못된 애정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살아있다손 치더라도 알렉스의 삶이 평탄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녀의 차갑게 변해버린 주검은 섭섭함과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오래도록 머물게 했다. 작가의 첫 작품, 그것도 추리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정말 뛰어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일본 추리 문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좀 낯선 풍경이 아닐까 생각되긴 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밥만 먹고 살 순 없는 일 아닌가! 때론 새로운 유럽의 추리소설들이 신선한 충격으로 무료한 일상에 느낌표를 찍어준다. <얼음공주>는 시원한 청색의 느낌표였으므로 이야기의 끝 무렵에 느낀 공허함과 지독한 외로움쯤은 맘씨 좋게 묻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카밀라 레크베리의 다른 소설들과 그녀의 눈부신 발전을 기대해보며 이제는 검색창에 슬쩍 그녀의 이름을,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쳐보아야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