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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필요한 주문
지수현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내 나이 스물다섯...을 두 달 남겨놓고 있다. 언제부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게 두려워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앞 글자가 2로 바뀐 순간부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덩달아 늘어나는 것은 카드의 숫자, 약간의 히스테리와 불안함, 그리고 연애경험정도? 가끔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들에 대해 곱씹어보곤 한다. "그 사람에게선 항상 비누냄새가 났었는데." "그 사람 그때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려고 온갖 애교를 부렸었는데." 생각만 해도 즐거웠던 이런 기억들 끝엔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나쁜 기억들도 있다. "그 인간 나에게 소리 질렀었지." "그때 그 녀석은 정말로 후줄근했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등등의 넋두리 같은 한숨 섞인 기억들. 하지만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이별할 때마다 죽을 만큼 아팠던 나의 심장은 아직도 규칙적으로 잘 뛰고 있고 술이 있어야만 잠들 수 있었던 많은 아픈 밤들은 이젠 왠지 쑥스럽게 느껴지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헤어짐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때 그토록 서로를 아프게 하며 헤어져야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며 울던 내 모습과 덩달아 화를 내던 그 녀석의 얼굴을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리고 있자니 갑자기 가을을 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들 무렵 내 품으로 날아든 책이 바로 지수현작가의 신작 [당신에게 필요한 주문]이었다.
14년을 친구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 그 혹은 그녀가 남자와 여자로 보이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던 경험담들과 이 책에서 만난 경주와 연수를 보며 당연히 나에게도 찾아 올 수 있는 일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경주와 연수는 14살에 친구로 만나 정확히 14년이 지난 28에 사랑에 빠졌다. 오랜 친구 사이였기에 좋은 점도 그리고 나쁜 점도 있었지만 사귀는 동안 그들은 정말이지 행복해보였다. 솔직하게 너와 자고 싶다고 밝히는 경주의 엉뚱한 당당함과 그런 행동이 밉지 않아 준비가 되면 하겠노라 허락한 여자 연주, 그리고 그들이 만든 사랑의 신호 칸타타. 공유가 멋진 양팔을 들어 온 몸으로 느끼게 했던 칸타타의 커피 향이 물씬 풀려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사귀는 동안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은 없듯이 그들의 이별 후 13개월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보는 이별의 이유가 다르다는 것이다. 책 속의 경주와 연수가 누가 먼저 자신을 놓아버렸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듯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그들 앞에서 어쩌면 내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헤어짐의 끝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랑할 때야 누구든 행복하고 주체 없이 뿜어져 나오는 사랑의 엔도르핀으로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바보로 변한다. 하지만 불타오르던 마음이 얼음찜질로 확 식어버리듯 이별은 우리에게 심장이 베이는 아픔을 겪게 한다. 그 이별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딱 한 가지 지키고 싶었던 원칙은 바로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할 것."이었다. 잘 지켜진 적은 없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점점 수월해짐을 느낀다. 경주와 연주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오해들은 그들의 대화로 눈 녹듯 사라진다.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다시 사랑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지저분한 뒤끝이 싫다고 말하던 경주는 연애의 끝이 깨끗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바보 같은 곰탕이 연수는 그들이 아직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책장을 덮으며 부디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까지 숨이 차도록 달리고 또 달리는 것처럼 숨 가쁘게 읽어간 이 책의 마지막장은 내 가슴 속에 응어리져있던 딱딱한 열매를 탁하고 터트려주었다. 가을을 느끼며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 딱 좋았던 소설.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고 이런 글을 써주는 작가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사랑과 이별이란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니기에 횡설수설 말이 많았지만 한마디로 나의 맘을 표현하자면 "참으로 유쾌한 가을이로구나." 정도면 될 것 같다.