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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우연찮게 아빠와 함께 유랑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내 또래의 소년은 부모님이 서커스에 몸담고 있는 아이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눈망울을 가진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여기 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유랑서커스단의 사정상 우리는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없었고 어느 날 갑작스럽게 안녕이라는 말도 못하고 그 아이는 떠나갔다. 아직도 그 날의 불타는 노을이 기억난다. 휑하니 빈 공터에서 목 놓아 울고 있던 어린 나를 토닥여주던 그 노을이...
[코끼리에게 물을]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그 소년이었다. 지금쯤은 어른이 되어 있을 텐데. 어떤 모습의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을지 정말 궁금하다. 시기는 많이 차이가 나지만 언젠가 그 소년도 노인이 되는 날 이 책의 주인공 제이콥처럼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지는 않을까? 나는 제이콥을 통해 어린 시절의 서커스단의 모습을 그리고 그 소년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볼 수 있었다. 우연히 올라타게 된 기차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서커스단을 만나게 된 제이콥은 그 곳에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으라면 매우 어렵게 몇 가지를 추려낼 수 있다. 워낙에 재미나고 소중한 이야기들이라 나의 짧은 소견으로 그들 중 최고를 고르는 게 조금은 쑥스럽고 미안해진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제이콥의 사랑으로 멋진 쇼를 펼치는 코끼리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늠름한 모습으로 커다란 함성 속에서 멋진 무대를 연출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그려보며 나 역시 사랑으로 코끼리를 토닥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사람의 진심을 통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늙어버린 제이콥은 그 날의 기억을 그리고 암담했지만 아름다웠다고 기억하고 싶은 그 서커스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자식들마저 등 돌려버린 우울한 현실 속에서 어쩌면 그 젊은 날의 추억은 제이콥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힘이 아니었을까?
내 어린 날의 불타던 그 노을과 지금의 제이콥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거라고 생각된다. 그와 나에게 서커스라는 것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려한 모습 뒤에 언제나 남는 것은 허탈함과 쓸쓸함뿐인 서커스와 인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잠시의 화려함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고 그 뒤의 허탈함 속에서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다. 왠지 마음이 자꾸만 복잡해진다. 방심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밀려온 감동스러운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 날의 가슴 아픈 추억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스스로를 토닥이며 나를 진정시키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모순되게도 어렴풋이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